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ROTEA] TEMPERENCE14: 절제, 그 소리없는 아우성

글 입력 2019.05.13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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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ROTEA]

TEMPERENCE14

절제, 그 소리없는 아우성


스무살이었다. 혼자 집에 있는 설날이었다. 어제는 통제가 안되는 삶이 우울해서 친구를 불러 술을 마구 들이켰었다. 라면 사려고 슈퍼 가는 길에 신문을 하나 지고 나섰다. 신문을 보니 나랑 나이가 비슷한 김연아가 어른이 되었으니 새 하이힐을 신고싶다 했다. 나는 그 신문을 신발장에 멀찍이 던져두고 왔다. 모자를 눌러쓰고 허겁지겁 나오는데, 어제 엄마가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옆집 남자애는 그렇게 잘생겼고, 공부 잘하는 스무살 여자애가 산다더라. 젠장, 나는 남자친구도 없고, 잘난 것도 없고, 심지어 뚱뚱하고 못생겼는데. 잘 생각해보니까 아까 엘레베이터에서 마주친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아는 척도 안했지만. 내 우산에 그려진 무지개는 휘황찬란한데, 나는 왜 이렇게 휘황찬란하지 못하고 무지개를 짊어지듯이 도망가듯이 살아가는걸까. 신라면을 우걱우걱 먹고있는데 파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손을 비비고 있었다. 아아, 절제고 통제고 없는 삶이여.

처음 <절제> 카드를 볼 때, 그때 기억이 떠올라 참 마음에 안들었다. 왠지 '절제'라는 단어는 뭔가 대단한 통제, 그러니까 자기관리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렴풋이 부지런하게 사는게 좋은거 쯤은 나도 알고있고, 그래서 괜히 재수없다고 느낀다. 누가 그러지 않은 삶을 꿈꾸겠는가? 하지만 이런 인상과는 반대로, 사실 절제는 결코 자기관리나 통제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자기관리가 잘 된 삶', 즉 현대 자본주의 삶에서 '절제된 삶'은 진정한 의미에서는 절제의 범위를 넘어선다. 왜냐면 그것들은 과기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정말 '바라는가'도 고민해봐야할 문제다.

중용과 통제의 차이를 분명하게하기 위해서 (어쩌면) 아직까지 지속되어오는 개인적 일화를 먼저 소개했다. 그래서 오늘은 절제가 주는 자유를 다시 생각해보려 한다. 그리고 그 맥락은 당연히 현대사회에서 요구하는 절제와 통제심이 아니다. 오늘 절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대학의 중용을 빌려왔다. 요즘 보노보노고 라이언이고 테디베어고 귀여운 얼굴들이 서점을 기웃거리는데, 나는 이게 전부 과기능한 현대인들의 중용에 대한 강렬한 열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분명 '절제'가 필요하다. 후술하겠지만, 그건 곧 마음 중심을 다 잡는 것이다. 평화를 가져다주진 않지만, 중용은 흔들리지 않는 손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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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사 미카엘



<절제>카드는 무의식에 해당하는 마지막 카드다. 이 카드 이후로 카드의 여정은 의식과 무의식 너머를 살피게 된다. 바보는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는 '죽음'을 통해 한 세계를 초월할 수 있었다.절제에 있는 인간은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몸부림칠 필요가 없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절제는 결코 통제와 억압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그래서 <절제>카드는 타로카드 중에서 인기 없는 카드 중 하나다. 하지만 하나하나 따지고보면, 중용 카드야 말로 가장 강력한 힘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카드다. 카드의 주인공도 가장 대표적인 천사인 미카엘이 아니던가.

붉은색 양 날개를 크게 펼친 채 가만히 눈을 감고 물가에 서있는 인물은 대천사 미카엘이다.'미카엘'이라는 이름은 '누가 하느님 같은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름대로 미카엘은 악과 직접 싸우는 존재다. 미카엘은 타천사 루시퍼와 추종세력을 지옥으로 밀어뜨리고, 그는 빛과 어둠, 선과 악, 구원과 타락 등에서 믿는 사람의 영혼을 보호하고 임종자를 보호한다. 미카엘은 신의 뜻을 대행하는 것은 신 외에 아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리는 역할을 맡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강력한 행위자의 상징이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와 별개로 타로카드의 미카엘은 눈을 감고 뭔가에 집중하고 있다.

그의 이마에 있는 황금빛 원안의 붉은 점은 태양의 상징이며, 힘의 근원이다. 그 뒤에 비치는 후광은 그가 신성하고 초월적인 존재임을 암시한다. 가슴에는 사각형과 삼각형이 겹쳐진 모양을 겸쳐진 모양이 그려져 있다. 삼각형은 삼위일체, 즉 신의 세계, 관념의 세계를 의미하며, 사각형은 자연의 4원소와 명백하게 인지할 수 있는 물리적 세계를 의미한다. 두 세계가 합일된 미카엘은 더욱 완전한 존재다. 노자의 말을 따르자면, 유와 무가 서로를 낳는 합일에 이른 도에 도달한 상태며, 융의 말에 따르자면, 의식과 무의식의 합일에 이른 상태다. 이상과 현실이 균형을 맞췄으니 한 발은 물 속에 있고, 한 발은 땅 위를 딛고 있다. 물은 감정을 의미하며, 땅은 세상 속 행위를 상징한다. 물에서 시작된 길은 산 봉우리 사이, 태양이 떠오르고 있는 곳을 향해있다. 바로 전 카드, 죽음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표현을 봤다. 진정한 생명 에너지는 이분화된 세상 너머에 있는 것이다.

부드러운 맨발은 어느 한쪽에 치우지지 않은 평화로움과 조화로움을 보여주며,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서로 상반된 것들의 균형과 조화를 의미한다. 천사가 한 컵에서 다른 컵을오 물을 따르는 행위는 이 카드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타로카드 중 '오스왈드 워스 타로'에서는 한 컵을 금으로, 다른 한 컵을 은으로 표현한다. 이 타로카드에서는 마법사와 고위여사제가 지닌 태양의 속성과 달의 속성을 결합한다.라틴어 'temperare'는 적절하게 결합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한 속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적절한 상태로 혼합한다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가만히 집중하고 있는 미카엘의 모습은 이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탐스럽게 피어있는 붓꽃은 칼 모양을 닮은 잎 때문에 용감한 기사를 상징하는 꽃을 상징한다. 프랑스에서는 붓꽃을 왕조의 권위로 여기기도 했다. 붓꽃의 영명은 아이리스다. 그리스로마신화의 무지개 여신으로 불리는 이리스 여신과 같은 의미다. 이리스 여신은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전령사이며, 중요한 맹세, 약속의 순간에 등장한다. 이리스는 동시에 천상과 지상, 바다와 지하를 오가며 신들의 중재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성서에서도 무지개는 약속과 관계의 회복을 의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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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을 준비하면서 대학교 때 읽었던 대학의 중용을 다시 펼쳤다. 내가 생각했을 때, 중용이야말로 절제 카드를 가장 잘 설명하는 카드였기 때문이다. 중용에서 ‘중’이라는 것은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않고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것이 없는 것이다. ‘중’은 흔히 사람들이 오해하듯 단지 산술의 중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않고 지나침과 모자람이 없음을 뜻한다.‘용’은 평상한 행위를 뜻한다. 이 때 ‘평상한 행’이란 때와 장소에 따라 사람마다 마땅히 실천해야 하고, 실천할 수 있는 행이다.

그러므로 중은 반드시 다양한 사람과 사물들 간의 관계를 전제로 하여 자기와 타자 혹은 자기 자신의 내면과 외면 사이에서 적합한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잣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용은 변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서 일상생활에서 인간의 지속인 쓰임과 행를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그 쓰임은 일상생활에서의 용도이며, 그것은 시공 속에서 변화의 흐름에 의지하고 있다. 즉, 용이란 변화의 상황 가운데 가장 하고 보편타당한 행위를 뜻한다. 여기서 평상한 행란 때와 장소에 따라 사람마다 마땅히 실천해야 하고, 실천할 수 있는 행을 말한다. 따라서 용은 중의 기준안에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중용은 문자인 의미로 미루어 볼 때, 마치 깃발이 깃에 매달려 펄럭이는 것처럼 ‘어떤 기에 근거하여 끊임없이 자기를 갱신해가는 상황’으로 이해된다. 나는 이 부분에서 '소리없는 아우성'이라는 유치환 시인의 표현을 떠올린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용은 시공간속에서 ‘최상의 가장 확실한 것’이라는 中의 원리 적합성과 庸의 구체 실현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중용을 ‘수많은 지적노력 속에서 정립된 자신의 의견에 의해 실천(용)하되, 절대적으로 확신하지 않는 힘(중)’이라고 해석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끝없이 불안하고 수치스러운 세상에서도 잃지 말아야할 것은 이 변화무쌍한 깃대인 셈이다.

오늘날은 너무 쉽게 확신하게 만든다. 스테레오 타입이건, 치열한 논쟁이건, 삶의 태도건, 우리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너무 쉽게 확신한다. 니체는 ‘확신은 거짓말보다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와 역사 속에서 하나의 체계로 세상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러한 체계를 만들려는 자는 모두 불성실하다고 주장했다. 니체는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들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정신의 강함, 정신의 힘과 정신의 넘치는 힘으로부터 비롯되는 자유는 회의를 통해서 입증된다.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가치와 무가치에 관련된 근본적인 모든 것들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확신이란 감옥이다. 그것은 멀리도 보지 못하고 자기 아래도 보지 못한다. 그러나 가치와 무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자격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아래에 -그리고 자기 뒤에- 오백 가지나 되는 확신들을 봐야한다. (중략) 위대한 일을 하고자 하는 정신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을 바라는 정신은 회의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종류의 확신으로부터의 해방, 자유롭게 볼 수 있는 능력은 강한 힘의 특성이다.



우리는 종종 강한 확신에 의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치려는 사람을 강한 사람으로 여긴다. 우리는 그런 영웅들을 너무 많이 본다. 철저하게 자기관리하는 인물상도 이와 비슷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가슴 한켠에 그들은 사실 자신의 힘으로 설 능력을 상실했기에 독단적인 확신에 의해 삶의 무게를 지탱하려고 한 것은 아닌가를 의심해보아야 한다. 어떤 종교건, 정치적 이데올로기건, 삶의 태도건, 중용은 어떤 확신에 독단적으로 사로잡히는 것은 자기소외고, 자신의 지적능력을 훼손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어떤 독단적인 확신에 의존할 때 우리는 확고한 삶의 의미와 방향을 갖게 되고 이와 함께 살아갈 힘을 얻지만, 그 대가로 다양한 확신들을 자유롭게 비교할 수 있는 사고의 폭과 주체적 사고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확신의 감옥에 벗어나, 소리없는 아우성을 질러야 하는 것이다. 이 복잡한 과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유와 치유를 담보한다. 그러니까 더욱 열심히 펄럭이자, 스무살의 내가 그랬듯이, 무지개를 지고 도망가는 기분이 되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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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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