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중, 고, 대, 결혼, 출산, 집, 차...
한국 사회에서 살다 보면 정해진 길을 강박적으로 따라야 할 때가 생긴다. 신생아 때 어떤 젖병, 장난감을 쓰는지부터 시작하는 이 강박은 점차 커져서 명문고등학교, 명문대학교의 입시로 바뀌며, ‘남들 다 하는’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등으로 이어지곤 한다.
이 강박적인 길에는 심지어 개략적인 나이도 정해져 있다. 대학은 20세~25세, 결혼은 28세~35세.... 사람들은 각각의 나이에 맞는 지상과제를 충실히 수행하려고 애쓰며, 여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은 곧 실패라고 느낀다. 아니 적어도 성공했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저 길들을 착실하게 밟는 것이 곧 성공이며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이다.
사실 나 역시 이러한 길에 착실히 맞춰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다. 더욱이 대한민국 학제 제도 아래서 20살도 안 된 학생이 자기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거나, 저 틀을 깨부수는 혁명적인 사고를 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그저 하라는 대로 적당히 공부하며, 적당히 즐기며, 적당히 순응하며 살아왔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저 중간 어디쯤에서 변혁의 순간을 맞았다. 그것은 바로 독일로 교환학생을 다녀왔을 때였다.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건 없구나
입국 첫날부터 이어진 온갖 인종차별과 문제가 있는 행정처리, 그리고 갑작스러운 이사와 부적응을 거듭하며 스트레스로 응급실까지 다녀온 나는 겪어보지 못했던 일들을 만났다. 소위 땅바닥을 찍은 듯한 안 좋은 상황이 이어지며, 웬만한 도전에는 겁이 없어졌다.
더불어, 나와는 다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유럽 사람들은 첫 만남에 나이를 물어보지 않았다. 우리처럼 밥을 먹었느냐고도 물어보지 않았다. 흔히 이야기하는 외모 평가도 절대 하는 법이 없었다. 나보다 열 살은 많은 사람, 다섯 살은 적은 사람들끼리도 같은 학년에서 자유로이 공부하며 자유롭게 의견을 공유했다.
무엇이 더 좋고 나쁘다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내가 배운 것은, 내가 한국에서 배워온 그 모든 것이 상대적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한국에서 ‘당연히 이건 이렇게 해야지’라고 통용되는 상식들이 통하지 않았다.
지구촌 60억의 인구는 내가 그러리라고 생각한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서로 너무나도 다른 삶의 태도를 갖고 살아간다는 것을 느꼈다. 살아가는 데 한 길만 있는 줄 알았는데 백 가지 길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는 그제야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래란 그저 주어진 단계를 차근차근 밟는 것. 과를 진학할 때는 점수에 맞춰 쓰거나, 상경계를 쓰거나, 그도 안되면 쓸 수 있는 과 중에서 그나마 관심 있는 과를 추리기. 그리고 취직은 그 과에 따라 선택하기. 당시 한참 고민하던 내 진로 선택지에는 고작 다섯 손가락 정도의 자유밖에 없었다.
이 과정을 밟는 동안 나는 내가 좋아하는 향이 뭔지, 내가 좋아하는 색깔이 뭔지, 내가 좋아하는 특성이 뭔지도 말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실은 이 다섯 개 중에는 하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여태까지 고군분투했던 것은, 이 다섯 개 모두가 싫었기 때문임을.
나는 점수에 맞춰 쓴 내 전공을 포기했다. 1년 동안 내가 뭘 하고 싶은지를 찾았다. 그리고 ‘에이 그래도 다 포기하고 그걸 어떻게 해’라고 생각했던 전공으로 대학원에 왔다. 준비하는 동안 고군분투의 과정이 있었지만 후회는 없다. 오히려 지금도 이탈하지 않았을 나의 모습이 가끔 상상돼 몸서리치고는 한다.
내 인생은 누가 걷고 있는가
“맥베스”를 읽어보면, “인생은 그림자가 걷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맥베스는 극 중 마녀들의 예언을 듣고 살인을 저지르지만 결국 그의 양심에 기반해 파멸하는 인물이다. 그는 파멸하며 내 인생은 그림자가 걸었다고 실토한다. 그의 인생은 그가 좋아하는 것, 그가 원하는 것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마녀들의 예언이라는 그림자가 대신 선택해준 인생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사회가 전하는 메시지 역시 마녀들의 예언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하나로 정해진 ‘올바른 선택’을 강요한다. 그것이 더 행복하다는 무조건적인 이유에서다.
유치원부터 서열을 나누고 초등학교 때에는 명문 중학교, 중학교 때에는 특목고등학교, 고등학교 때에는 명문대를 가는 것이 목표라 가르친다. 대학에서는 높은 성적과 돈 많이 주는 직장이 인생 행복의 척도라고 이야기한다.
사회적 명예와 성공은 희소성이 있는 재화이므로 누구나 성공을 누릴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성공이 사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노력한 자신에게 응당 주어져야 할 보상이라 착각하여 탐욕과 자만에 찌든다. 이것은 인간성의 파멸이다.
그건, 괜찮을 필요도 없는 건데
이런 사회에서는 당연히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추구하는 것이 ‘실패’라 불린다. 이에 자신이 원하는 바가 있는 청년들은 불안감에 ‘실패’해도 괜찮다는 말 한마디를 들으려 온갖 강연을 찾아다니며, 서점에 수북이 쌓인 “그래도 괜찮아” 따위의 자기계발서로 위안을 삼는다. 실은 그것이 실패가 아닌 데 말이다.
그러니 정해진 길을 벗어나 자신만의 도전을 하는 사람들은 원래 그 도전의 무게보다 2배, 3배 무거운 짐을 얹고 여정을 시작하는 셈이다.
따라서 살아감에 있어 묘한 답답증을 느끼지만 “원하는 것을 도전해볼까?”라는 마음이 들 때마다 금방 “에이, 그래도....”라는 마음이 드는 사람들. 그리고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저 정해진 길을 탈선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용기 있게 외치고 싶다.
그것은 실패도 아니고 불행도 아니며 오히려 새로운 행복의 열쇠가 될 수 있음을.
비슷한 경험이 있는 지라 공감이 많이 되네요.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