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다시 쓸 때까지] 03. 울음을 너무 믿는 바람에

글 입력 2019.04.20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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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다시 쓸 때까지] 

03. 울음을 너무 믿는 바람에

글. 김해서



누군가의 슬픔을 묘사하기 위해 나는 이렇게 시작하는 시를 써야 했다.


"할머니는 울음을 너무 믿는 바람에
거짓일지도 모르는 애인의 흐느낌을 온 마음으로 듣다 허리가 접혔다

사람은 사람을 그 접힌 허리로 낳는 것이라 했다" (2018. 12)



이 세상엔 '슬픔'보다 위대한 것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탈이다. 나는 슬픔을 논하지 않으면 도저히 스스로와 내 글을 설명할 수가 없는 존재라, 온갖 청승을 떠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아 자주 부끄러워진다. 분노나 사랑, 고독이나 희망은 위대해질 수 있다.

그러나 '슬픔'은 슬픔일 뿐, 위대하기는커녕 그 자체를 설명하기도 곤혹스럽다. 짙었던 게 옅어지고, 물컹거리던 게 질겨진다. 그 반복이다. 식은땀처럼, 끝내 홀로만 아는 초라한 오한 같은 것이다. '이 변변찮은 슬픔' 때문에 허리가 접히다 못해 끊어질 것 같았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어린 시절, 집으로 놀러 오려던 친구들을 따돌리려 다른 집 대문으로 뛰어 들어가 그 집 화분들 사이에 숨어 '가난을 창피해했다는 것'을 수치스러워했을 때. 전교 1등을 놓쳐도 아무렇지 않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버렸을 때. 만원 버스 안에서 내 엉덩이를 추행했던 사람이 몇 년 후, 휠체어를 탄 채 옆을 스쳐 갔을 때. 수년을 만난 사람과 헤어졌는데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유로워서 그게 허탈했을 때. 동생의 우울증을 위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더는 없음을 실감했을 때.

월파越波. 파도가 차올라 해안 방파제와 부딪쳐 뛰넘는 모양. 조용히 거대한 물덩어리에 쓸려가야 하는 몸. 때론 그 물덩어리가 핏덩어리로 모습을 바꾼다. 물이 됐든 피가 됐든 어쨌거나 심연으로 가라앉으면 결국 내가 마주하는 건 고요한 암흑. 그게 침상같이 아늑할 때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반드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다시 새로운 슬픔 앞에 우뚝 서기 위해. 이제 달라진 게 있다면, 나 같은 사람은 슬픔을 통과하지 않으면 분노도, 사랑도, 고독도, 희망도 품을 수 없음을 안다는 것. 슬픔이 내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울음을 믿기로 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살기로 했다. 아, 시원하다. 그래, 살아낸다! 늘 '섣부르게' 오는 슬픔이고 그래서 쉽게 고꾸라지는 것이 부끄럽지만, 나를 믿어버리면 그만. 그럼 삶이 되겠지. '허리가 자주 꺾이는 사람들/ 그래도 부러질 수 없었던 사람들'. 맨 위에 옮긴 내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무력해도, 무심하고 싶지 않았나 보다. 가난이, 꿈이, 폭력이, 사랑이, 병이 나를 기만하고 속이더라도 온 마음으로 사는 게 아름다우리. 이상해도, 결국 아름다우리.


[김해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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