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대’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언제부터 그 말을 싫어하게 됐냐고 묻는다면 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학급 대표로 나간 대회에서 우연히 우승 후보에 올랐던 때인가, 합격을 기대하며 대학교 홈페이지를 열어보던 열 아홉살 때인가.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 단어에 대한 반감은 겹겹이 쌓여갔다. 기대에 부응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과 실패에 대한 좌절감 같은 것들은 나를 쉽게 체념하게 했다.
물론 돌이켜보면 좋았던 기억들도 있다. 하지만 나쁜 기억은 대체로 좋은 기억보다 오래, 그리고 강렬하게 남는다. 대회에서는 간발의 차로 우승을 놓쳐버렸고, 꿈에 그리던 대학교는 나를 매몰차게 거절했다. 이외에도 수많은 기대와 좌절이 있었지만, 굳이 나열하지는 않겠다. 어쨌든 그렇기에 나는 매번 기대처럼 되지 않는 삶에 슬퍼했다.
그래서 나는 기대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사실 이건 마음 깊이 다진 결의보다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 실망하지 않기 위해 마음속에서 커져가는 희망이나 기대를 외면했다. 결과에 대한 예상은 무조건 부정적으로, 그럴 리 없다는 말만을 되뇌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야 그 결과가 어떻든 겨우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생은 그런 것들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결심을 무너뜨릴 변수를 내던졌다. 기대에 대한 실망은 영원히 실망만으로 남지 않았다. 그것은 또 다른 예상 밖의 결과였다. 2등이라는 아쉬운 결과에 나를 위로해 주던 짝꿍과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정말 가고 싶지 않았던 대학교에서는 장학금까지 받았다. 기대한 것처럼 된 것은 하나도 없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잘살고 있는 것 같다. 무너진 기대와 예상치 못한 희망, 그 속에서 내 굳은 결심은 바스러지고 만다.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어서 재밌다’라는 말이 이제야 조금 이해된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기대에 부응한다면 그건 정말 잘된 일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는 너무도 지루한 일이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결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스스로 희망을 걸며 인생의 재미를 찾는다. 이따금 찾아오는 좌절 속에서도 끊임없이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며 살아간다. 그 작은 기대는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다룬 게임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Detroit: Become Human은 기나긴 과정 속 기대의 필요성과 삶 속의 불확실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게임의 주인공이자 안드로이드인 ‘코너’는 정해진 임무를 수행하는 ‘완벽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과 자신의 선택 속에서 기대와 좌절을 반복한다. 코너의 기대와 좌절, 그리고 선택 속에는 엄청난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인터랙티브 무비 장르의 게임으로, 등장인물의 선택지에 따라 엔딩이 바뀌게 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예, 아니요 등 단순한 선택지뿐만 아니라, 주변인들의 호감도, 여론, 기능 등 여러 종류의 게이지가 존재하며 이를 기준으로 분기점이 나뉜다. 디트로이드 비컴 휴먼의 엔딩 개수는 약 85개로 여러 선택지나 변수를 고려하면 100개 이상의 엔딩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선택의 결과는 항상 명확하지 않고, 때로는 기대와 다른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엔딩 분기에 들어선 코너가 다른 등장인물의 말에 ‘침착하게’ 대답하느냐, ‘비아냥대며’ 대답하느냐에 따라 결말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겪어보지 못한 수많은 결말은 계속해서 기대를 품게 하고, 새로운 선택을 권하며 더 나은 엔딩을 꿈꾸게 만든다.
이러한 다양한 선택지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전개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끊임없는 변화와 기대를 경험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는 인생에서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어떤 이벤트가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더 나은 삶을 위한 기대를 품고있기 때문이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게임에서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기대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여전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기대하는 삶은 인간다움의 증거다. 설령 실패와 슬픔이 찾아오더라도, 알 수 없는 내일을 기대하며 도전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작은 행복이자 특권이다.
당장 내일 예상치도 못한 데이트 신청 문자를 받을지도, 면접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길을 걷다 크게 넘어질지도 모른다. 또 어떤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못 이기는 척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기대는 미래를 바라보지만, 그 과정에서 현재의 순간을 특별하게 만든다. 기대하는 삶은 미래를 꿈꾸게 만드는 동시에 현재를 즐기게 해준다.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예측할 수 없는 인생 속에서 찰나의 결과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매 순간 희망하고, 내일을 기대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다채로움은 결국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일이 기대된다. 거창한 기대보다는 구내식당의 점심 메뉴나 천 원짜리 복권의 결과 같은 소소한 것들이 기다려진다.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온대도 나는 별수 없이 다시 내일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매일을 즐길 수 있는 작은 설렘을 주는 삶. 내가 생각하는 행복한 삶은 끊임없이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