춤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섬세하고 세밀한 동작들 사이에서 그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대하는 사람인지 드러난다. 글도 마찬가지이다.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의 내면이 단어와 문장 곳곳에서 드러난다.
큐레이션을 준비하며 내가 써 온 모든 글이 나를 드러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큐레이션의 주제를 ‘나’로 정했다. 이 글에는 시간 순서대로 내 글을 감상하며 글을 통해 변화한 나의 모습을 담았다.
Part 1에서는 에디터 활동 초창기에 주로 소개했던 작품에 관한 글을 담았다. 당시에는 좋은 작품을 소개하고자 하는 목적성이 강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점점 ‘나’라는 사람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는데, Part 2에서는 그런 ‘나’에서 출발한 글 두 편을 담았다. 마지막 Part 3에서는 Part 1과 Part 2를 바탕으로 새로운 감각을 경험한 이야기를 담은 글 한 편을 담았다.
Part 1. Well - Made
에디터 활동 초창기에는 좋아하는 작품을 소개하고자 하는 열망이 글에 나를 녹여내고자 하는 열망보다 더 컸다. 영화 사운드오브뮤직을 시청하고 쓴 이 글도 그런 마음에서 출발했다.
유난히 삶이 버거웠던 그 시기에 나는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목마른 사슴이 우물을 찾는 것처럼, 뭔가 보고 들은 것에 대해 글로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마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쓰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만 같은 그 순간. 다행히도 그 찰나의 순간에 이 영화를 보았고, 조금 단순하면서도 투박한 감상문을 완성했다.
도입부부터 글을 쓰던 당시의 복잡하고 숨 막히는 감각이 느껴져 큐레이션 목록에 포함할지 고민했다. 그렇지만 내 첫 기고 글인 동시에, 당시의 나처럼 일상에서 어려움을 겪는 누군가에게 글의 의미가 전달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선택했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절망의 중심에 서 있다면, 그래서 글을 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나의 첫 기고 글처럼 그저 무턱대고 글을 써 내려가길. 서툰 글도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음을 전하고자 했다.
두 미스터리 드라마를 보고 작성한 감상문도 비슷한 감상에서 출발했다. 유난히 추리소설과 추리 드라마를 좋아하는 나는 이 시기 두 편의 드라마를 열정적으로 ‘본방사수’했다.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도 흥미로웠지만 사실 본질적인 인간의 심리를 탁월하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꼭 소개하고 싶은 작품들이었다.
두 편의 드라마를 하나의 글로 묶으면서 취향은 참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릴 때도 영화보다 드라마를 더 자주 챙겨봤었다. 분량이 점점 짧아지는 드라마가 많아지면서, 한 편 한 편 섬세하게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드라마들이 더 소중해진다. 이 글은 그런 마음을 듬뿍 담은 글이었다.
Part 2. 조금씩 깊어가는
그렇게 글을 기고하다 보니 어째서인지 점점 더 ‘나’라는 사람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나는 왜 이런 작품을 좋아하는지, 이 작품의 어떤 부분이 나를 매료시켰는지 그 본질적인 물음에 더욱 가까워졌다. 그런 물음은 나를 더 깊은 내면으로 끌고 갔다. 다음의 글들은 그런 흐름 속에서 탄생한 글들이다.
영화 ‘A fortunate man’을 감상한 후 생각을 정리한 이 글은, 내 안의 ‘결핍’이라는 방을 열었다. 영화의 줄거리가 마음에 들었고, 언젠가 한 번은 ‘결핍’이라는 주제를 다뤄보고 싶었다. 엄격한 성직자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며 끊임없이 자신이 정당함을 인정받고자 하는 페르의 이야기는 안타까운 동시에 절망적이었다.
한때는 나의 결핍을 어떻게든 삭제하고 싶었다. 내 결핍도 페르의 그것처럼 내가 내리는 모든 선택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이 너무도 잘 보였다. 그러나 결핍이 없는 사람은 없다. 영화를 보며 사실은 모두가 결핍을 가지고 있지만, 그 결핍을 스스로 컨트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페르를 통해 나의 결핍을 온전히 바라보고 인정할 수 있었다.
글을 쓰며 내 안의 것들을 마주하면서,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들’에 관해 하나둘 알아갈 수 있었다. 내게는 당연한 일상이어서 그다지 특별하다고 느끼지 못했던 일들도 사실은 모두 내 취향에서 비롯된 나만의 일들이었다.
공원에 관한 글을 쓰며 깨달았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도심 속에서 나는 평화로운 자연을 찾아다니고 있었다는 걸. 시간이 날 때마다 새로운 지역의 공원을 탐방하고, 그 안에서 보내는 시간을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공원은 혼자 방문해 사색하는 공간으로, 또 어떤 공원은 친구들과 피크닉을 하는 공간으로 이용하면서 도시의 생활을 나름의 방식으로 버텨내고 있었다.
아무리 인공적인 자연일지라도, 아무리 작고 초라한 공원일지라도 모든 공원은 나에게 있어 숨구멍 같은 존재였다. 각 공원이 가진 매력을 전달하면서, 동시에 각자의 숨구멍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라며 써 내려간 글이었다.
Part 3. 최종 목적지, 그리고 Part 4.
매주 한 편의 글을 완성하며 나는 점점 더 깊은 내 안으로 들어갔다. 나를 단단히 지탱하고 있는 뼈대들을 발굴했다. 기고한 대부분의 글은 그렇게 원래 내가 즐겨 향유하고 있던 뼈대들, 그러나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토대들에서 출발한 글이다.
그러다 문득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무언가를 확실하게 좋아하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시기에 만난 예술가가 바로 ‘모네’였다.
▲ Claude Monet with his palette in front of his work 'Lesnympheas', image via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좋아하게 된 계기가 그리 특별하지는 않다. 어쩌면 자연과 공원을 좋아하기 때문에, 모네가 그린 자연이 아름다운 파스텔톤 풍경이기 때문에 마음에 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좀 더 알고 싶었다. 작가에 대해서도, 작품에 대해서도 더 깊게 알고 더 깊게 향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도서관에 가 모네에 관한 책을 빌려 읽었다. 그렇게 시작한 인상주의 화가들에 대한 관심은 지금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인상주의 전시회에도 직접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 새로운 관심이 새로운 발걸음으로 이어진다는 게 참 신기하다.
예술가의 뒷이야기는 생각보다 더 재미있었다. 모네는 내 예상보다도 더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람이었다. 부럽기도 했다. 모네에 비해 나는 폐쇄적이고 고지식해 보였다. 그의 삶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이 글은 그런 깨달음을 집약적으로 담고 있다. 예술을 즐긴다는 것은 결국 그 안에서 거울에 비치는 나를 마주하고 돌아보는 일이라는 걸 이 글을 통해 깨달았다.
글을 쓰기 전 큐레이션 주제에 관해 꽤 오래 고민했다. 내가 써 온 글들은 중구난방처럼 보였고 하나의 주제로 압축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시간순으로 작성한 글들을 읽으며 깨달았다. 나는 문화예술을 통해 나를 알아가고 있었다.
나는 끊임없이 내 안을 돌아다니며 이전까지는 닫혀있던 문들을 마구잡이로 열었다. 그러다 끝내 새로운 방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를 더 알고 싶어서, 더 많은 방을 만들고 그 안에서 즐겁게 지내고 싶어서, 더 다채롭고 다양한 뼈대와 기둥으로 나를 지탱하고 싶어졌다.
예술가의 작품을 보면 그 예술가를 알 수 있듯이, 내 글은 모든 곳에서 온 힘을 다해 나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 큐레이션은 내 글을 통해 나에게 있던 변화의 흐름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였다. 새로운 예술을 받아들이고 이해한 Part 3의 나는 또 다른 Part 4로 나아가고 싶다. 나의 큐레이션을 통해 각자의 글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