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옷깃이 사그락거리며 스치는 계절이 왔다. 가을이다. 점점 겨울로 다가서는 깊어지는 가을밤, 왜 가을이라는 계절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불리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훅 쌀쌀해지는 날씨에 외로운 마음을 부둥켜안고선, 사랑하는 것을 찾으러 나선다. 옷깃이 스치면 그것도 인연이라는 말이 그런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한 다독임이었음을 이제서야 깨닫게 된다.
사람과 만남, 웃음, 이야기, 약간의 음식, 그리고 생각. 지나왔던 모든 스침이 지금, 이 계절에 모여 아름다운 단풍으로 곳곳이 물들기 시작하고 곧 떨어질 준비가 되어있다. 떨어진다는 것은 새로 피우기 위한 단계일 뿐. 주섬주섬 마음에 드는 낙엽들을 골라 다이어리에 붙이고 나면, 평생 잊을 수 없는 그때 그 '가을'이 완성이 된다. 사랑으로 채우는 것들은 전부 그렇다. 한번은 기억해 두었다가 언젠가 다시 꺼내볼 수 있는, 낙엽 같은 문화 초대 3가지. 이 글에서 소개한다.
TOP3. 다른 여름 - 사유의 확장
TOP3를 차지한 문화 초대는 바로 <다른 여름>. 이전 포스팅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다양한 시적 표현들이 연극 군데군데 묻어있다. 한 인물의 내면과 외면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부터, 내용 전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철학적인 울림까지. 각 대사와 상징물을 받아들이며 어떤 의미일지 골똘히 생각해 보는 과정에서 자신도 알 수 없을 만큼 사유가 확장된다.
또한 핸드볼 경기장이 극의 배경인 만큼, 무대를 경기장처럼 꾸린 것도 인상 깊다. 이런 요소들은 기존의 '연극'의 패러다임을 확실히 깼다. 특히 '연극'이라고 하면 대중성을 잡기 위해 단순한 플롯과 재미만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은데, <다른 여름>은 그렇지 않다. 연극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다른 여름>을 소장해 보길. 아름다운 단풍나무처럼 형형색색으로 물들어있는 사유를 오롯이 느껴볼 수 있다.
TOP2. 세르게이 말로프 내한공연 - 새로운 것의 반짝임
TOP2를 차지한 문화초대는 바로 <세르게이 말로프 내한공연>. 클래식을 문화 초대로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은 단연코 처음이다. 이 문화초대를 향유하기 전, <아무튼, 클래식>이라는 책을 읽었다. 마냥 어렵게만 느껴졌던 클래식이 작가의 경험과 다채로운 안목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났다. 어쩌면 그 부담스러웠던 생각이 나만의 고정관념일 수도 있겠구나, 그 길로 바로 클래식을 접해보기로 했던 기억이 있다.
무대 위 조명을 받으며 세르게이 말로프가 홀로 연주를 시작한다. 바흐의 곡들을 규칙적이지만 자유로운 방식으로 연주하며 선율 위에서 아름다운 춤을 춘다. 또 '클래식'이라는 장르를 '모던화'하여 루프 스테이션 장치와 함께 전자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국경을 넘나들고 시공간을 넘나들며 앉아 있지만 귀로 세계를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여행을 떠나 다양한 식문화를 체험하며 눈이 반짝였던 그 순간처럼, 클래식은 가장 새롭고 또 클래식한 모습으로 내 안의 가장 반짝이는 모습이 되었다. 신선한 자극이 현재까지도 선명해, 다른 공연들을 궁금해하게 된다. 흔히 좋아하는 것에 깊어지는 일과 같다.
TOP1. 타조소년들 - 그리워하는 성숙한 방법
마지막 TOP1을 차지한 문화 초대는 <타조소년들>. 이 연극을 보러 간 날은 유독 찬 바람이 많이 불던 겨울이었다. 로스, 블레이크, 씸, 케니 4명의 친구들의 모험 이야기를 담아낸 이 공연의 키워드는 다름 아닌 '상실', 그리고 '애도'였다. 마냥 겨울날의 한기처럼 느껴지는 이 단어들이 훈훈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고민해 본 끝에 답을 알 수 있었다.
바로 '기억하는 것'. 로스의 억울한 죽음을 알기까지, 다른 친구들은 여정을 떠나며 로스의 죽음 이면의 일들을 이해하게 된다. 그로부터 진정한 작별 인사를 배우고, 진심으로 성숙한 애도를 표하게 된 것이다. 이후에도 죽은 로스가 '생전 로스'의 모습으로 무대 곳곳에서 배우들과 함께 무대를 꾸렸다는 점. 또 로스를 떠올리며 용기를 냈던 블레이크의 모습은 '기억'하는 것에 대한 참된 의미를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준다.
그렇게 공연이 끝나 문을 열고 나오던 계절은 겨울이 아니라 새로운 봄이었다. 반드시 찾아올 봄처럼, 따듯하게 흩날리는 친구들의 이야기가 관객들 안에서도 따듯하게 흩날려 언젠가 다시 보고 싶은 공연이 될 것이다. 그런 마음을 마침 눈앞으로 지나가는 가을의 낙엽에 고스란히 실어 보내보자. 내후년 봄이 찾아올 때 우리가 간직한 낙엽들이 푸릇한 새순으로 다시 피어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