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늘은 하루 쉽니다. [사람]

오늘 하루 나는, 임시 휴업
글 입력 2019.08.18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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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비가 미친 듯이 퍼붓는다. 사무실로 향해야 하는데 자꾸 뭉그적거린다. 비 오는 부암동이 보고 싶어 무작정 차를 몰고 서울로 향했다. 매일 아침 보던 빼곡한 빌딩이 가득한 풍경이 아닌 서울의 울창한 숲이 낯선 모습으로 눈앞에 한가득 펼쳐진다. 살 것 같다.


근 한 달 정도 새로 하는 업무에 휴가도 없이 시달리다 보니 결국, 부작용이 이 바쁜 아침 출근 시간에 발생하고야 말았다. 다행히 예전처럼 회사에 매인 몸이 아니어서 누군가에게 오늘 급하게 연차를 쓴다는 보고는 하지 않아도 된다. 내 맘대로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핸들을 돌린다.


부암동 동네 어귀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공영주차장을 검색한다. 마땅히 차를 댈 곳이 없어 효자동 공영주차장까지 이동하여 차를 두고 다시 마을버스를 타고 부암동으로 돌아왔다. 출근 시간이 지난 평일이어서 그런지 버스손님은 나를 제외한 두 명뿐이다.


종점에 내려 내가 좋아하는 공원을 찾아간다. 부암동 초입에 있는 마카롱가게가 오픈 준비를 하는 듯 분주하다. 당 보충이 필요해 간단하게 하나 사서 먹고자 들어갔는데 사장님이 남자분이다. 세상에, 너무 앙증맞고 예쁜 마카롱가게인데 훤칠한 키의 남자분이 흰 장갑을 낀 채 마카롱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낯설다. 더욱이나 환한 미소로 날 맞이하는데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아이러니한데 왠지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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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보아하니 벌써 아홉 시 반을 훌쩍 넘긴 시각. 정신없이 공원을 찾느라 미처 몰랐다. 어느새 비는 그치고 해가 반짝인다. 오늘. 햇살이 너무 좋다! 비가 걷힌 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여름과 어울리지 않는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온다. 정말 일하기 싫은, 놀러 가고 싶은 딱 그런 눈부신 날씨다. 이거 큰일이다. 어떡하지. 아 일하기 싫다, 정말.


높디높은 하늘을 올려다보니 괜히 일하는 동안 펴지 못했던 허리가 아픈 것 같고, 어깨도 갑자기 아픈 것 같다. 없던 통증들이 하나둘 스멀스멀 생기면서 오늘은 일하지 말라고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는 듯하다. 높게 쌓인 돌담과 눈부신 햇살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일렁이는 기분이 든다.


에라 모르겠다. 그래! 오늘 하루 나는, 임시 휴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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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던 길을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간다. 아까 보았던 나지막이 흐르는 음악과 여유가 묻어나는 카페에 가고 싶다. 경복궁의 담벼락과 닮아 있는 어느 한적한 주택 앞의 담벼락이 마주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한자리 차지하고 앉는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직 오픈 준비 전인 듯, 손님은 나 하나다. 왠지 부암동은 초록색이 잘 어울리니까 녹차 빙수를 먹어야만 할 것 같은 귀엽고 유치한 생각을 하며 녹차 빙수를 주문한다. 서두를 것 없이 천천히 준비해도 된다는 나름 따뜻한 목소리의 멘트를 함께 건네며.


팥 앙금 하나 없는 오로지 수북한 실타래 같은 얼음과 녹차아이스크림으로만 이루어진 천연 웰빙 녹차 빙수를 보곤 혼자 빙그레 웃으며 한 숟갈 뜬다. 그 순간, 카페에는 [Will Samson의 Sanctuary] 음악이 흐른다. 평일의 이 여유로움이 너무 좋구나.





혼자서 빙수를 먹으며 사무실에서 내 걱정을 하고 있을 동료에게 전화를 한다.


"민아, 오늘은 우리 그냥 쉬자. 오늘은 너도 나도 그냥 각자 하고 싶은 거 하구 내일부터 다시 일하자~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 알았지?”


통화 저편에서 키득거리는 동료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요새 왜 잠잠한가 했다며, 분명 이쯤이면 좀 쉬자는 얘기를 할 타이밍인데 너무 앞서서 오히려 걱정했다고 하니 내가 무리를 하긴 했나 보다.


오늘 하루는 각자의 방식으로 마음껏 쉬고 내일부터 다시 으쌰으쌰 하기로 했다. 함께 작업실을 쓰는 동료는 자유 수영을 하고 사우나를 간다고 했다. 너무 소박하지만 나는 동료의 그 소박함이 이해가 간다. 이런 실낱같은 여유라도 있어야 내 일을 사랑하고 쭉 유지하게 되는 법이다. 됐다. 이제 됐어! 오늘 하루 나의 땡땡이는 내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두 배, 세 배로 더 열심히 뛰면 된다.


아침부터 도심의 빌딩이 아닌 푸르고 빼곡한 울창한 숲을 봐서 그런지 너무 상쾌하다. 숲이 많아서 그런가? 사이다 같이 톡 쏘는 바람도 불어온다.


자, 이제 녹차 빙수도 한 그릇 했으니, 오늘 하루 무얼 할까.


내게 주어진 단 하루의 임시휴업.


한낮의 행진.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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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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