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에 앞서
얼굴을 맞대고 글에 대한 이야기를 깊이 있게 나눌 수 있는 시간은 전공 혹은 직업적으로 맞닿아 있지 않는 이상 그리 간단하게 찾아오지 않는다. 글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것은 진지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글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무엇보다 탁월한 수면제가 될 수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고민되고 꺼려지는 이유는 글이 사적인 소유물이라는 것에 있다. 어떤 문장을 의미 있게 읽었고, 어떤 책을 좋아하며, 어떤 글에 이끌리는지와 관련된 모든 정보는 그 사람을 대변한다. 오르골에 불규칙적으로 솟아있는 금속 돌기들이 결국은 하나의 음악을 형성하는 것처럼 일생에서 벌어지는 한 장면 한 장면은 글에 대한 입맛을 형성하고 특별한 개개인을 구성한다. 같은 책에서도 느낀 점과 인상 깊었던 구문이 모두 다르듯이 말이다.
취향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은 자연스럽게 사적인 영역으로 침범하게 된다. 왜 좋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방법 중 가장 간단하고도 명료한 방법은 인생에서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때때론 삶에서 특이적으로 영향을 끼쳤던 사건에 대해 털어놓을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렇기에 점점 더 좁아지고 깊어져 가는 인간관계 속에서 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사라져 가고 있었다. 요즘은 무슨 책 읽고 있어? 아~ 그렇구나. 두 문장 만으로도 끝날 수 있는 단발적인 대화 주제로 남겨진 지 오래였다. 가장 여력을 쏟고 싶은 말들이 입 밖으로 내뱉어지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까웠다. 그렇게 말을 묵혀두고 있을 때 피드백 모임을 접하게 되었고, 상대방과의 사전 정보 없이 우리는 1:1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9월
2명으로 시작된 이 사소하고 긴밀한 모임은 한 카페에서 시작되었다. 명색이 피드백 모임인데 2명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한정적이진 않을까? 하는 시작에 앞선 걱정이 먼저 들기도 했다. 그러나 어색함도 잠시, 우리는 지금까지 아트인사이트에 써온 서로의 글을 읽으며 이 분위기에 점차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각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글과 상대방이 느끼기에 인상 깊은 글을 비교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가 공을 들였다고 생각하는, 일명 애정 가는 글과 달리 제 3자에게는 다르게 비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스쳐 지나가는 글이라고 멋대로 넘겨버린 활자의 틈새에서 읽어주는 독자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저절로 내 글쓰기의 강점을 알게 된다. 어렴풋이 짐작은 해왔지만 명료하게 알진 못했던 글의 생김새를 마주하게 된다. ‘나’라는 필터링 없이 순수하게 바라보게 되는 글의 표면을 생경한 눈으로 다시금 바라본다.
10월
1:1로 존재하는 피드백 모임은 사적인 대화와 피드백 모임이라는 공적인 질의응답 사이에 존재했다. 그 경계에서 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무척이나 특별하게 느껴졌다.
같이 밥을 먹고 난 후 카페에서 대화를 주고받다 알게 된 사실은 둘 다 공통적으로 책을 들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별것 아닌 사소한 행동에도 글에 대한 애정이 깊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했듯이 가방에서 자연스럽게 책을 꺼내두고 소개하게 되었다. 드넓은 글의 세계에서 독자가 읽을거리를 고르는 몇 가지 기준은 천차만별이다. 책의 표지나 작가의 이름을 보고 고르기도 하고, 누군가의 추천을 받기도 하고, 아니면 끌리는 책의 아무 페이지나 넘겨 읽고는 술술 읽히는 책만을 품 안에 넣기도 한다. 책을 좋아한다고 해서 모두 같은 책을 선호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책에 관한 이야기는 가지를 넓히기 쉽다. 지금은 이만큼까지 읽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 같아요. 라던가, 평상시 이 작가의 책을 많이 읽어왔는데 저 책도 읽어보세요, 라던가. 무궁무진하게 펼쳐지는 이야기로 대화의 폭을 넓히다 보니 같이 서점에 가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읽기라는 공통 분모는 독립 서점이라는 목적지로 향했다. 1:1 모임의 장점 중 하나는 제약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나도 좋고, 너도 좋으면 OK. 이 일념 하나로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듯이 정해버리면 그만이다.
11월
우리는 10월에 약속한 대로 대전의 한 독립 서점에서 다시 만났다. 북카페와 독립 서점을 겸업하고 있는 곳에서 책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서로에게 어울리는 책을 선물해 주기로 했다. 각자의 이미지와 자신의 취향을 버무린 책 한 권을 골라 주었다.
나는 평상시 베이킹을 좋아한다. 사실 홈베이킹은 가성비나 효율성으로 따지자면 최악이지만, 아무렴 어떤가. 가루와 액체로만 존재하던 1차원적인 존재가 달달하고 폭신한 빵으로 변신하는 순간을 함께하다 보면 잡념이 사라지곤 했다. 받는 사람을 생각하며 만들면 행복감이 두 배가 된다. 그 마음에서 비롯하여, 따끈한 연말 선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백수린 작가의 산문집인 ‘다정한 매일 매일’을 선물했다.
반대로 내가 받은 책은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이라는 소설이었다. 이전에 음악 소설집에서 김애란 작가의 ‘안녕이라 그랬어’를 인상 깊게 읽었던 터라 표지 속의 이름이 반가웠다. 다가오는 겨울을 맞이하며 받은 여름에 관한 책이라니. 꽤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12월
벌써 마지막 피드백 모임이 되었다. 반팔을 입고 만났는데 이젠 바람이 매섭게 불어 목도리를 코까지 꽁꽁 싸매야 얼어붙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쉬움을 무릅쓰고 우리는 2024년 한 해 동안 재미있게 보았던 책, 영화,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종의 연말 결산인 셈이었다. 각자 손에 꼽은 매체들은 극명하게 나뉘었고, 덕분에 평상시라면 알지 못했을 작품들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것과 동시에 피드백 모임을 마무리하며, 어쩐지 이번 해의 마지막을 통쾌하다는 생각을 했다. 비슷한 방향을 바라보는 상대방과 글에 대한 이야기를 더할 나위 없이 나누고 나자 후련하게 2024년을 보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끝맺으며
4개월 간의 피드백을 진행하면서 글에 대한 피드백 중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한 줄이라도 고민을 많이 하고 꾹꾹 눌러 담아 쓴 것이 보인다는 문장이었다. 이건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여태껏 고민하던 것이기도 했다. 매번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굳어진 자세는 글로 이어졌고, 의도치 않게 무거운 결말만을 향해가는 것만 같아 의식적으로 고쳐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글에 투영된 그 마음에 대해 ‘정성을 기울인다’라는 언어로 듣기 좋게 바꿔 말해준 그 문장이 마음에 오래도록 자리했다. 둥글고 가벼운 글과 진중하고 무거운 글 중 어느 것이 옳다고 할 수 없듯이 내 글에 생긴 특징을 잘 보살펴 나가야지, 하는 어딘가 들썩이는 감정 같은 것도 들기 시작했다.
이번 피드백 모임을 통해 대화를 나누며 깨닫게 된 것은 공통적인 관심사 안에서도 취향은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세부적인 갈래들이 합쳐서 개울을 이루고 강을 이루며 마침내 글의 바다로 향해 간다. 마음을 터놓고 글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진귀한 경험이 된다. 글자로 담아낸 진심을 타인이 알아줄 때 다가오는 성취감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하리만치 쏟아진다. 피드백 모임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이 마음이 드리워지길 바라며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