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동화책을 읽으면 결말은 항상 이렇게 끝나고는 했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는 행복이라는 건 그냥 주어진 난관을 지혜롭게 극복하면 자연히 오는 보상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작 서른 페이지 안팎으로 끝나는 짤막한 동화책 안에 어떤 삶이 압축되어 있는지 그때는 몰랐다. "구박받으며 살았답니다."라는 그 한 줄 안에 몇 년의 세월이 녹아들었는지, 어떤 아픔이 있었는지 세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가. 이따금 살면서 내 인생이 한 편의 이야기 같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내용일지 내심 궁금해진다. 그저 그런 감동도 없고 미적지근한 사람 사는 이야기가 될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고 가슴을 울리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될지 잘 모르겠지만 대략 3부로 나눈다고 가정했을 때 지금 내 인생은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 1부의 첫 장에 한 줄 정도로 남아있을까. 내게 오는 고난과 시련은 몇 줄 짜리일까. 어쩌면 동화책처럼 한 줄 안에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시련이 달려있을 지도 모른다.
행복의 간소화
"행복이 뭐 별거인가? 맛있는 것 먹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내가 가장 즐겁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하면서 푹 잠자는 게 행복이지." 내 기조가 이렇다. 되도록 큰 변수가 없고 지루하더라도 안온한 삶이 지속되는 것.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인기 있는 삶의 형태지만 실현하기 제법 어렵다. 그렇다면 이 삶을 영위하기 위한 과정이 내게 주어진 고난과 시련이겠구나.
어차피 겪어야 할 고난이지만 행복이라는 가치를 너무 크게 생각할수록 부담이 될까 봐 행복을 간소화해서 다루기로 했다. 나중에 찾아올 커다란 행복을 기다리면서 중간중간 소소한 행복을 끼워서 잠깐씩 그 달콤함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일상 속에 사랑하는 순간들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었다.
집 밖을 자주 나가는 외향적인 인간이 아니지만 이따금 산책하고 싶은 생각이 확 들 때가 있다. 집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나오는 공원으로 걸어갔다. 호숫가를 끼고 있는 공원 뒤에 있는 언덕배기를 올라가 보았다. 아주 어렸을 때나 올라가 봤는데 새삼스러웠다. 장마가 지난 늦여름이었다. 해가 나오지 않은 흐린 날씨였지만 바람이 미지근하게 불어서 참 좋은 날씨였다. 언덕배기에 놓인 벤치에 앉아서 노래도 듣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꽤 오래 앉아있었다. 바람 냄새를 맡고, 구름이 빠르고 느리게 흐르는 걸 오래 지켜보면서. 마음이 묘하게 평화로웠다. 머리를 비운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난 오이고추를 정말 좋아한다. 간식으로 먹을 만큼 오이고추를 좋아한다. 엄마와 함께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오이고추가 쌓여있는 매대를 보면서 엄마가 "오이고추 먹을래?" 하고 물었다. 내가 장난스럽게 "엄마는 이제 오이고추만 보면 내 생각나겠다."라고 말하자 엄마는 담백하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가족들은 지나가는 길에 붕어빵이나 딸기, 반짝거리는 장식품, 내 또래 학생들을 보면 내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알고 있고, 나에 관련된 것에는 귀를 기울인다. 내가 항상 가족을 생각하는 것처럼 가족들도 항상 나를 생각하고 있다.
늦은 시간, 조용한 공간에서 둘러앉아 툭 던진 가벼운 질문이 깊고 긴 대화로 이어진다. 난 이 시간을 좋아한다. 내 이야기를 말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솔직함이 우습게 여겨지지 않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다. 그런 시간을 가질 때마다 내가 이 사람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이따금 살면서 내가 기억날 수 있도록 나중에 그들이 살게 될 행복한 삶의 일부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화를 한다.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나열해 보니까 문득 행복이라는 건 찰나의 순간이라기보다는 그것들이 종합적으로 합쳐진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순간들이 내 삶에 군데군데 숨어서 나중에 내 삶을 돌이켜봤을 때 꽤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게 만드는 것. 그게 행복한 삶이라면 미친 듯이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열심히 살다 못해 힘들어 주저앉을 정도로 살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참 걷다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 당연히 쉬었다가는 것처럼 간간이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서 살다 보면 언젠가 진정으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하루하루를 그런 기대를 하면서 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