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시선이 틔우는 다채로운 세상을 마주합니다.
- [별바라기] 시리즈 중 대표 작품을 하나 꼽아주신다면.
[숨이 멎기 전에]를 말씀드리고 싶어요. 저 자신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가시라는 소재는 저의 작품 전반적으로 계속 등장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등장할 예정이에요. 선인장의 가시, 선인장의 뼈대로 표현되는 가시, 오아시스에 비친 가시… 이렇게 꾸준히 등장하는 ‘가시’라는 요소는 다름 아닌 저의 마음속에 뻗어져 있는 가시를 의미해요.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에, 제 마음속에 위치한 가시를 보다 직관적으로 정의한다면 바로 ‘방어 기제’인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 가시가 있는 존재는 타인이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그 가시를 갖고 있는 것이잖아요. 그들에게 가시라 스스로를 보호하고, 타인을 위협하기 위한 수단이죠. [별바라기] 시리즈의 바탕이 되는 저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아주 깊은 어딘가 침몰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의미에서 가시를 계속 표현하고 있어요.
뿐만 아니라 제가 10대 때는 굉장히 회피하는 성격이었어요.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치다가 도달한 곳을 시각화한 것이 바로 사막이었어요. 이후 작품 [선인장]에서 문지기와 같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는 선인장들을 마주하고, 수많은 가시에 찔리면서도 선인장을 껴안는 과정으로 한 걸음 성장하고, 그렇게 마주한 풍경을 그리 것이 바로 [숨이 멎기 전에]였어요. 선인장을 껴안으며 보듬음에도 그 안의 가시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 선인장이 사라진 그 뒤로도 사막이라는 공간은 끝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결국 제가 아무리 받아들이고, 성장하고, 변화해도 그 안에 가시가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을 담아낸 작품이죠. 이 모든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포용하는 과정'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숨이 멎기 전에]라고 생각하고, 그만큼 저에게 굉장히 뜻깊은 작품이기에 대표 작품으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 작가님의 작품은 항상 시와 같은 글과 함께 올라와요. [숨이 멎기 전에]에도 긴 글이 함께 올라왔죠. 대표작으로 꼽아주신 [숨이 멎기 전에]의 문장 중 작품을 관통하는 한 문장을 꼽아주시겠어요?
'마지막 숨을 내쉬기도 전에, 갈기갈기 찢겨서 나를 잃어버린대도
나는 이 세상의 끝을 보고 말 거야.'
오랜 시간 나를 기다려 온 선인장이 바라던 것은
'포용' 그뿐이었다.
나의 가시를 두려워하지 않고서, 마주하는 것.
그리고 품속으로 반기는 것.
그를 꼭 끌어안자, 온전한 가시만 남은 채
응어리들은 이내 사그라졌다.
어쩌면 마지막 생명이었을지 모르는 그들마저,
내 품에서 사라져 갔다.
가시 사이의 비어버린 틈은 이제 작은 길이 되고,
거친 숨결은 그 핏자국 속으로 나를 이끈다.
공허하다.
틀림없이 이 사막은 죽어가고 있다.
텅 비어버린 이곳을 채울 수 있을까,
다시 삶을 불어넣어 줄 수 있을까.
저편에서 옅게 들려오는 색의 소리를 따라,
사막의 마지막 숨을 들이켠다.
'그를 꼭 끌어안자. 온전한 가시만 남은 채 머리들은 이내 사그라졌다. 어쩌면 마지막 생명이었을지 모르는 그들마저 내 품에서 사라져 간다.' 저는 해당 문장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척박한, 사막이라는 공간에서 비록 가시를 품고 있음에도 선인장은 어찌 되었든 탄생하게 된 하나의 생명이잖아요. 그런데 저 스스로를 마주하겠다고 그 선인장을 껴안은 것이 오히려 선인장을 죽이는 결과로 이어졌죠. ‘내가 내 손으로 다 망쳐버린 것일까?’ 싶은 그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해요. 해당 [숨이 멎기 전에]와도 가장 잘 어울리고 저도 제일 와닿은 문장인 것 같습니다.
-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응어리가 풀린다'라는 것은 굉장히 긍정적인 의미가 있잖아요. 그런데 작가님의 시리즈에서는 응어리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고, 이것이 사라지는 것을 오히려 부정적으로도 표현하죠. 저는 그 점이 굉장히 색다르면서도 의문스러웠어요. '응어리가 풀린다'라는 것이 작가님께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요?
저에게 '응어리가 풀린다'라는 것은 긍정적이기도 하고, 부정적이기도 한 것 같아요.
전반적인 흐름으로 보았을 때는 응어리를 상징하는 선인장이 사라지고 길이 트임으로써 내일로 갈 수 있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이 생기는 것이잖아요. 하지만 작품 속 화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시들이 사라지지 않고 끝까지 남아있다는 점에서 허망함을 느끼죠. 선인장만 없애면, 응어리만 풀리면 그 앞은 보다 행복하고 풍요로운 길이 있을 것만 같았는데 실상은 그 안에 숨겨져 있었던 또 다른 가시들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 앞은 여전히 황량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저에게도 '응어리가 풀린다고 내가 무조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구나, 응어리가 풀리며 오히려 그 안에 숨겨져있던 상처가 드러나게 되었구나'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작품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성에 대한 막막함, 그리고 회의감이 함께 담기게 된 것 같아요.
- 사실 제가 작가님의 [별바라기] 시리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도 해당 '응어리'를 상징하는 선인장이 처음으로 등장했던 작품 [선인장]이에요. 대표 작품으로 말씀해주신 [숨이 멎기 전에]의 바로 전 작품이기도 해서 함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선인장]은 어떻게 제작하게 된 작품일까요?
해당 작품은 그림을 그릴 때 구도를 잡으면서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던 작품이에요. 지금까지 보여드린 [별바라기]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구도에 신경을 많이 썼죠.
최종적으로 완성된 [선인장]에는 ‘경외감’이라는 키워드가 전반적으로 내포되어 있지만, 사실 처음에는 ‘경외감’이라는 키워드를 그릴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선인장도 이렇게 거대한 것이 아닌 평범하게 사람의 키만 하고, 대신 그 모양이 배배 꼬여있도록 구상했죠. 자기 자신의 가시에 찔려 아파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껴안는 것을 그만두지 못하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림을 그릴수록 ‘이게 정말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이 맞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었어요. 모양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말이에요. 그래서 고민을 많이 하다가 어느 순간 지금의 기괴하고, 경외감이 드는 거대한 선인장의 일렬을 마주하고, 그 다수의 선인장 중 하나가 ‘나’와 대면하는 구도가 갑작스레 번뜩 떠올리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 생각을 바탕으로 급하게 완성한 작품입니다. 저 스스로도 구도가 굉장히 마음에 들고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그림이에요.
- 작가님께서는 '경외감'과 '응어리'가 선인장의 정체성이라고 표현해 주셨는데, 어째서인지 저는 이 그림을 보면 ‘죄책감’도 함께 드는 것 같아요. 구도 때문인자 선인장이 저를 탓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정확하게 봐주셨어요. 결국 이렇게 선인장이 거대해지고, 이렇게 빼곡히 서 있게 된 것은 마음속의 상처가 응어리지고 거대해질 때까지 저 스스로가 방치했다는 것을 뜻하거든요. 그래서 해당 그림과 함께 올렸던 글 중 ‘선인장은 날 반기지 않는다. 아니 나를 반길 수 없다’라는 문장이 있어요. 마음속 선인장은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돌보지 않았던 ‘나’를 원망하고 있는 거죠.
이제 진정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을까, 생각하던 찰나
그림자가 되어 나를 가로막은 것은 선인장이었다.
몸을 한껏 치켜세우며,
다가오지 말라는 듯 가시를 곤두세운 모습들.
도망치는 법밖에는 알려진 것이 없는 곳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서로에게 서로를 겨누는 것뿐이었다.
오랜 시간 방치되어 곪아 터져버린 나의 흉터는
끝내 괴물이 되었다.
이들은 이제 나를 내려다볼 만큼 거대해져
영원한 도피를 택한 사막을 지킨다.
그들의 철저히 계산된 뒤엉킴은
이곳을 더 기이하게 재단한다.
한 치 앞도 나를 내다볼 수 없도록.
'너를 피해 여기에 왔는데,
여전히 너는 내 앞을 막아 세우는구나.'
선인장은 날 반기지 않는다.
아니, 나를 반길 수 없다.
- 제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 [선인장]인 것처럼, '대표작품'은 아니어도, 작가님께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혹은 좋아하시는 작품도 소개해 주신다면.
[그림자의 샘]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우선, 색이 정말 예쁘게 나왔어요. 그런데 이는 단순히 ‘보기에 예쁘다’를 넘어서서 굉장히 큰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전까지 제가 그렸던 [별바라기] 시리즈의 작품들은 모두 색이 굉장히 삭막했어요. 종종 제가 ‘흑백이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말이에요. 이는 결국 저의 내면이 그만큼 어두운 상황이라는 뜻이었죠. 하지만 [그림자의 샘]과 함께 적은 글에 ‘색의 소리’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색의 소리'를 듣고 찾아가 발견하게 된 것이 바로 [꽃 한 송이]에서 있던 붉은색 꽃이었어요.
지금까지 제가 표현했던 아주 척박한, 무채색에 가까운 사막에서 '색의 소리'를 듣고 실제로 붉은 꽃을 찾아냈다는 것은 새로운 내일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해요. 그리고 그렇게 발견한 꽃이 오아시스에도 데려가 주고요.
- [그림자의 샘]은 말씀해 주신 것처럼 오아시스를 그린 작품이에요. 사막 안에서 발견한 오아시스라고 하면 귀중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작가님께서 함께 올려주신 글을 읽어보면 마냥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거짓된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이 특히 인상적인데.
바다를 닮은 익숙한 일렁임,
작은 샘물이 모래알 위를 찰박였다.
다 메마른 줄 알았던 깊은 곳에 어제의 잔해가 숨 쉬고 있었다.
마치 그가 준비한 선물이라는 듯 놓여 있던 것,
색의 소리를 시작으로
꽃은 계속해서 내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다.
샘에 비친 사막은 그늘 하나 없이 반짝였다.
바깥세상이 지닌 평범한 낮처럼.
거짓된 아름다움에 홀려 샘물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잠시 오늘에 눌러앉을까.’
꽃이 들려주는 내일의 이야기가 다시 멀어지는 듯했을 때,
샘에 어둠이 드리웠다.
줄곧 나를 따라오던 그림자였다.
그 그림자는 일렁임에 흐트러지던 와중에도 가시를 놓지 않았다.
그것은 다음의 이유가 되었다.
샘이 보여 준 온전한 나는 여전히 내일에 굶주리고 있었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내가 더 자라날 수 있을까?'
가시를 넘어 겨우 오늘에 닿았건만,
그는 나의 속 깊숙이 남아 끝내 나를 그려냈다.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일반적으로 오아시스라고 하면 사막에서 귀하고 긍정적인 것을 의미하지만 저의 작품에서 오아시스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모두를 뜻해요.
오아시스는 거울의 역할을 하며, 총 두 개의 모습을 비추고 있어요. 첫번째로는 사막의 풍경을 그대로 반사하고 있어요. 처음 화자가 물에 비친 사막의 모습을 바라보고서, 그토록 찾던 ‘내일’을 잠시 멀리할지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죠. 제 작품에서 낮 시간대가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보기에 아름다워 보이는 건 사실이니까요. 오아시스에 ‘자리를 잡고’ 피어난 꽃과, 그 꽃과 물을 보고 ‘자리를 잡아버린’ 화자의 모습은 오아시스가 있었던 덕분에 저의 작품 안에서 꽃도 피어날 수 있었던 것이고, 화자도 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해요. 그렇기 때문에 오아시스는 생명의 터전인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인물의 발을 잡는 족쇄와도 같은 요소가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저의 작품 전반적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앞으로 나아가자’는 것인데, 척박했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함으로써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어려워지거든요. 계속 그 오아시스를 들여다보고 싶고, 안주하고 싶어지니까요. ‘그냥 이곳에서 오아시스의 달콤한 물만 마시며 살아도 되지 않을까?’, ‘지금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게 되죠. 과연 그것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앞서 오아시스는 거울의 역할을 하며 두 개의 모습을 비춘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두번째로, 화자인 ‘나’의 그림자를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 보여주고 있어요. 낮에는 그림자로 존재하는 화자가 이제껏 자신을 직접 마주볼 기회가 없다가, 샘물을 통해 나의 모습을 확인해요. 그랬더니 자신 스스로가 가시였다는 것을 깨닫게 돼요. 아름다운 백야지만, 그 아래 나 자신이 결국 그림자라면 태양빛만을 받고 살 수 없겠죠. 때문에 화자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내일로 나아가게 되었던 거예요.
이 모든 이야기에서 결국 오아시스는 단순히 '긍정적인 요소' 혹은 '부정적인 요소'로 정의내릴 수 없을 것 같아요.
아둠을 기회 삼아 빛을 내는 것, 전시 [틔움]
- 이번 전시가 작가님의 첫 전시로 알고 있어요. 전시에 참여하게 된 소감을 먼저 여쭤보고 싶어요.
처음에는 굉장히 당황했어요. 이런 기회가 저에게 왔다는 사실에 굉장히 놀랐거든요. 제안을 받았던 자리도 대표님과 처음 만났던 자리였는데, 초면에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표님께서 전시에 함께 할 것을 제안해 주셨죠. 정말 얼떨떨하면서도 감사한 마음이 컸어요.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닌 만큼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 중이에요.
현재로서는 아무래도 공식적으로 처음 저의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다 보니 첫인상을 잘 보여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어요. 그리고 저의 개성과 작품관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며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 작가님에게 이번 전시를 포함하여 '틔움'이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틔움’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미지는 새로운 생명의 싹을 틔우는 긍정적인 이미지에요. 저의 작품 속에서 삭막한 사막에서도 꽃이 피고 오아시스가 나타난 것처럼, 희망적인 싱그러운 녹음이 틔어 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를 통해 내일로 나아가고, 내 마음속의 것들을 마주하고, 피하지 않고, 성장해 나가는 과정 그 자체가 ‘틔움’이 아닐까 해요.
[별바라기]와 연결을 지어서도 '틔움'은 무척이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해요. [별바라기]는 내 마음과 끊임없이 대면하고, 여러 어려움에 부딪히다 끝내 ‘별’이라는 목표를 가지게 된 화자, 나아가 저 자신의 이야기잖아요. 별바라기의 세계관 속 백야는 제 10대를 상징해요. 대부분은 학창시절을 추억하고, 그리워하지만 저는 그러지 못했고, 그러한 저의 모습이 ‘백야’처럼 느껴졌어요. 겉으로 보기엔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속에 갇힌 저는 빛나는 사람들 아래 ‘그림자’가 되어버렸으니까요.
그러다 ‘꽃’의 도움을 받게 되고, 그렇게 [별꽃을 따라]라는 작품에서 밤을 만나게 되어요. 그런데 그렇게 마주하게 된 밤은 저의 생각과는 다르게 마냥 어두운 존재가 아니었어요. 어둠 속에서 더 환히 빛나는 별들이 있었거든요. 그때 저는 ‘꼭 태양이 될 필요는 없겠다. 내가 가진 어둠을 부정하기보다, 그를 배경 삼아 별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어둠을 기회 삼아 아름다운 빛을 내는 것, 지금 생각해보면 그 자체가 '틔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사실, 작가님의 작품 시리즈 중 [별바라기] 시리즈 외에도 [까막별] 시리즈도 함께 전시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실제로 작가님께서도 [까막별]을 함께 고려하셨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이번 전시에서는 오직 [별바라기]만 전시하기로 하셨어요. 그 이유가 있다면.
처음에는 저도 어떻게 작품을 구성해야 가장 관람객들에게 잘 다가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굉장히 많았어요. 현재 제가 가장 크게 이어나가는 시리즈는 말씀과 같이 [까막별] 시리즈와 [별바라기] 시리즈, 이렇게 두 개잖아요. 그리고 이 두 시리즈 모두 제 내면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요. [까막별] 시리즈는 현재를 살아가는 저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별바라기] 시리즈는 제가 아주 어릴 적에 갖고 있었던 과거의 이야기들을 내포하고 있죠.
그런데 [까막별] 시리즈와 [별바라기] 시리즈 중 결국 [별바라기] 시리즈가 우선시되어야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별바라기] 시리즈를 통해 제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저의 내면을 찾는 과정을 가졌고, 그로 인해 [까막별] 시리즈까지 이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니까요. [별바라기]를 짚고 넘어가야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저의 작품들, 그리고 앞으로 나올 작품들도 더욱 이해하기 편하실 것이고, 더욱 마음 깊이 와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관람객분들께서 제 작품, 그리고 은유라는 작가에 대해 절대 거리감을 느끼지 않으셨으면 해요. 별이라는 존재가 분명 멀리 있는 존재이지만, 그래도 밤하늘에서 찾아볼 수 없는 유니콘과도 같은 별이고 싶지는 않죠.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에서는 [별바라기]만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 그렇다면 이번 첫 전시를 통해, 관람객에게 어떤 첫인상을 남겨주고 싶은지도 여쭤보고 싶어요.
모든 사람들에게는 내면의 모습이 있잖아요. 저는 이번 전시의 관람객이 저의 작품을 보며 ‘이 작가는 내면의 모습을 활용하여 긍정적인 마인드로 변환시키고,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를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결국 전체적으로 제가 '은유'라는 이름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기 때문에, 저의 작품을 보시는 분들도 모두 하나하나 빛나는 작은 별이라는 것을 느껴주셨으면 해요. 그렇게 위로를 받아주시면 무척이나 기쁠 것 같습니다.
- 전시에서 작품을 봐주시는 분께 작가님의 작품 관람의 팁을 드린다면.
저는 전시에서 제 작품을 봐주시는 분들께 가장 첫 번째로, 섬세하게 봐주시면 좋을 것 같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멀리서 보면 보지 못하는 것들을 가까이서 보면 보다 세밀하게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일반적으로 다른 작가님들께서는 선 하나하나를 뜯어보기보다는 멀리서 작품의 전체적인 모습을 봐주시는 것을 선호한다고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의 작품은 멀리서 보기보다는 하나씩 뜯어봐 주시면 더욱 즐거울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액자에 찰싹 붙어서 봐주세요. 하하.
두 번째로, 제가 그림 안에 굉장히 많은 이야기들을 숨어두었어요. 아주 사소하게 보이는 것도 다 나름의 의미를 담고 있어요. 정말 그림 속 요소 하나하나가 다 저마다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모래의 질감, 그림자의 방향, 심지어 그림자의 결까지 말이에요. 그래서 보시는 분들께서 요소 하나하나를 보고 각자의 시선에서 추측하며 작품 속 이야기를 풀어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건 왜 이렇게 변화했을까?', '왜 이 방향으로 그려졌을까?' 생각하며 그렇게 작품에 몰입해서 자세하게 살펴보시면 더욱더 세심하게 작품을 즐기시고, 제 시리즈의 다음 작품들도 즐겁게 기다리실 수 있으실 것 같아요. 즉, 제 작품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무리 지으며
- 정말 세심하게 그림을 그리신 게 느껴져요. [별바라기] 시리즈 뿐만 아니라, 작가님의 모든 작품이 작가님만의 이야기로 가득 차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 작가님의 작품 속 숨은 내용들을 모두 오픈할 예정은 없으실까요?
제가 이야기하면 결국 그 사고 안에 갇힐 수밖에 없잖아요. 저는 별바라기가 제가 의도한 이야기에만 머무르는 것을 원하지는 않아요. 실제로 저도 스토리를 짜고, 그림으로 옮기고, 그 사이의 관계성을 고민하면서 제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연결점을 찾기도 하거든요. 그림을 봐주시는 분들 나름의 해석과 이야기가 더해져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지금 당장은 조금 어려울 것 같지만, 정말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는 공개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사실 지금 그리고 있는 별바라기 시리즈의 글도 여러 버전이 있거든요. 아트인사이트에서 공개한 글 외에도, 저의 마음을 담은 글들이 다양하게 보관되어 있어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그 글을 모두 풀어내고 싶다는 생각도 해요. 그렇다면 또 저의 작품을 관심 있게 지켜봐 주시는 분들께서도 ‘이 부분은 이렇게 다르구나’, ‘원래는 이런 의미도 있었구나’ 생각하며 즐거워하실 기회도 될 것 같아요. 하지만 그렇게 나중에 공개하더라도 완전히 모든 것을 오픈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 마지막으로 전시에 찾아와주실 분들께, 그리고 이 인터뷰를 읽어주실 분들께 인사 부탁드립니다.
저는 굉장히 꿈이 많은 사람이에요. 저의 작품을 봐주시는 분들께서 저의 작품을 통해 위로를 받아주셨으면 좋겠고, 저의 앞으로의 작가 활동도 계속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특히 [별바라기] 시리즈는 완결이 난 이후에는 개인전을 열 의향도 있고, 그 외에도 오프라인에서 다양하게 활동하며 여러분을 찾아뵙고자 합니다. 저는 저의 작품을 봐주시는 분들이 정말 궁금해요. 어떠한 시선으로 저의 작업을 봐주실지, 어떤 이야기들을 풀어내 주실지 등… 그래서 다양한 방향으로 저도 소통하고자 해요.
아무래도 제가 신진 작가다 보니 긴장되는 부분도 있는데, 혹시나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래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봐 주셨으면 해요. 최선을 다하는 작가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