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분열과 죽음으로 바라보는 존재, 연극 "낯선사람"

글 입력 2019.05.17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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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유럽 연합군이 산둥지역을 침략하여 베이징 외곽에 도착했다. 이들은 중국의 의화단과 전쟁 중이다. 오스트리아 연합군 장교 울리히는 이들을 진압하고 있다. 젊은 중국인 혁명가 천샤오보는 자신의 나라에서 유럽 연합군이 곧바로 철수할 것을 요구하며 맞서 싸운다. 결국 울리히에게 붙잡힌 천샤오보는 사형장으로 끌려간다. 하지만 그는 가까스로 살아난다.


시간이 지나 현재, 울리히는 손녀와 리웨이가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를 연습하는 것을 보고 있다. 울리히는 오페라에서 혁명가를 사형집행 하려는 경찰 스카르피아를 보고, 오스트리아 연합군 장교였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 순간 천샤오보가 그의 눈앞에 나타난다. 울리히는 천샤오보를 다시 사형대에 세우고 총살하려고 한다. 하지만 오페라는 멈추지 않는다. 결국 총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무대는 다시 현재로 바뀌고 그곳엔 익숙한 누군가가 쓰러져 있다.



 연극 <낯선사람>을 보았을 때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두 단어는 반식민주의와 한나 아렌트였다.


의화단과의 전쟁 당시 중국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던 울리히는 세월이 흘러 세상이 바뀐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며 프랑스 혁명을 다룬 오페라에 대해서도 혁명을 불순한 것이며 국가 권력에 복종해야 한다고 역정을 낸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를 오가며 드러나는, 힘의 정의를 들먹이는 그 폭력적인 행태와 사형을 기다리는 사형수들에게 편지를 쓸 기회를 주며 ‘배려’를 운운하는 그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행태는 세월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앵무새처럼 반복된다.


그의 시대착오적인 언행을 통해 서구 제국주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악행의 민낯이 드러나며 동시에 나치 전범의 재판 과정을 다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저술한 한나 아렌트의 악의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생생한 학살의 경험을 통해 가해자를 향한 분노와 피해의 책임을 역설하는 중국인 천샤오보의 외침에도 ‘시켜서 한 것이다’ ‘그것은 나의 직장이었다’ ‘힘의 정의일 뿐이다’를 반복하는 그의 말에는 어떤 깊이 있는 사고도 들어있지 않다.


*


그러나 이 극은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과 상투어로 점철된 악의 평범성을 드러내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나는 분열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작품의 표어처럼, 극의 주인공 ‘울리히’와 그의 세계는 끊임 없이 분열한다. 암전이 일어날 때마다 그의 시간은 분열하며, 그의 자아 역시 분열한다. 무대 위에서 인물이 점하는 위치가 변화될 때마다 그러하기도 한다. 그 분열은 낯섦과 불안으로부터 비롯된다. 극의 초반, 울리히의 책장에는 하이데거의 글이 꽂혀있다. 어쩌면 그의 앞에 나타난 천샤오보의 모습을 하이데거의 말을 빌려 '양심의 부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왜 자꾸 자신의 앞에 나타나느냐는 울리히의 말에 천샤오보는 자신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울리히가 자신을 부른 것이라고 답한다. 그것은 나로부터 오지만 나를 넘어서 오는 것이며 울리히가 불러낸 것이지만 울리히의 뜻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존재한다. 천샤오보와의 말다툼에서 울리히가 주장하는 자신의 피해는 자본이다. 그는 그녀를 사형시키지 못하고 살려 보냄으로써 진급하지 못해 연금을 충분히 받지 못했노라고 외친다.


그러나 이 극의 끝에서 알 수 있 듯, 그러한 물질적인 가치는 꿈에서 깨어나는 것, 그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분열과 다툼 끝에 울리히는 그녀를 사형에 처한다. 그러나 그러한 총성과 함께 드러나는 것은 자본의 허상 뿐이다. 그는 자기 주변에 있던 모든 물질적인 가치를 잃은 채로, 그러나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채로 눈을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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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는 언제나 죽음의 상징이 있다. 늘상 무대 중앙에 의연하게 서 있는 사형대가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종종 총을 바라보고 만지는 바넷사의 모습과 그것을 의미심장하게 다루는 듯한 리웨이의 모습, 그리고 총을 들고 오페라의 연습을 하는 둘의 모습에서 역시 섬뜩한 죽음의 불안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척’만 한다고는 하지만 언제 누군가의 실수로 총성이 울려 죽음이 닥쳐올지는 모르는 일이다.


울리히는 의사에게 주변 인물에게 죽음이 닥쳐올 때 그게 자신이 아님에 안도하였다 고해하듯 말하지만, 의사는 담담히 인간은 누구나 다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한다. 내내 죽음은 도처에 깔려있고 그것은 현실과 다르지 않다. 자신 앞에서 목숨을 구걸했던 중국인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기도문을 외던 울리히의 절규 같은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는 그래서 보다 더 소름 끼치게 다가온다.


결국 울리히는 자신의 분열된 자아인 천샤오보를 향해 총을 쐈던 것처럼, 자신 스스로도 한 손에는 자신의 훈장을 손에 든 채 총으로 자살한다. 유언은 ‘조국에 영광을’ 이다. 그가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만의 정의만을 간직한 채 죽음으로 도피했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후세대인 우리는 이미 판결을 내렸다. 간호사 바넷사-린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는 끔찍한 전쟁 범죄자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유죄다.


개인의 악행을 시대의 탓이라 용서할 수는 없다. 그 개인에게도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사회를 객관적으로 비판하고 검토해 틀을 변화시켜나가야 한다. 울리히가 경험하였듯 틀의 변화와 가능성은 언제나 불안과 낯섦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들과 함께 살아가야한다. 그리고 한가지, 우리는 영원히 사는 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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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
- 나는 분열한다, 고로 존재한다. -


일자 : 2019.05.10 ~ 05.19

시간
평일 19시 30분
토 15시, 19시
일 15시
(월 쉼)

장소 : 문래예술공장 박스시어터

티켓가격
전석 30,000원

주최/주관
테아터라움 철학하는 몸

관람연령
전체관람가

공연시간
110분





[김민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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