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예술로 산책》은 매달 격주로 기고되는 예술 에세이입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쳐서 좋았던 일상 속 예술 조각 또는 흔적을 보고 느끼며 열렬히 사유한 것들을 지극히 사적인 시선으로 이야기합니다.*감상 포인트: 계획된 산책로는 없습니다. 정해진 목적지도 없습니다. 뜬금없이 걷기 시작할 수도,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잠시 발걸음을 멈추기도, 도중에 지쳐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p.s.비록 이번 '2021 미술주간 미술여행'은 도슨트와 함께하며 정해진 루트를 따라 걷는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길을 걷다 우연히 발견한 예술 조각'을 풀어내는 <어쩌다, 예술로 산책>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질 수 있다.그럼에도 해당 미술 기행에 대한 이야기를 이곳에 풀어내는 이유는, 정해진 루트대로 따라가도 그곳에서 발견한 우연한 예술 조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 무엇보다 정해진 미술여행을 끝내고 개인적으로 발견한 비밀스러운 장소와 예술 조각을 덧붙였으니, 끝까지 읽어보길 바란다.덧붙여, 이번 2021 미술주간 미술여행을 추천해 준 박세나 에디터님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한양의 북쪽에 위치해 있어 붙여진 이름, 성북동. 예로부터 이곳을 둘러싼 수려한 자연환경으로 인해 선비들의 풍류와 문인들의 문예활동이 활발한 곳이었으며 화랑 청년들이 모이는 곳이었다고 한다.그러나 나에게 '성북동'은 '그저 먼 곳',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오히려 성북동 바로 아래에 위치한 혜화동은 익숙했다. 어쩌다 한 번씩 연극을 보러 갔던 곳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성북동은 생소했다. 워낙 집에서 먼 곳이었기 때문에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이었고 특별히 갈 일도 없었다. 그러니 애초에 어떤 이미지도 그려지지 않았다. 마침, 성북동으로 미술 기행이라니 이참에 서울의 새로운 동네를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싶었다.- 산책 전 주절주절_2021.10.08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잔디 마당에 신경질적으로 나있는 잡초들을 제초기로 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날이 떠올랐다. 이름 없는 산이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져버린 그날,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자비한 폭력성에 충격받았던 그날. 도대체 지금이 그날과 무엇이 다른가? 이제껏 제초기를 밀며 정갈한 잔디의 모습에 마음의 안정을 취했던 지난날들, 그리고 별반 다를 바 없는 폭력적인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그러자 떠오른 생각 하나.불청객은 잡초가 아닌 내가 아니었을까?그날 이후로 제초기로 잡초 밀기를 그만두었다.그저 가만히 잔디 옆에서 여러 잡초들이 무성히 자라는 과정을 관찰하기 시작했다.그렇게 탄생한 작품, <유예>시리즈이다.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데스쿨 De School은 경계 없는 어른들의 놀이터다. 데스쿨에서 아티스트 레지던시 공지가 떠 지원을 했고, 초대를 받았다. 데스쿨의 자유로운 정신에서 영감을 받아 ‘경계’를 주제로 작업했다. (코로나19로 무산된 전시)우측 하단은 장벽의 생성을, 좌측 상단은 장벽의 붕괴를 보여준다.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에 그려진 천상과 지옥 등장인물들을 통해 경계로 인해 우리가 잃는 것과 우리가 얻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경계는 곳곳에 존재한다. 무너져 온, 무너져야 할 경계를 보여주고 싶었다. 기술과 문명의 발달로 이미 무너졌고 무너져가는 지리적 경계. 사회적 계급, 인종, 성 정체성 같은, 막 무너지기 시작한 경계. 국가라는 이름으로, 종교라는 이름으로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경계.역사는 말하고 있다. 어떤 경계로든 우리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음을.- ≪준비전≫전시 도록 中
서울에서 직장 생활과 프리랜서 생활을 병행하던 중에 새로운 화두가 떠올랐다. 구속과 해방의 반복. 서울 성수동에 위치한 뿐또블루 PuntoBlu에서 전시 기회가 생겼을 때 그 화두를 잡고 싶었다. (살인적인 스케줄로 인해 무산)기대, 구속, 해방, 그리고 또 다른 구속. 우리는 구속을 원하는 것일까 해방을 원하는 것일까. 벗어나고 싶은, 하지만 벗어나면 또 불편한 일상이라는 굴레를 표현했다.인생은 구속과 해방의 연속이다. 이것은 운명이다. 방법은 오직 하나. 무의미한 삶의 축제를 즐겨가는 것뿐이다.- ≪준비전≫전시 도록 中
오뉴월은 5월과 6월을 아울러 이르는 ‘오뉴월’은 여름 한창, 한여름을 뜻하는 말이다. 2011년 6월 성북동에서 시작한 스페이스 오뉴월 Space O’NewWall은 한여름의 뜨거운 열정으로 꾸며지는 새로운 전시 공간(New Wall)이다.장르, 연령, 매체, 국가, 시대가 한데 들끓으며 생겨나는 젊은 에너지로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을 찾는 예술 실험실로서 스페이스 오뉴월은 ‘도시-이미지-문화’를 매개하는 에이전트(agent)가 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예술을 통해 공동체와 지역의 문화적 이슈에 개입하는 다양한 전시, 학술 행사 및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참고: 스페이스 오뉴월 공식 사이트
김윤섭 작가의 <위장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정보화 세계에 떨어진 건에 대하여 About a person who thinks with stomach and intestines fell into the information world>는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건에 대하여>라는 망가 애니메이션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제목이다.디지털과 메타버스 등 가상 세계가 전면화하며 인간의 시각은 물질과 물체의 표면에 맺히는 것이 아니라 매끈한 모니터나 디지털 픽셀에 맺히게 되었다. 예술과 회화의 인지에도 이러한 환경은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기존 언어로 예술 작품을 해석하는 차원을 넘어 작품을 하나의 정보 뭉치 혹은 개별 정보 단위로 분석함에 따라 어느 순간부턴가 데이터로서 존재 양태와 형식이 강요되고 있는 듯하다.이번 전시는 문득 이세계(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다른 세계)에 떨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현란한 변화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나라는 존재에 관한 물음이다. 위장의 외침과 고동치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하나의 정보 뭉치로 실존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내가 만들어 내는 작품들은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데이터로서 탄생하기를 거부하는 작품은 어떠한 형식이 될 수 있을지 더욱 실험하고 부딪혀 볼 생각이다.- 작가의 말 中
1. '아트노이드178', '17717'처럼 성북동의 갤러리 이름에는 종종 숫자가 보인다. 이 숫자에 숨겨진 비밀은, 바로 장소의 이름이 곧 주소라는 점. 이름 하나로 주소까지, 공간에 대한 가장 명확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얻어 가는 셈이다. 자 이제, 성북동에서 숫자가 있는 건물 이름을 발견한다면, 가장 먼저 그곳의 주소를 의심해 보길 바란다. 나름 갤러리 이름의 비하인드스토리를 듣는 재미가 쏠쏠할 것이다.2. ‘이런 곳에 이런 갤러리가?!’ 또는 '이런 곳에 이런 전시가 열린다고?!" 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곳들이 구석구석 많다. 그만큼 길거리에 나와 있는 갤러리보다 골목마다 또는 집과 집 사이에 비집고 숨어든 작은 갤러리들이 많다. 또, 의외로 개성 강한 젊은 작가들의 개인전이 주로 열리는 듯했다. 어쩌면 아직 모르는 갤러리와 전시가 더 많다는 생각도 든다. 또 '오뉴월 이주헌'같은 숨은 갤러리가 있을지 어떻게 아는가? 이런 것이 진정 보물 찾기가 아닐까.3. 성북동은 굽이진 길, 골목 사이, 경사진 곳 등 겉보기에는 보통의 평범한 동네의 모습이다. 그러나 틈틈이 비좁은 골목 사이로 현대적 건물과 전통적 한옥 건물을 한 시야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성북동을 갈 일이 생긴다면, 꼭 한성대 입구역을 시작으로 혜화문을 오르고 아래로 내려오는 길에 성북동의 전경을 시야에 담을 수 있는 핫한 사진 스폿이 있다. 날씨 좋은 날 멋진 사진 찍어보길 추천한다.4. "성북동, 저기 어디 서울 위쪽 아냐?"라고 말하기에는 미안할 정도로 곳곳에서 은은한 예술의 향기가 묻어있는 곳이었다. 뚜렷하지 않고 흩어져 있어서 흐릿하지만 그럼에도 개성 강한 젊은 화랑들이 꾸준히 찾아와 예술의 세계를 펼치는 이곳. 앞으로 나에게 성북동은 '그저 먼 곳'을 넘어서 구체적인 언어로 '사이를 비집고 예술이 은은하게 베인 동네'라고 말해두겠다.산책 후 주절주절_ 2021.10.08
안녕하세요. 공간 17717에서 준비전을 가진 작가 박연입니다. 꼼꼼하고 훌륭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전시를 재미있게 보셨다니, 뿌듯할 따름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설명글에 오탈자가 있어서 이렇게 댓글이라도 남겨드립니다. 현장스케치에는 (성북동이 아닌) 성수동이 그려져 있습니다. 번거러우시겠지만, 가능하다면 수정 요청드려도 될까요? 그럼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