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교육을 받으러 이동하던 도중 버스에서 잠시 내려 몸을 풀던 찰나, 살살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이 좋아 고개를 들었더니 흩날리는 매화잎이 보였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아. 이거 봄바람이구나. 겨울이 끝났구나.
조마조마한 겨울이었다. 귀가 얼 것만 같은 칼바람이 자꾸만 불었고, 살인적인 추위에 난방도 잘되지 않았다. 불안정한 정세와 팬데믹은 말없이 소란스러웠다.
햇빛마저 찬 바람에 힘을 쓰지 못하던 어느 날 어디론가 향하던 길에, 문득 듣고 있던 멜로디가 지겨워 노래를 멈추었다. 그 김에 노이즈 캔슬링도 꺼버렸다. 지하철 소리는 정말 컸지만 사람들은 조용했다. 눈과 엄지손가락만 움직이며 각자의 세계에서 바삐 떠들고 있는 사람들을 보자니 덜컥 외로운 느낌까지 들었다.
지하철은 자꾸만 흔들렸다. 내가 딛고 있는 발아래가 흔들렸다는 말이다.
그런 겨울이 차차 녹아 땅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실감하니 순간 어지러웠다. 매화라니. 둔한 천성이래도 날이 풀리는 데에는 민감한 편인 나였다. 어떻게 봄이 오는 걸 몰랐을까.
패딩을 입는 날이 삽시간 줄어들었음에도 왜 봄이 온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을까. 내가 요즘 이렇게나 주변에 관심을 못 가졌나. 생각해보니 내 사람들에게조차 연초 인사 하나 건네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나 참 이기적이네.
부쩍 평소보다 더 경계하는 것들이 늘고 있다. 매사에 내가 맞거나 옳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 내 사람들은 결코 쉽게 얻은 사람들이 아니니 항상 다정할 것, 자만에 빠지지 않을 것, 내 삶은 내가 만드는 것이니 많이 생각할 것.
삶의 조각들은 내가 긁어모아 만드는 것임을 잘 알면서도, 갤러리의 사진 수는 늘지 않고 수집하는 문장도 확연히 줄었음을 깨달았던 날 속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 수많은 파편을 버린 셈이었다. 놓친 순간이 많겠구나, 싶은 아찔함.
연초 인사에 답장도 제대로 하지 못했음을 인지한 순간도 크게 다르지 않은 심정이었다. 곧 면접이니까, 내일 서류 마감이니까, 다음 주에 최종이니까, 등등 개인적인 불안함을 핑계로 타인에게 이해를 바랐다. 지금 당장은 주변을 둘러볼 여력이 없음을 설명하지도 않은 채, 그냥 소홀해 보일 뿐임을 다 알고 있으면서. 어떠한 연유도 결국엔 내 하기 나름임을 그렇게 잘 알면서도.
확실히 들뜬 요즘이라, 중심을 잃고 마냥 웃으며 휘청일 때가 많다. 주로 짧은 시간 안에 답을 뱉어야 하고 길게 생각할 겨를이 없는 낮에 조심성 없이 굴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자기 전 홀로 하루를 톺아보다가 그날 보낸 낮을 후회하곤 한다. 내일은 조금 더 진중해져야지, 길게 생각해야지. 과묵함을 잃는 것은 곧 곤경에 빠질 일이 많아진다는 징조임을 잘 아는 탓이다.
M이 보내온 연말 겸 연초 인사를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전과 변한 것 하나 없이 다정함이 가득 담긴 메시지였다. 매일 모든 순간이 행복할 수는 없겠지만, 지나면 잊힐 정도로만 힘들었으면 좋겠다는 말에 대체 내가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따듯하게 입고, 먹고, 자라는 말에 도대체 얼마만큼의 애정을 더 담을 수가 있을까.
내가 할 수 없는 일 같기만 했다. 나는 여태 어떻게 이런 따뜻함을 곁에 두고 있었을까. 나는 이만치 곰살궂진 못한데. 늦은 답장이라며 운을 떼려다 채팅창을 빠져나왔다. 가벼워진 시절엔 아무 문장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경각심 가득했던 예의 습관을 되찾기 위해선 홀로 보내는 시간이 조금 늘어야 할 것 같은데, 매일의 일정이 고정되어버리니 이마저도 쉽지 않다.(시간을 관리하는 능력은 아무래도 숙련이 조금 필요한 것 같다.) 혼자만의 시간을 능숙하게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나는 자꾸만 중심을 잃고 발을 헛디디며 나아가고 있다. 내 사람들을 잡은 손아귀에는 힘을 빼지 않으려 들면서.
시간은 흐르고 변치 않는 것은 없다지만 한번 쥔 것은 오래 끌고 가는 데에 나름 능력이 있는 나는 다시 또 애를 써보려 한다. 오랜만에 내 문장을 읽은 K는 그새 많이 컸다고 했다. 그의 극성팬이었던 나는 그 짧은 한마디에 배시시 웃고 말았는데, 여러모로 커버렸다는 말이 적잖이 기분 좋으면서도 간극이 느껴져서, 각자가 살아온 지난 수개월이 순식간에 아쉬워졌다. 흐르는 시간과 넓어지기 쉬운 간격. 그래도 상실감은 느껴지지 않아 실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벌써 올해의 1/4이 등 뒤로 지나간다. 분기점을 지나며 고른 숨으로 곧 후더워질 한 철을 보내고자 한다. 다음 환절기에는 지난 계절에 아쉬움이 없도록. 매화는 놓쳤지만 라일락은 놓치지 않는 성정으로, 오늘은 날이 더우니 가볍게 입으라는 인사 정도는 먼저 건넬 수 있게 내 곁을 품고 가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