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내가 너에게

연극 '너에게' 리뷰
글 입력 2019.07.11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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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원했지만 만나지 못한 여자와 아이를 원하지 않는 여자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기가 있다. 엄마는 아이의 생일을 아이가 죽은 날로 기억하게 되었다. 엄마는 아이를 낳기에 젊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건강하게 낳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고, 엄마는 죄책감과 슬픔에 시달린다.

사산(死産)에 대해 다루는 이야기가 많지는 않을지라도 아기를 잃은 슬픔에 공감하기는 쉽다. 아기를 잃은 모건은 극 내내 반은 정신이 나가 있다. 울부짖다가 절망하고, 모든 것을 끝없이 자신의 탓으로 돌려보기도 하고 호박을 아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아이가 왜 특별했는지, 그 아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이 연극은 숭고한 모성애에 관한 연극인 걸까.

모건에게 이입이 될 때쯤 산통을 깨는 것은 돌로레스의 등장이다. 채찍을 내리치고 서슴없이 욕설을 퍼붓는 그는 SM플레이를 해 주며 돈을 버는 여자다. 그는 임신 중이다. 하지만 임산부가 지켜야 할 주의사항은 하나도 신경쓰지 않고, 그저 몇백 년쯤 자고 일어나면 모든 일이 다 끝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누가 아기 얘기라도 꺼내려 하면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는 아기를 키우지도 않을 거고, 없애버릴 거라고 말한다. 그런 그에게 모성애라는 단어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무대에 오르는 한 인물은 모성애의 헌신과도 같아 보이고, 다른 인물은 모성애라고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볼 때 뜻밖에 그들 사이에는 공감의 싹이 튼다.



모성애라는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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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애는 오랫동안 어머니와 자식 사이를 규정하고 설명하는 개념이었다. 여성이라면 누구에게나 모성애가 있으므로 어머니가 자식을 낳아 아끼고 사랑하는 건 당연하다는 인식이 오늘날에도 깊이 자리잡고 있다.

그 말대로라면 반대로 아이 낳기를 거부하거나 임신중절을 선택하는 여성은 여성으로서 치명적인 도덕적 결함을 가진 존재인 셈이다. 이러한 이분법은 여성, 특히 임산부를 딱 두가지 부류로 나눈다. 행복하게 아이의 탄생을 기다리는 '모범 엄마'와 아이를 없애려는 부도덕한 여자.

그러나 <너에게>는 이러한 모성애의 개념을 모건과 돌로레스라는 상반되는 두 여자를 통해 뒤흔든다. 두 여자는 너무 다른 처지에 놓여 있다. 상황에 따라서는 서로를 미워할 수도 있다. 아기를 낳고 싶어도 낳지 못했던 사람과, 원치 않는데 임신을 하게 되어 낙태를 고민하는 사람은 참 불편한 조합이다.

두 사람이 교차되는 지점은 모건이 자신의 낙태 경험을 고백할 때이다. 과거에 아기 대신 자신의 학업과 미래를 선택했던 여자가 이제 그 무엇보다도 아기를 원한다. 임신을 원하는 여성과 원하지 않는 여성 사이의 경계는 흐릿해진다. 우리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던 이분법적인 이미지도 사라진다. 모건은 한때 돌로레스였고, 돌로레스는 언제든 모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차는 낙태하는 여성에게 씌워지는 낙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단편적인 이미지를 진실이라고 믿어왔는지 돌아보게 한다. 돌로레스와 모건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건 모성애가 편의에 따라 만들어진 일종의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이다. 현실의 모성애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여성의 도덕성을 평가하는 잣대로도 부적절하다. 그저 여성이 아이를 원할 때 생겨나는 마음과 능력 같은 것이다.



여자들을 잇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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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를 잇는 것은 아기 콘스탄티노플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조산사 엘레나다. 콘스탄티노플은 모건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자 이루고 싶은 소원이다. 하지만 돌로레스에게 콘스탄티노플은 소중한 동시에 어딘가 공포스럽고 슬픔에 빠지게 만드는 존재다. 돌로레스는 콘스탄티노플을 통해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이를 본다.

또한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죄책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죄책감에 시달리는 조산사 엘레나는 이들의 죄책감만을 모아 사람으로 형상화한 모습 같기도 하다. 또한 엘레나와 모건이 둘다 싫어하는 여성의 모습을 한데 모아 놓은 인물이기도 하다.

싫은 소리를 못하는 여성, 예의 바른 여성, 끝내 세상에 대한 기대를 놓지 못하는 여성. 모건과 돌로레스가 모두 여성을 싫어한다고 언급하는 점이 기억에 남는다. 그들을 통해 역시 여성인 자신의 약한 모습을 봐야 하기에 여성이 싫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그들에게 마이크를 쥐어 주었을 때


연극은 모건, 돌로레스, 콘스탄티노플이 편지를 읽으며 끝난다. 모건과 콘스탄티노플은 서로에게, 돌로레스는 곧 태어날 자신의 아이에게 쓰는 편지다. 모건과 콘스탄티노플은 이별하지만 각자의 길을 또다시 걸어가리라는 희망이 느껴져서 좋았다.

돌로레스의 결말도 나쁘지 않았지만,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게 된다. 현실에는 돌로레스 같은 여자들이 많지만 모두 돌로레스 같은 선택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임신을 부정하고 방황하다가 문득 아기에게 애정을 느끼고 그 아기를 낳아 기르기로 결정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흔한 전개로 느껴졌다.

여성의 출산은 늘 국가의 필요에 의해 조정되어왔다. 아이가 너무 많이 태어날 때는 낙태를 암묵적으로 허용해왔고, 최근 10년 사이 출생률이 떨어지자 아이를 낳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며 진정한 삶의 완성인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 과정에서 당사자인 여성과 태아의 목소리는 지워졌다. <너에게>는 이 지워진 목소리의 주인들에게 마이크를 갖다댄다. 그렇게 터져나온 소리는 극장을 가득 메울 정도로 쩌렁쩌렁했다.

연극의 제목은 '너에게'지만 연극을 끝까지 보고 나면 그 편지를 쓰는 '나'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너'에게 쓰는 편지기 때문이다. 여성의 임신과 출산은 단순하고 이분법적인 개념이나 어떤 이데올로기로는 설명되지 않는 '나'와 '너'의 고유한 이야기다. 통계나 법률은 말하지 않는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는 좀 더 귀기울여 들어야 할 때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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