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본질은 노란 곰돌이 - 안녕, 푸 展

한 곰돌이에게 부여된 순수함이라는 상징
글 입력 2019.08.18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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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곰돌이 푸가 아니라, 곰돌이 푸'의 상징'



나는 푸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푸를 동원한 가지각색의 커스터마이징을 꺼린다. 곰돌이 푸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일전에 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읽고 기고했던 칼럼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어린 왕자가 그랬듯이 곰돌이 푸도 마찬가지로 사람의 손을 타고 또 타서, 정말 다양한 시공간에 나타난다.

 

푸나 어린 왕자나,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은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지겨울 정도로 가공의 공정을 지난다. 그렇게 또 다른 상품이 되어 작품 바깥으로 튀어나온다. 자본주의는 냉혹하다. 별다른 기준을 들이밀지 않아도 돈이 되냐, 되지 않느냐로 작품의 가치를 매기도록 종용하기 때문이다. 돈이 되는 작품은 계속해서 가공되어 우리의 눈앞에 나타난다. 곰돌이 푸는 살아남고 있는 캐릭터다. 사람들이 많이 찾고, 찾는 만큼 높은 수입원으로 작용하니까.

 

이렇게 말하고 보니 2차 가공을, 더 나아가 자본주의 세상 자체를 혐오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아니다. 난 뼛속까지 속물적인 사람이라 자본주의를 사랑하고, 여러 가지 굿즈에 내가 좋아하는 작품의 인물이 장식되는 게 좋다. 다만 내가 작품을 읽으면서 해석한 등장인물이,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해석된 채로 상품화되는 건 싫다.


보통 이런 경우에 해당 등장인물은 굉장히 평면적으로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인물이 지닌 다양한 면모, 그 인물을 해석할 다양한 관점이 무시된 채 오로지 캐릭터의 한 가지 면모만 부각된다. 그 단일한 부분만이 캐릭터 전체를 표현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정론에 가까운 캐릭터성이 하나 만들어진다. 캐릭터를 해석할 가장 올바른 관점이 고정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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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 곰돌이는 그런 애가 아니에요!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캐릭터들은 캐릭터가 지닌 어느 한 면만 부각되기 십상이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캐릭터가 되려면, 사랑을 주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특별한 어떤 것이 부여되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데에 성공하면, 그 이후부터 캐릭터의 정체성은 하나로 고정된다. 무엇무엇의 “상징”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곰돌이 푸는 어떤가? 행복과 순수함의 상징으로 고정되어 있다. 어린 아이의 눈으로 마주할 수 있는 순수함과, 이 평화로운 순수에서 비롯되는 따뜻한 행복감. 푸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이다.

 

푸의 상징성은 수많은 상품에 마음껏 이용된다. 마케팅의 수단이 된다. 가령 행복은 어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네 근처에 있다는 책을 생각해보자. 당신의 위치가 시궁창일지라도, 시궁창을 빠져나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잘못하면 끝없이 자기합리화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할 깊이의 행복. 이런 행복을 알려주기 위해 곰돌이 푸를 데려온다. 환하게 웃고 있는 곰 한 마리를.


내가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곰돌이 푸, 아니 곰돌이 푸로 덮인 상품들은 끊임없이 세상에 나오고 있다. 여기까진 그렇다고 쳐도, 내가 생각하는 푸의 이미지가 대중적인 그것과 다르다고 해서, 나의 생각이 정론에서 벗어난 독특한 의견이라는 반응은 싫다.

 

내가 생각하는 푸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일상의 소박한 행복을 알려주는 캐릭터가 아닌데. 나한테 푸는 그저 아동용 동화에 등장하는 곰돌이 캐릭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냥 귀엽다는 생각으로 끝이다. 알고 보면 사회생활에 찌든 어른들에게 유효한, 순수하면서 따뜻한 조언을 해 준다니. 푸가 던지는 따뜻한 말들은 일시적인 위로에 불과하다.


마음의 울림을 주는 구절을 읽더라도 그 때 뿐이다. 팍팍한 삶으로 회귀한 다음에, 푸의 말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소박한 행복을 좇기엔 나를 둘러싼 현실이 너무나도 삭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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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시궁창에 있다니까.



3. 그래도 드로잉 전시는 옳다


 

너무 꼬인 거 아니냐고? 맞다. 물론 곰돌이 푸에 이런 상징화 작업이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난 푸라는 캐릭터 자체를 몰랐을 거다. 노란 곰돌이를 이 세상에서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하는 나마저도, 다른 작품의 등장인물들을 소위 대중적으로 해석된, 만들어진 이미지대로 해석할 때가 많고. 취향과 선호의 문제일 수도 있다. 마음에 안 든다, 이 한 마디면 될 것을. (근데 푸는 귀엽다. 일단 귀엽다.)

 

그래도 전시를 보러가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원작 작가들의 작업 과정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또 다른 상품으로 거듭난 푸 말고, 맨 처음 소설 속에 존재했던 푸를 볼 수 있는 전시회라고 생각했다. 물론 전시의 타이틀은 푸를 여타의 상품들이 그러하듯, 순수함의 상징으로 내걸어놓고 있지만. 적어도 가공되기 전의 노란 곰돌이를 마주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푸의 본질은 순수함, 행복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노란 곰돌이니까. 노랗고 귀여운 곰.


그리고 최근 전문 강의로 소묘의 기초를 들어서, 드로잉에 관심이 많이 생기기도 했고. 사실 드로잉 그릴 영감 얻으러 가는 목적도 크다. (나만의 곰돌이 푸를 그려내기 위해서!) 귀국한 후에 잔뜩 심통 난 표정으로 보러 갈 생각이다. 일단 껍질이 씌워진 푸를 만나러 갈 것이다. 그리고 전시회를 감상하면서 그 껍질을 벗겨내고 말 거다. 푸는 어린 시절을 되새기게 해 줄 존재가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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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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