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시선과 역사를 빌려 완성합니다.
-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게 되어 너무도 반갑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로 7년 차 타투이스트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 범위를 확장해 나가고 있는 아티스트 파과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2022년 진행했던 첫 인터뷰에서 브랜드를 론칭하고 싶다고 말씀해 주셨던 게 기억이 나요. 3년이 지난 지금, 타투이스트에서 더 나아가 일러스트레이터 파과로 그 꿈을 이루셨다는 게 무척 기쁩니다. 일러스트로 확장하게 된 계기에 대해 듣고 싶어요.
사실 일러스트레이터로서 활동을 확장해야겠다고 꼼꼼하고 세심하게 계획을 세워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요.
저는 항상 타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제 그림으로 다양한 활동을 해보고 싶다는 갈증을 느껴왔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빠르게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을 시작하지 않았던 이유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5년 동안은 오직 타투에만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타투'라는 분야에서 저의 기반을 단단히 다지고 싶다는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일명 '369 슬럼프'라고, 어떤 한 가지 일을 계속하다 보면 3년 차, 6년 차, 9년 차에 슬럼프가 온다고 하더라고요. 일반적으로 직장인들에게 자주 나타난다고 말하지만, 저에게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슬럼프가 찾아온 것 같아요. 타투도 물론 의미가 깊고 즐거운 일이지만, 그 안에서만 해결되지 않는 허전함이 마음 깊은 곳에 계속해서 있었어요. 특히 저는 자신을 타투이스트로 소개하면서도 오직 타투이스트로만 보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항상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다른 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슬럼프가 온 이후로 거의 1년 동안은 제가 나아갈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고 구상하는 시간이었어요. 어떻게 제 활동을 확장시킬 수 있을지도 막막하게 느껴졌고, 나는 무엇을 원하는지, 왜 지금 불만족스러운 느낌을 받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며 저의 정체성에 혼란스러움도 겪었어요.
그러던 중, 그 갈증에 대한 저의 인내심이 한계점을 넘기면서 자연스럽게 도전할 용기가 생긴 것 같아요. 오래 전이지만 제가 다른 이름으로 일러스트 활동을 한 적도 있었고, 예전부터 제가 일러스트나 굿즈 쪽으로 알려지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왔거든요. 그렇다면 서울 일러스트레이션 페어에 참가해 제 그림을 타투라는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알리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고 결심하게 되었고, 그렇게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 중간에 '타투 외의 분야로 확장하는 것'이 무척 막막했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작가님께는 어떤 점이 특히 막막했을지가 궁금해요.
제가 타투를 시작한 지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그동안 저도 정말 많은 손님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중에는 감사하게도 제 타투를 정말 좋아해 주시는 분들도 계셨어요. 그런데 만약 제가 타투가 아닌 다른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게 된다면 그동안 타투이스트로서 저를 믿고 응원해 주신 분들을 실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컸던 것 같아요. 손님들께서 애정 어린 마음을 담아 "평생 타투 해주세요, 어디 가지 말고 한국에서 계속 타투 해 주세요"라고 말씀해 주실 때가 종종 있어요. 그분들께서는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애교를 섞어 말씀하시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저에게는 그 말이 굉장히 무겁게 다가오더라고요. 타투를 하지 않는 제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한 두려움이 정말 컸던 것 같아요.
- 실제로 저는 작가님께서 타투에서 안주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신다는 점이 정말 인상 깊었어요. 작가님은 이제 한국 타투이스트들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할 만큼 큰 인지도를 쌓아 올린 분이니까요. 기반을 다져온 분야에서 벗어나 타투 외의 다른 분야를 새롭게 도전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정말 쉬운 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말씀해 주신 것처럼 제가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이 있잖아요. 제 동료 작가들도 대부분이 해외에 나가서 작업을 이어가기 때문에 저 역시 타투이스트로서 저의 커리어를 더 확장시키고, 세계로 나아가는 선택을 고민했던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타투이스트라는 정체성으로 보다 넓은 곳에서 작업을 하며 지내는 저의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중요한 부분이 빠져있는 듯한 느낌이 계속 들더라고요. 그건, 정말 불편한, 무언가가 뱃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감각이었어요. 그러한 제 내면 깊은 곳의 불편한 생각과 감정을 무시할 수가 없었어요.
[파과의 초여름 작업실] 속 파과만의 따스함이 담긴 일러스트와 굿즈들
- 작가님의 새로운 일러스트 계정의 이름은 [파과의 초여름 작업실]이고, SNS 상 작가님의 소개 글은 '여름의 마음을 안고 그려요.'라는 문장이에요. 작가님의 일러스트와 굿즈를 더욱 자세히 바라보기에 앞서 작가님께 여름, 특히 초여름은 어떤 존재인지가 궁금해요.
초여름, 그중에서도 섭씨 24도의 날은 저에게 항상 기다려지는 이상향 같은 존재예요. (정말 구체적인 온도네요. 하하.) 그렇죠? 하하.
작년은 제게 커리어적으로도 열심히 보낸 한 해였고, 새로운 분야로도 한 발짝 내디딘 해여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제가 작업한 작품들 속에서 헤매다가 안개가 걷히듯 저의 앞으로의 활동 방향성이 탁 트이게 된 순간이 바로 작년 초여름이었어요. 한창 서울 일러스트레이션 페어를 준비하던 때였는데, ‘오늘 날씨가 너무 완벽하다, 행복한 날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온도를 확인해 보면 정확히 섭씨 24도였어요. 정말 1도도 틀리지 않고 말이에요. 저에게 소중한 사람에게 ‘오늘은 날이 조금 추우니까 23도일 거야’라고 말하면 정말 23도였고 ‘오늘은 날이 조금 더우니까 25도일 거야’라고 하면 25도였어요. 저에게 행복한 여름의 기준이 24도가 되었던 거예요.
그래서 섭씨 24도의 초여름은 저에게 제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최적의 날씨였어요.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마주하고 있어도 그리운 존재’라는 표현이 있잖아요. 저에게 초여름이 그런 존재예요. 한여름이 오기 직전, 완전히 뜨겁고 무언가 터질 것 같은 순간이 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을 수 있는 그 순간이요.
제가 지금까지 그려온 그림들을 돌아보면 조금씩 다르긴 해도 큰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바로 ‘기대하는 마음’이에요. 안주하거나 끝내지 않고 더 나아가 계속해서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은 마음을 저는 저의 그림 속에 항상 담아왔어요. 그래서 ‘초여름’이라는 단어 속에 제가 작품에서 추구하는 방향을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이건 이스터 에그 같은 건데, 저의 타투이스트 계정에는 'I paint a midsummer dream’ 이라고 적혀있어요. ‘미드서머(midsummer)’는 한여름이라는 뜻이잖아요. 타투는 우리의 몸에 새겨지는 중대한 발자취라는 생각을 해서 초여름보다 더 무게감 있고 담고 있는 뜨거움이 더 큰, 한여름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일러스트 작품은 저에게 초여름, 타투라는 매체는 저에게 한여름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 저 나름대로의 분류를 해보았습니다.
- 너무 인상 깊은 표현이에요. 일러스트레이터 파과로서, '기대하는 마음'의 정체성을 소개해 줄 작품 하나를 소개해 주신다면.
[우리는 서로의 색을 몸에 잔뜩 묻히고 해를 따라갔어]를 소개해드리고 싶어요.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에 텍스트를 조금씩 넣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텍스트를 더하면 그림이 더 직접적이고 강렬한 느낌을 줄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 시도의 처음이 되는 작품이 바로 이 [우리는 서로의 색을 몸에 잔뜩 묻히고 해를 따라갔어] 예요. 저의 생각을 글과 그림 모두로 녹여냈다는 점에서 저 스스로도 의미가 깊고 마음에 드는 작품이에요.
우리는 서로의 색을 몸에 잔뜩 묻히고 해를 따라갔어
코 끝에는 햇살이 고루 물들었고
다르지만 결국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
우리는 어디에 있든 절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저는 그림을 그릴 때 종종 햇빛이나 햇살 같은 요소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 그림에서 제가 표현 했던 '서로의 색이 묻어있다'는 것은 곧 ‘서로 햇살이 묻어 있다’는 의미였어요. 햇빛은 반사되면서 각기 다른 물체나 사람들에게 다른 색을 비추고, 그렇게 서로 다른 고유의 빛을 만들어내잖아요. 그런 색들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옮겨 묻히는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 일반적으로 돌고래라고 하면 바다에 있는 것을 떠오르게 되는데, 해당 작품에서는 풀숲을 헤엄친다는 것도 인상 깊어요.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하하, 사실 저는 바다보다는 숲을 더 좋아해요. 초록색을 평소에도 좋아해서 초록색 고유의 느낌을 잘 살리고 싶었고, 풀밭이라는 공간이 품고 있는 다정한 분위기가 이 그림에서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따뜻한 느낌을 더 잘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무엇보다도 말씀해 주신 것처럼 돌고래와 풀밭은 잘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이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그 두 가지를 합쳐서 독특한 조합을 시도하여 그려보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습니다.
- [파과의 초여름 작업실]에서 만들어진 제품도 이제 정말 다양해졌어요. [파과의 초여름 작업실]의 대표 제품이 있다면.
현재로서는 아트 포스터와 엽서가 주력 제품인 것 같아요. 제 일러스트가 가장 쉽게 화면 너머 물성으로 다가갈 수 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가장 보여드리고 싶은 제품들이에요.
- 아트 포스터 혹은 엽서를 주력 제품이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작가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아트 포스터와 엽서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대표 작품이 있을까요?
아직 포스터로는 나오지 않았지만 엽서로 여러분께 소개해 드린 [심장을 지키는 파수꾼]과 이번에 나온 [다정한 마음]이 가장 애착이 많이 가는 것 같아요.
[심장을 지키는 파수꾼]은 심장이 가운데에 있고 호랑이 두 마리가 보초를 서듯 지키고 있는 그림인데, 제가 마음이 힘들 때 구상했던 그림이었어요.
저는 그림을 구상할 때 두 개의 방법으로 구상을 해요. 메모장에 머릿 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스케치한 후 그대로 그림으로 옮길 때도 있고, 텍스트만으로 적어놓은 후 나중에 이미지 작업을 하는 때도 있어요. 이 그림은 그 중에서도 첫 번째 방식으로 그린 그림이에요. 어느날 갑자기 ‘두 마리의 호랑이가 심장을 지키는 모습의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곧바로 몰입하여 스케치한 그림이었어요. 아마도 저의 가장 여린 마음을 더 강한 존재에게 보호받고 싶다는 솔직하고 여린 감정에서 비롯된 그림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이 그림은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초석이 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에는 수작업으로 그리려 했지만 결국 디지털 그림으로 완성한 작품이거든요. 그 당시 디지털작업이 아닌 수작업을 정말 오랜만에 시도했는데, 워낙 오랜만에 그리는 수작업 그림이다보니 제 마음대로 그림이 잘 안 그려져서 굉장히 속상했던 기억이 나요. 그 사실이 너무 힘들어서 밤에 침대에 누워 울기도 했었죠. 그래서 한동안 그림을 계속 이어나가지 못하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어떻게 해서든 완성시키고 싶다는 마음에 디지털로 옮겨 그림을 계속 이어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 이후 즐겁게 작업을 이어나갔고 만족스럽게 완성할 수 있었어요.
이 그림은 제가 추구하고, 그리고 싶어 하는 '여린 진심'을 정말 온 마음을 다해 표현한 작품이기 때문에 앞서 말씀 드렸던 [우리는 서로의 색을 몸에 잔뜩 묻히고 해를 따라갔어]와 함께 제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마음을 상징하는 작품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다정한 마음]은 비둘기나 다른 새들이 사람처럼 고개를 맞닿고 있는 모습을 보고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그린 그림이에요. 큰 의미나 깊은 이유를 담아 그린 그림은 아니었죠.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그렸던 그림이었는데 SNS 상에서 정말 많은 사랑을 받으며 지금은 저의 대표작 중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다정한 마음]은 제 안의 틀이 깨지는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해요. 이 그림을 통해 굳이 큰 의미를 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말 무엇이든지 그려보고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거든요. 평소 제가 사용하지 않던 차가운 색을 사용해서 다른 그림들 사이에서도 더욱 부각되는 그림이기도 하고, 저도 볼수록 마음이 따뜻해져서 무척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 저의 생각을 조금 말씀드려보아도 될까요? 작가님께서 [심장을 지키는 파수꾼]은 작가님의 가장 여린 마음을 더 강한 존재에게 보호받고 싶다는 마음에서 그린 그림이라고 하셨어요. 약해진 마음을 호랑이라는 강한 존재에게 지켜지고 싶었다고 말이에요. 하지만 작가님의 말씀을 듣다보니, 작가님의 힘들고 여린 마음을 굳건히 지키는 것은 작품 속 호랑이가 아닌 것 같아요. 그 작품을 결국 완성한, 작가님 그 자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힘들었던 순간에 그리고 싶었던 그림까지 잘 안그려지면 무척이나 속상했을 거예요. 만약 제가 작가님의 상황이었다면 그 그림을 완성하는 것 자체를 포기하고 더욱 더 깊은 상처 속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작가님께서는 수작업을 디지털로 변환하면서까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여린 내면을 지키는 존재가 담긴 그림을 완성하셨어요. 힘든 마음을 스스로 다독이고, 돌파구를 찾으며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 자신의 마음을 지켜내고자 하신거죠. 어쩌면 작가님의 심장을 지키는 파수꾼은, 작품 속 호랑이가 아닐지도 몰라요. 작품 [심장을 지키는 파수꾼]을 그리는 과정에서 작가님의 마음이 품고 있었던 강인함, 그 자체죠.
그리고 앞으로 작가님께서 힘드신 순간이 올 때마다, 과거 [심장을 지키는 파수꾼]을 그릴 때의 굳건했던 작가님의 마음이, 앞으로의 약해진 작가님의 마음을 지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척 인상 깊은 말씀이에요. 인터뷰에 꼭 함께 담아주셨으면 합니다.
- 하하, 다시 인터뷰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아트포스터와 엽서 외에도 다양하게 제품을 제작하며 유독 작가님께서 만족스러웠던 제품의 종류도 있을까요?
떡메모지가 무척 마음에 들어요. 제 그림을 약간의 편집으로 보여주면서 구매자분이 일상에서 매일매일 함께할 수 있다는 점이 정말 기뻐요. 다른 분들이 적어내려는 이야기에 저의 그림이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도 너무 소중하게 느껴지고요. 안경 닦기나 티 코스터 같이 일상에서 쉽게 녹아들고 사용할 수 있는 제품들을 주로 소개해드리고 싶어요.
파과가 초여름 작업실을 운영하며 걸어온 역사와, 앞으로의 발걸음을 들여다봅니다.
- 작가님께서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첫걸음으로 서울 일러스트레이션 페어 (이하 서일페)을 말씀해 주셨어요. 그렇다면 처음 서일페 부스를 준비할 때 가장 집중한 점이 있다면 어떤 점이었을까요? 타투이스트는 예약제로 손님을 받다보니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 되는 부스 운영 과정도 작가님께는 무척이나 낯선 경험으로 다가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2024년 여름, 처음 페어에 나갔을 때의 목표는 ‘타투이스트 파과’와 ‘파과의 일러스트’ 두 가지를 모두 소개하는 것이었어요. '파과'라는 이름을 처음 타투에 관심이 있지 않은 다른 분들께도 소개하는 순간이었고, 저는 타투이스트 파과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때는 파과 타투 도안집과 타투 스티커, 아트 포스터를 함께 두며 일러스트레이터와 타투이스트의 경계를 굳이 구분 짓지 않고 저 자신을 드러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해당 서일페에서는 타투라는 매체를 오프라인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새로운 경험으로 저에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저의 타투를 받아주셨던 분들께서 우연히 저를 발견하고 무척 반가워해주시는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웠고요. 물론 타투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중이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에서는 타투에 대한 인식이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잖아요. 그런데도 저의 타투 도안집이나 타투 스티커 등을 보며 부정적인 이야기는 조금이라도 하지 않으시고 긍정적인 피드백만을 해주셨던 것도 무척 와닿았던 것 같아요.
- 2024년 겨울에 두 번째 서일페에 참가해 주셨어요. 두 번째 참가였던 만큼 첫 번째와는 또 다른 면에서 많이 준비를 하셨을 것 같은데, 겨울 서일페와 비교해 어떤 점이 많이 달랐을지도 궁금합니다.
제가 2024년 겨울에 참가했던 서일페는 확실히 2024년 여름에 참가했던 서일페와는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어요. 여름 때보다 좀 더 그림에 집중해서 겨울 부스를 준비했거든요. 타투이스트라는 호칭을 떼어내고 오직 ‘일러스트레이터 파과’만을 소개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파과’라는 이름과 함께 저의 새로운 브랜드 명인 ‘초여름 작업실’을 함께 부스명으로 적어두었고, 굿즈 종류도 타투 스티커보다는 엽서의 비중을 훨씬 늘려 총 31종의 엽서를 제작했어요. 그 외에도 떡 메모지, 안경 닦기 등 다양한 종류의 상품들을 준비 해서 타투 외의 방향에서 저의 그림을 보여드리려고 했어요.
- '첫걸음'은 2024년 여름의 서일페지만, 정식적인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데뷔'는 2024년 겨울의 서일페였던 거네요.
맞아요. 부스 벽에 걸린 포스터들은 타투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러스트 포스터였고 그래서 타투를 하는 사람이라고 알아차린 분들은 아마 소수였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분들이 저의 그림에 관심을 갖고 좋아해 주셨어요. 그때 정말 타투라는 형식에서 벗어나 제 그림만으로도 다른 분들께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예전에 인터뷰에서 기자님께서 ‘타투는 어떤 의미인가’라고 물으셨을 때, 제가 ‘타투는 나의 그림이 사랑받을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수단’이라고 말했었던 것이 기억이 나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무의식적으로 그 사실에 많이 의지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타투라는 수단 없이도 내 그림이 사랑받을 수 있을까?’ 하고 말이에요. 그 틀을 깰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겨울 서일페였던 것 같아요.
- 서일페에서의 경험이 작가님께는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정말 큰 밑거름이 되었네요.
맞아요. 서일페에 참여하며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길이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트인 것 같아요.
외적으로는 서일페를 통해 입점 제안을 받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였어요. 저는 항상 브랜드를 만들어 다른 곳에 입점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서일페에서의 입점 제안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브랜드 론칭부터 굿즈 제작, 실제 입점까지 전 과정에 참여하며 소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거든요. 제가 막연하게 언젠가 꼭 해봐야지 하고 생각했던 꿈이 드디어 이루어진 순간이었어요. 그때 너무 뿌듯하고 기뻐서 방에서 혼자 기뻐하며 굴렀던 기억이 나요. 하하. 정말 재밌었고, 제가 좋아하는 작가님들도 이런 과정을 거쳤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너무 신기하고 제 자신도 점점 넓어지는 느낌이 들어 무척이나 마음이 반짝였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 그림을 바탕으로 활동할 수 있는 또다른 다양한 기회들이 생겼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저의 활동 범위가 넓어질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러한 경험 속에서 내적으로도 제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 자신을 '타투이스트'라고 굳이 정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거든요. 단지 '이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라고 제 그림을 소개하기만 해도, 그 그림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회가 생기고 제가 그 기회를 통해 즐겁게 활동할 수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사실 브랜드 론칭이나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데뷔를 위해 개인적으로 고민은 많이 했지만, 특별히 막대한 준비를 하진 않았어요. 앞서 말씀 드렸듯, 그저 제가 지금까지 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의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었어요. 그런데 한 발짝 용기를 내어 내디딘 것만으로도 저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잖아요. 그 순간 어쩌면 이전까지 저 자신을 '타투이스트'로만 정의하고 무의식적으로 제 한계를 설정해 놓은 것은 다름 아닌 저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길을 확장하는 것이 그렇게 무섭고 어려운 일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 거예요. 그 사실이 제게 큰 힘이 되어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 같아요.
- 너무도 기쁘면서도 행복했던 작가님의 마음이 잘 느껴지네요. 분명 이와 같이 즐거운 순간들도 있지만, 동시에 [파과의 초여름 작업실]을 운영하며 굿즈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렵거나 막막했던 점도 분명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저에게는 작가님께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척척' 해내는 느낌이라, 하하, 작가님께서는 어떤 점을 가장 어렵게 느끼셨을지 궁금해요.
그렇게 말씀을 해주시니 감사해요.
저의 그림을 좋아해 주시는, 감사한 분들께서 종종 제가 가벼운 마음으로 그린 그림도 굿즈로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많이 해주세요. 그런 요청을 들으면 물론 행복하지만 그럼에도 초반에는 제가 그 요청을 어떻게 소화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감을 잘 잡지 못했던 것 같아요. 작가로서 활동하는 것과는 또 다르게, 브랜드를 운영하고 제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는 제가 중심을 잡고 운영을 이어 나갈 필요가 있으니까요. 그 중심을 잡는 과정에서 어떤 것은 수용하고 어떤 것은 덜어내야 하는지가 어려웠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제 제품을 찾아주시는 분들이 저의 창작물을 우선적으로 보고 찾아와 주셨다는 점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확고한 가치를 가지고 저만의 기준점을 확립하고 나아간다면 저의 길을 응원하고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어요.
- 작가님께서 일 년 동안 굿즈를 제작하고, 브랜드를 운영하며 느끼신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오직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작가님의 내면에 쌓아진 마음이 궁금해요.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기 때문에 운영하며 힘든 점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마음이 크게 들었어요.
사실 처음에는 몇 년 동안 저의 일러스트를 꾸준히 보여줘야만 내가 하고 싶은 일들, 굿즈를 만들고 일러스트레이터로 이름을 알리는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저에게는 그 기회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찾아왔잖아요. 그 기회를 잡게 된 게 처음 정말 당황스러웠어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셔서 오히려 내가 부족한 상태에서 이렇게 기회가 온 것 같아 조금 무서운 마음도 들었어요.
그런데 그때 저에게 소중한 사람이 해준 말이 있어요. 제가 갑자기 그림을 시작한 게 아니라고, 저에게는 언제나 그림이 함께해 왔고 타투를 하면서도 그림들을 계속 그려왔다고 말이에요. [심장을 지키는 파수꾼]도 타투 작업을 열심히 하던 중 그린 작품이었으니까요. 그런 시간들이 모였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인정받을 수 있는 거라는 것을 듣고 나니, 저도 ‘그래, 나도 그 시간을 거쳐서 제대로 여기까지 온 거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때 제가 그동안 쌓아온 시간들을 제대로 인정해야겠다고 느꼈던 것이 유독 기억에 남네요.
- 앞으로 [파과의 초여름 작업실]에서 만들어나갈 굿즈를 스포해 주신다면.
제가 [파과의 초여름 작업실]을 운영하며 깨달은 또 다른 점 중 하나가 바로 제가 추구하는 방향성은 ‘파과의 일러스트가 담긴 굿즈’가 아닌 ‘파과의 일러스트’ 그 자체라는 것이에요. 다양하게 제품을 시도해 보니 저는 굿즈나 제품을 만드는 그 과정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아니더라고요. 굿즈를 제작하는 이유도 결국 저의 그림 자체를 잘 보여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을, [파과의 초여름 작업실]을 운영하며 깨닫게 되었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조금 더 아트 포스터와 엽서 등 저의 그림을 온전히 보여드릴 수 있는 제품을 많이 만들고 싶어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본다면, 저는 대형 패브릭 포스터나 벽에 붙여놓을 수 있는 아트 포스터에 관심이 많아요. 또, 러그도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아직 구체적으로 어떤 모양이나 스타일을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모두 큰 그림이 잘 보일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커요. 언젠가는 꼭 열심히 준비하여 여러분들께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 ‘굿즈를 만드는 과정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깨닫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어요. 무척 인상 깊은 표현인데.
타투 외의 분야에서 활동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굿즈를 제작하는 것이 처음이다 보니 다른 작가님들은 어떤 방향으로 브랜드를 운영하시는지 다양하게 찾아보았어요. 그랬더니 작품을 좋아하는 분들께 작가님들께서 다가가는 방식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뉘더라고요. 첫번째는 다꾸나 문구 제품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문구류 제품을 만들고 운영하는 방법이고 두 번째는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로 행복을 느끼며 그림이 실생활에 녹아들 수 있도록 제품을 만드는 방법이었어요.
저는 처음에는 첫 번째 방식으로 접근해서 제품을 제작했어요. 하지만 두 번의 페어 경험을 통해 진짜 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과정에서 제 방향을 정리할 수 있었어요. 저는 굿즈를 만들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린 후에 그 작품을 바탕으로 굿즈를 제작하는 방향을 더 추구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전자보다는 후자에 더 가까운 작가인 것 같아요.
- 앞으로 작가님께서 [파과의 초여름 작업실]을 운영하며 풀어나갈 숙제가 있을까요?
사실 저에게는 '입점'이라는 것이 단지 버킷리스트에 가까운 목표였잖아요. 정말 제 가치와 완전히 연결된 목표라기보다는 하고 싶었던 일을 해본 거였죠. 그래서 여기서 끝이 아니라 이제는 이걸 어떻게 유지하고, 제 꿈과 어떻게 연결시켜 나갈지에 대해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된 거 같아요. 이것을 풀어나가는 것이 앞으로의 숙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파과의 아트북 [상처받은,]을 살짝 엿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