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을 사랑하고, 이를 글로 남기는 사람에게 기록에 준할 만큼 든든한 자산을 물으면 선뜻 대답을 듣기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기록에 남은 순간의 기억들이 강한 힘을 갖는 탓이다.
필자가 아트인사이트에서 몰래몰래 훔쳐보았던 콘텐츠 중 유독 온기가 생생히 남아있던 글이 있었다. 글을 작성한 차승환 컬처리스트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였고, 흔쾌히 응해주신 덕분에 아래와 같이 그만의 기록법을 들어볼 수 있었다.
생각의 휘발을 막을 때
차 컬처리스트는 꾸준한 기록가다.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가도 휘발되기 일쑤인 순간의 감정과 생각들을 저장하고 기록하여 글에 싣는다.
"당시에 느낀 생각들이 없어져버리면 아깝다는 생각을 했어요. 적어놓거나 정리해놓지 않으면 어느 순간 날아가더라고요. 어떤 대단한 계기보다는 그런 사소한 순간들에 내가 어떤 마음으로 임했는지 기억하면 좋겠다, 싶었죠."
필자가 차 컬처리스트와의 인터뷰를 마음 먹게 만든 글 역시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려졌다. 충실히 애도하고, 슬퍼하면서 보내도 충분한 기간이었지만 차 컬처리스트는 그 순간의 기록을 택했다.
"지금 돌이켜봐도 마음이 혼란스러운 일이었어요. 고모가 돌아가시는 시기와 저희 아버지 생일이 다가오는 시기가 겹쳐서, 뭔지 모를 굉장히 오묘한 감정이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느낌이 들었죠. 그때 저희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많이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 왠지 모르게 단단해야만 하는 삶의 모습들을 조금 발견했던 것 같아요. 울음을 항상 참으셨던 그 순간들이 특히 인상 깊게 다가왔죠."
순간의 감정을 기록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감정에 치우쳐 모든 사고의 흐름이 쏠릴 수도 있고, 그 감정이 시시각각 바뀌어 놓쳐버릴 수도 있다. 차 컬처리스트는 기록을 혼란한 감정을 정리하고, 이를 저장하는 두 가지 과정에 모두 활용했다.
"일순간에 내가 했던 모든 이성적 사고나 감정적인 충동들이 다 뒤섞여 있던 상황이었어요. 이 순간은 이제 되돌아오지 않고, 또 되돌아오지 않으면 좋겠는 순간이어서 저장을 하고 싶단 욕심이 일었죠. '정신 차리고 기록해야 돼, 써야 돼' 되뇌이면서 조금은 강박적으로 글을 썼던 것 같습니다."
다르게 보는 연습
읽고 쓰는 행위를 사랑하지만, 그게 일상 그 자체는 아니다. 꾸준히 기록하는 그에게도 글쓰기는 공을 들여 임하는 창작 행위다.
"쓰는 순간에는 좀 뭔가 시선이 달라진다고 해야 할까요? 평상시에 생각을 안 했던 것도 쓰다 보면 퍼뜩 떠오르곤 하잖아요. 단어가 떠오르면 그 단어에 대해서 조금 더 발전적인 생각들을 하고, 이를 계속 모으다 보면 문장이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그러면 이제 그 문장들에 힘을 보태기 위해 단락을 또 만들어 가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글을 쓰는 과정에는 평소보다 더 진한 사유를 녹이고자 노력한다. 같은 경험을 쓰더라도 한번 더 생각해보고, 더 잘 나타낼 수 있는 표현들을 곱씹는다.
"그냥 단순히 눈에 보였던 어떤 장면들에 대한 단순한 묘사보다는 그 이면에 뭔가 있을 것 있음직한 것들을 계속 한 번 더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예시는 프랑스 작가 까뮈의 소설 '이방인'을 원작으로 둔 연극 이방인의 리뷰 글이다. 해당 글에서 차 컬처리스트는 이방인에서 얻은 인상을 구현하기 위해 구멍과 쉼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아래 링크를 통해 표현을 직접 읽어보시길 추천드린다.
"20대 초반에 이방인 소설이 그렇게 유명하다 해서 괜히 한번 읽어봤어요. 그땐 표면적으로 책을 접해서 뫼르소가 우리가 말하는 사이코 소시오패스의 원조 아닌가 생각했죠. 그후 세네번 책을 더 읽은 후에는 실존의 의미에서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게 됐어요. 왜 그런 행동을 했는가에 대해서 파고 들어보고, 그 방향성을 고민한 거죠."
경험의 조각 쌓기
다르게 사고하는 연습에는 그가 평소에 접했던 글이 톡톡한 역할을 했다. 글을 의무적으로 읽기보다 글을 쓴 사람의 경험을 생각해보고, 이를 그려가는 방식을 보고 감탄하면서 표현을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예전에 언론고시를 준비한 적이 있었어요. 당시 준비반 내부에 책들이 여럿 꽂혀있었는데, '머리 복잡하니까 다른 재미있는 글 한번 읽어보자'하는 마음으로 젊은 작가상 수상작 같은 책을 꺼내 읽어봤어요. 굉장히 파격적이고, 굉장히 솔직하면서 노골적인 작품들이 많잖아요. 소설이 픽션이긴 하지만 사실 본인이 구현돼 있을 텐데 진짜 표현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눈이 번쩍 뜨렀던 것 같아요.
그중에서도 차 컬처리스트가 크게 영감을 받았던 건 바로 평론이다. 지금도 꾸준히 평론가의 글을 접하면서 글을 풍부하게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을 보면 적재적소에 글을 차용해온 형태를 자주 접할 수 있는데, 글을 보고 느낀 생각과 원본을 적절히 연결해 읽을 수 있어 무척 재미있다.
"보통 작품마다 평론가의 해석이 같이 따라가는데, 두 개를 보고 다 충격을 받아서 평론이라는 분야가 무척 매력적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는 오히려 그쪽을 더 좋아하게 됐죠."
차 컬처리스트는 이렇게 모아둔 일상 속 경험의 조각들을 풀어가는 데 관심이 많다. 과거 출판사 마케터로 일했고, 지금은 공방에서 사업을 맡고 있는 차 컬처리스트는 그간 다양하게 접하고 쌓아온 경험들을 토대로 새로운 꿈을 구상하고 있다.
자신의 평소 일상과 일에 충실하면서도 추후 누군가 자신의 경험을 모아 콘텐츠로 만들고, 더 많은 이들과 그 작업을 확장시켜나갈 수 있도록 플랫폼을 가꾸는 것이 그의 목표다.
"개인의 작업 콘텐츠를 가지고 2차-3차로 계속 가공해 나갈 수 있는, 예를 들면 누가 소설을 썼다고 가정하면 그 소설을 이용해서 연극도 만들어보고 할 수 있는 그런 하나의 그룹 문화를 만들고 싶단 생각을 갖고 있어요."
이제껏 풍부하게 쌓아온 마음의 양식과 경험이 오롯이 이어질 수 있는 도전이 되길 바라며,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주신 차승환 컬처리스트께 감사의 말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