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9월의 오프라인 모임은 회사 입사 동기의 첫 만남 같았어요. 따지고보면 맞는 말이죠. 둘다 에디터 32기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상대 에디터 분을 이번 글에서는 '파트너'로 칭해 볼게요!
이번 해는 마음의 여유가 많이 없었던 것 같아요. 오늘 일이 끝나면 내일 일이 다시 오늘 일이 되었어요. 파트너에게도 저도 순탄치 않았던 해였을 거에요. 그럼에도 앞으로 제가 헤쳐나가야 할 산들을 떠올리면 가끔은 진절머리가 나요. 이리저리 갈대처럼 휘둘리는 마음이지만 꺾이지 않으려고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있는 느낌이에요.
이런 저에게 4개월 간의 오프라인 모임은 오븐 앞에서 구워지는 빵을 기다리는 시간 같았어요. 오븐에 구워지는 빵을 기다리는 시간만큼 적절한 비유가 떠오르지 않네요. 그러고 보니 파트너는 베이킹이 취미라고 했어요. 그리고 그녀가 선물해준, 백수린 작가님의 <다정한 매일매일>이라는 책도 빵을 만드는 데 필요한 것들을 소제목으로 삼고 있더라고요. 이렇게 딱 떨어지는 선물을 받으니 입가의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어요. 책 표지도 책 내음새도 마음에 쏙 들었거든요.
무엇보다 곱씹을수록 깊어 더 깊이 담아두고 싶은 문장들이 책 속에 넓게 퍼져 있었어요.
그 중에 하나를 공유해볼게요.
소설가로서 나는 언제나 서사의 매끄럽지 않은 부분, 커다란 구멍으로 남아 설명되지 않는 부분에 마음을 주는 사람이다. 소설에서도, 그리고 내 인생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부분은 그런 지점들이 아닐까? 우리는 삶과 세계를 하나의 매끄럽고 완결된 서사로 재구성하려 애써 노력하지만, 사실은 끝끝내 하나가 될 수 없는 단편적인 서사들을 성글게 엮으며 살아갈 뿐이니까. 그리고 바로 거기, 언어로 설명할 수 없고 때로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도 없는, 서사와 서사 사이의 결락 지점. 그런 지점이야말로 문학적인 것의 자리일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 백수린 <다정한 매일매일> 98p
인생은 한 편의 시나 영화로 비유되곤 해요. 연속성 있는 서사. 그런데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맞이하게 되기도 하죠. 혹은 장래에 기억되지 않을, 금세 잊힐 오늘을 살아가기도 하고요. 저 역시 삶은 늘 매끄럽게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자라면서 알게 되는 것 같아요. 단편적인 서사들로 이루어진 것이 인생인데, 어떻게 이 둘이 등호로 성립될 수 있을까요.
수린 작가님은 서사와 서사 사이의 간극, 즉 결락 지점을 소설가가 채워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말해요. 음, 서사에 부여되는 의미와 해석이 다른 서사와의 연결점을 찾아주는 거라고도 해석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베이킹이 취미인 파트너에게 받은 다정한 책이라 삶이 서툴고 외롭게 흘러갈 때마다 펼쳐서 읽고 싶어져요. 언젠가 그런 상황을 마주하게 될 거라는 사실이 좀 더 두렵지만요.
가뭄에 단비
네 번의 만남을 '가뭄에 단비(꼭 필요한 때에 이루어지는 기회나 일)'로 말하고 싶어요. 한 해를 시작하는 동시에 개인 상담도 받아봤어요. 상담은 열두 번 정도 이루어졌을 거에요. 처음 상담 신청서를 작성하면서 이런 말을 적었었어요.
상담을 받을 때만큼은 불안해하지 않고 마음이 편안했으면 좋겠다.
상담 선생님과 여러 가지 심리 검사도 하고 제 감정과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어요. 선생님이 꼬리 질문을 이어나가실 때마다 그 답을 머릿속에서 굴려 꺼낼 때 너무 힘들더라고요. 다른 질문으로 넘기고 싶을 때가 사실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기다려주셨고 제 이야기를 어렵게 하다보니 평소 들여다보지 않았던 제 감정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리고 서로 독립된 감정인 줄만 알았는데 사실은 이어져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메말라있던 가슴에도 작은 새싹이 피어나요. 저는 네 차례에 걸친 파트너와의 만남들을 통해 알게 된 것 같아요. 서로 바쁜 일상 속 틈의 교집합을 찾아 애를 써서 만남을 성사시켰음에도 그 시간 속 우리는 전혀 분주하거나 정신 없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뭐랄까, 마치 소개팅하듯 여유로운 사람으로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파트너의 차분하고 섬세한 분위기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해요.
<오프라인 모임 장소>
9월 - 순분정(카페)
10월 - 연스시 (일식당), 은구비로커피로스터즈(카페)
11월 - 머물다가게(독립서점), 노말보이즈클럽(중식당)
12월 - 오소리파이클럽(카페), 에드가(양식당)
9월, 10월, 11월은 대전에서, 12월은 세종에서 모임을 했어요. 사실 세종에 비해 대전이 더 볼거리, 먹거리가 발달해 있었지만 그래도 한번은 세종으로 초대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어쩌다보니 12월 연말에 세종에서 모임을 하게 되었네요.
공식 모임 일정은 끝이 났지만 우린 약속했어요. 내년 봄에 다시 만나기로. 그때가 되면 더 다채로운 이야기가 오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유난히도 추웠던 12월 어느 끝자락에 했던 약속을 세상이 만개하는 봄에 꼭 이룰 거에요. 그 날이 찾아올 때까지 더 열심히 절 가꿔나가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