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 알앤비, 일렉트로닉, 록처럼 장르별로 분류된 플레이리스트부터 여름밤 드라이브할 때 어울리는 곡, 갓생 살 때 듣는 곡 등 상황별 플레이리스트까지 우리는 수많은 플레이리스트 사이에 살고 있다.
꼭 음악이 아니더라도 인스타그램에서 시작해 이제는 쇼핑몰, OTT 플랫폼 등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이 중에 네 취향 하나쯤은 있겠지!’ 식의 해시태그들만 보아도 알 수 있듯 현재는 취향의 시대라고 할 수 있겠다.
(…) 플레이리스트 감상 세계에서는 ‘불안감을 떨쳐 주는 신나는 노래’를 재생하는 게 가능하다. 그 재생 목록이 어떤 개별 곡들로 채워져 있는지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도 불안감을 떨치며 신나게 들을 수 있다. 오늘날의 감상자는 음악 작품을 고르고 느끼고 취향으로 삼는 적극성을 잃어버린 채 점점 더 수동적인 소비자가 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플레이리스트: 음악 듣는 몸>, 15p.
그러나 이러한 맞춤형 추천이 오히려 사람들을 획일화하고 있다면 어떨까? 지금처럼 플레이리스트 문화가 퍼져있지 않았을 때를 생각해보자. 아마 그때에는 제각각 자신만의 취향과 감각을 듬뿍 담은 플레이리스트를 품에 지니고 있었을지 모른다.
예를 들어 우리 모두에게 가을이라는 계절은 다른 의미일 테니, ‘가을 플레이리스트’를 만든다면 그곳에는 각자가 생각하는 가을이 담길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왠지 가을 느낌이 나는 곡이 듣고 싶다고 하면 음원 사이트나 유튜브에 ‘가을 플레이리스트’를 검색하곤 한다.
물론 그 수많은 가을 플레이리스트를 고르는 과정에서도 내 취향이 반영되기는 하겠지만, 이미 1차적으로 누군가의 취향이 모인 목록을 내가 다시 골라 듣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나만 해도 그렇다.
내 취향을 듬뿍 담아 직접 만들어낸 보석 같은 플레이리스트가 여럿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다른 목록들에 내 귀를 고스란히 맡기고는 한다. 그게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든 내 취향을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든, 혹은 음원 사이트 자체 플레이리스트든 말이다.
잘 생각해보면 이 경우는 보통 음악에 크게 집중하지 않아도 될 상황일 때가 많다. <플레이리스트: 음악 듣는 몸>의 저자인 김호경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즘은 음악 듣는 게 너무 쉬워졌으니까, 내 취향에 맞아서 꼭 알아야 하는, 알고 싶은 욕구가 드는 음악이 있고 그냥 스치듯 흘려보내도 되는 음악이 있고 그런 것 같다. 그런 음악들은 현재 내가 원하는 어떤 감각 상태를 만족시키는 것까지만 하면 되는 거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 목적이 각기 다른 음악들이 존재하게 된 것 같다.
<플레이리스트: 음악 듣는 몸>, 63p.
그의 말대로 굳이 이 곡을 만든 사람이, 부른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또 가사가 무엇인지, 멜로디가 어떤지 등 깊이 들어갈 필요 없이 귀에 무언가가 흘러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상태일 때도 있다.
이러한 경우라면 시간과 정성을 쏟아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 이유가 흐릿해진다. 그저 이 순간 내 귀를 채워줄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심지어 요즘은 ‘수학 문제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 같을 때 ➕➖✖️➗’, ‘보랏빛 조명 아래’, ‘수트 셋업 입고 출근하는 멋진 어른이 된 기분’ 등 구체적이고 문학적이기까지 한 플레이리스트가 넘치니 더더욱 직접 한 곡 한 곡 정성스레 모을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감상 행위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다음 글에서는 플레이리스트를 둘러싼 음악 감상 행위의 긍정적인 면을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