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사람한테 끌려서 내가 온 세상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날. 성탄절, 카페에서 파트타이머로 근무 중이었던 나는 퇴사를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에 있었어. 분명했던 건 다른 날처럼 왠지 모르게 그날은 유독 피곤했다는 거야. 얼른 퇴근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비몽사몽인 채로 일을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인기척이 보였어. 할아버지 두 분께서 매장으로 들어오시는 걸 봤지.
두 분은 등산복 차림이었어. 한 분은 모자를 쓰고 계셨고, 다른 한 분은 하얀색 콧수염이 유독 눈에 띄던 분이셨지. 에스프레소 2잔을 주문하시고선, 콧수염 할아버지는 바로 옆에 있는 젤라또에 관심을 보이셨어. 그러자 모자 할아버지께서는 침착하고 나그러운 목소리로 젤라또도 같이 주문하지 않겠냐고 말씀하셨어. 하지만 콧수염 할아버지는 이내 뱃살이 나온다는 유쾌하고도 아쉬운 말씀을 남기셨지. "결제 완료 되셨구요, 준비되면 자리로 가져다드릴게요." "정말요?! 오.. 정말 감사합니다!" 두 분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정말 좋아하셨어. 콧수염 할아버지께선 호탕한 웃음도 보여주셨지. 그렇게 모자 할아버지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가시자 내가 있는 1층에는 정적이 흘렀어. 나는 그 고요를 잠시 생각했어.
참 신기해. 잠깐이었는데 나는 잠시 과거를 보고 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들더라. 두 분의 사이를 내가 알 턱이 없지만 뭐랄까, 두 사람의 에너지와 합이 참 조화로웠다고 해야할까.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지. 모자 할아버지는 대개 침착하셨고 콧수염 할아버지는 호탕하고 유쾌하셨어. 에스프레소 2잔을 가져다드릴 때도 느껴졌어. 모자 할아버지는 여유로운 속도로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치시곤 활짝 웃어주셨어. 시간이 흐른 후, 빈 잔을 가져다주실 때도 나와 눈을 지긋이 마주쳐주시곤 감사하다는 말씀을 건네주시더라. 콧수염 할아버지는 모자 할아버지와 조금 상반된 모습이셨지. 고맙다고 말씀하실 때도, 젤라또를 고민하실 때에도, 차분하고 온화하진 않았지만 되려 친근했어. 나가실 때 흔들어주신 손이 모든 말을 대신하는 듯 말이야. 무심한 듯 느껴지지만 결코 무례하진 않았어. 대신, 그저 짧은 순간에 콧수염 할아버지의 친근함으로 이끌리는 기분이었어.
참 이상해. 찰나였지만 자꾸 할아버지들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거 있지. 알 수 없는 사물과 사랑에 빠져버린 사람처럼 뒷정리를 하며 자꾸 터져 나오는 미소를 감추려 애썼어. 그때 설거지를 앞두고 빈 잔에 진하게 묻은 에스프레소 크레마에서 불과 몇 분 전의 내가 보였어. 어느 때보다 샷을 정말 정성스럽게 추출해 내려드리던, 아무도 모르고 나만 속으로 알고 있는 그런 내 모습 말이야. 가끔 손님에게 이렇게 순식간에 이끌리는 때가 종종 있어. 할아버지들처럼 어딘가 뭉툭하면서도 친근한 사람들. 그런 분위기가 손님 주위로 풍길 때면, 나는 더 진심을 담아서 음료를 만들게 되는 습관이 있나 봐. 그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어. 의도하지 않은 사람의 에너지가 날 끌어당겨서 나도 모르게 마음으로 보답하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사회 어딘가에서 만날 생각을 하면 가슴이 벅차올라. 도무지 아무것도 모르겠는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 중에서 두 할아버지같은 분들만 마주친다고 해도 그 순간만은 내가 세상을 가진 것만 같을 거야. 사람한테 끌려서 내가 온 세상으로 물드는 순간이지.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을까? 어느 쪽 모서리를 갖다 대도 안 맞던 그림의 공간에 시계방향으로 이리저리 돌려보니 퍼즐이 꼭 맞춰지는 경우를 떠올려봐. 내가 어느 한때는 모자를 쓰고 있을 수도, 콧수염을 달고 있을 수도 있겠지. 그때마다 내 옆에서 콧수염과 모자를 번갈아 달고, 또 써줄 사람 말이야. 함께 있을 때 각자가 더 빛나서 그 빛이 다른 사람의 눈을 찡그리게 하는 대신, 또 다른 형태로 스며들게 만들어주는 조화. 내게 터져 오르던 웃음 같은 것!
그러다가 네가 보였어. 이 세상 사람들이 무릅쓰고 반대한다고 해도 나는 너로 물들 거야. 내가 콧수염이면 너는 모자고, 내가 모자면 너는 콧수염이고. 내가 모자면 너도 모자고, 내가 콧수염이면 너도 콧수염이고. 우린 다르지만 같아. 있는 그대로 끌려서 누군가에게 미소를 내어주는 그런 세상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야.
- 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