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썰썰] 빠순이 청산기 EP2. 그와 나의 거리

안녕, 나는 너를 아는데 너는 날 모르지
글 입력 2019.04.20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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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빠순이 : 연예인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따라다니는 여성팬을 비하하는 멸칭.

 

덕후's Checklist
 

공개 음악방송 일주일에 2번 이상 참여

스트리밍은 숨 쉬듯

팬싸인회 당첨을 위한 앨범 대량 구매

굿즈 모으기 - 공식 굿즈는 두 개씩 (관상용, 소장용)

공개 팬싸인회면 당첨되지 않아도 얼굴보러 가기

온라인 덕질메이트와 오프라인에서 친목하기

평소에 사지 않는 비싼 물품 조공

최애가 간 곳을 다니는 더쿠투어

최애 욕하는 팬들과 Fight

피의 쉴드 또는 묵인



아이돌을 덕질하는 방법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최애(가장 사랑하는 멤버)만 사랑하는 개인팬, 모든 멤버를 골고루 사랑하는 올팬. 최애와 차애 순서로 애정도가 나뉘는 피라미드형 팬.


개인팬은 여기에서 또 덕질 스타일이 나뉜다. 최애를 이성으로 좋아하는 '유사연애'형, 최애의 실력이 성장하는 것으로 재미를 찾는 '성장'형, 혹은 '커리어'형. 최애의 흠을 비롯한 행동을 까면서 덕질하는 일명 '까빠'. 최애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를 배척하는 악성 개인팬, 줄여서 '악개'. 최애를 신격화하여 '최애 말이 모두 정답이다.' 종교처럼 여기는 '교주'형. 최애를 자식처럼 키운다고 생각하는 '맘'형.


덕질의 형태는 각양각색이라 어떤 것이 정답이고 어떻게 해야만 한다는 공식은 없다. 개인마다 추구하는 덕질이 다르기도 하고. 나는 이 중에서 개인팬이자 성장형, 맘형이었는데 신인인 최애의 파릇파릇한 신선함과 열정을 보는 재미로 덕질했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모습이 마치 내가 키운 것처럼 뿌듯하고 좋았다. 말하자면 '지갑으로 키운 내 새끼'였다.


아무리 덕질 스타일이 다양해도 이를 총망라한 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로 위에 작성한 체크리스트. 자신을 빠순이라고 자조할 정도로 열성팬이라면 해당하는 항목이 많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빠순이는 절대 남을 지칭하지 않는다. 빠순이란 단어는 내 새끼에게 한없이 헌신하는 자신을 자조할 때 쓰는 단어이다. 아니면 덕질메이트끼리 처지를 한탄할 때 감히 빠순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수 있다. 내가 아닌 남이 나를 빠순이라고 부르는 건 아니 될 말씀.)




# 피의 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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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속해있던 팬덤의 세계엔 지켜야 할 불문율이 있다. 첫째, 최애에게 부정적인 언급 금지. 그가 뭘 잘못했든 실망을 줬든 쓴소리를 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쓴소리를 하되 공개적인 곳에선 하지 않는 게 낫다. 팬들 말고도 눈이 많은 트위터에선 더욱 그렇다. 특히 최애의 사진을 단 프로필로 할 수 있는 부정적인 언급은 없다. 그랬다간 자신도 모르게 뒤에서 조리 돌려지며 조롱당하고 있을 확률 95%. 비판하려거든 속으로 하거나 조용히 삭여야 한다.


둘째, 잘잘못이 애매한 일은 무조건 회사 탓. 일이 공론화되기 전에 어떻게든 내 새끼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든다. 쉬쉬하면서 입막음하다가 자칫 일이 커지면 그때야 "내 새끼는 잘못 없어!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했단 말이야".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다른 팬덤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만 당시 우리 팬덤은 저 사항을 지키지 않으면 신나게 조리돌림 당했다. 나 또한 그게 무서워서 묵인한 적이 있다. 최애의 그룹이 후속곡을 내고 컴백 신호탄을 쏘아 올렸을 때다. 신곡 뮤직비디오가 나오기 1분 전, 트위터 타임라인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연 뮤비는 김이 팍 샐 만큼 별로였다. 곡이 구린 것과 상관없이 뮤비 내용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 도구화한 것은 물론 감독의 이상한 여성관을 그룹 멤버들이 연기하고 있어서 무척 자극적이고 불쾌했다. 단지 나만 느낀 문제는 아니었다. 팬덤의 9할을 차지한 여성들은 뮤비가 지극히 여성 혐오적이란 것을 빠르게 캐치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 막 시작한 그룹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주진 못할망정 비판을 한단 것은 팬덤 내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나를 비롯한 팬들이 눈가리고 아웅하는 사이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대형 커뮤니티 곳곳에서 공론화되었다. 그때마다 팬덤의 항변은 똑같았다. "우리 애는 잘못 없어". 혹시라도 내 새끼에게 불똥이 튈까 다급히 변명부터 꺼내고 마는 꼴이 추했다. 하지만 내 마음 한켠에는 최애를 감싸고 싶은 마음이 드글거렸다. 그래서 나는 최애를 감싸는 방패부터 들었고 이런 내 모습에 스스로도 혼란했다. 자칭 페미니스트란 사람이 남자아이돌 때문에 여성 혐오를 방관하고 졸지에 동참하고 있는 꼴이라니.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 새우젓도 감정은 있다



팬사인회를 다녀와서 탈덕하는 덕후들이 많다고 한다. 일명 '팬싸 탈덕증후군'. 이 가상의 증후군은 덕후들 사이에선 유명한 불치병이다. 좋아하는 연예인의 팬사인회를 다녀와서 모종의 우울감과 허탈함, 실망감을 느끼고 탈덕까지 하게 되는 무시무시한 증상이다. 문제는 딱히 어떤 원인이 있는 것도 아니란 것이다. 연예인의 태도나 팬서비스가 나쁘지 않아도 이 증상을 느끼는 팬들이 많다.

 

원인은 수많은 팬 사이에서 스타를 바라볼 땐 느끼지 못한 스타와 팬의 관계를 일대일 대면을 통해 실감하기 때문이다. 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 멤버당 대략 30초. 그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사랑과 덕력을 뽐내야 한다. 그러나 수십만원을 써서 팬사인회를 온 팬의 입장과 생판 남인 수백명을 상대해야 하는 스타의 입장은 차이 날 수밖에 없다. 그런 입장 차이와 더불어 스타도 사람인지라 모든 순간에 적극적이고 진실할 순 없다. 365일 제 연예인을 관찰하는 팬이 그걸 놓칠 리도 없고 말이다. 그 잠깐의 감정이 얼굴에, 태도에 드러나는 순간 팬은 서운함과 허탈함, 거리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 감정을 현실 자각타임, '현타'라고 부른다.


사실 모든 덕후는 안다. 자신은 한낱 새우젓 속 새우보다 못한 존재감이란 것을. 나도 그랬다. 잘 알고 있었다. 공연장을 채우는 수많은 검은 머리 중 나라는 일개 팬을 알아봐 줄 거란 생각은 꿈에서조차 하지 않았다. 항상 인지하고 있었는데, 하루에도 수백번 마주하는 내 아이돌에게 나는 언제나 초면이란 것을.


그러나 어떤 일이든 간에 생각만 하는 것과 실제로 맞닥뜨리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는데도 현실의 최애에게 확인사살 당하는 것은 덕후에게 치명적으로 잔인하다.


좀 더 솔직해져 볼까. 단순히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낯섦만이 있어 충격받은 건 아니다. 그 눈에서는 초면인 나를 어색해하는 감정과 너무 긴장해서 빠르게 말을 내뱉는 제 앞의 여자가 빨리 지나줬으면 하는 귀찮음, 어쩌면 영혼이 나가버린 공허함까지 엿보았다. 눈빛뿐이었나? 성의 없이 내뱉는 "아 정말요?". 그 말만 세 번은 들은 것 같다. 진심을 내뱉는 내가 얼마나 초라한지.


말로는 내가 키운 내 새끼 어쩌고 하며 바랄 게 없다고 했지, 알고 보면 '내가 해준 게 얼만데. 너를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데.' 하며 엉뚱한 책임을 그에게 미뤘던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더 그의 텅 빈 눈이 따가웠고 성의 없는 대답이 아니꼬웠을지도.

 

 


# 탈덕



꿈 같은 순간에 현실로 차원이동 당한 나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어떻게 다른 멤버들을 상대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고 집에 돌아와서도 멍했다. 후기를 알려 달라는 덕질메이트의 재촉에 당시 상황을 되짚었는데 딱히 대화란 것을 한 기억이 없었다. 그의 텅 빈 눈과 어색한 몸짓, 그놈에 “아 정말요?”만이 뇌리에 남았더라.
 
작은 충격은 큰 파장을 몰고 온다. 잠깐의 감정인 줄 알았던 우울감은 꽤 오래돼 덕질을 하는 도중 문득 생각이 나 괴롭게 했다. 여느 때처럼 최애를 보러 방송국에 가는 것도, 길바닥에서 시간을 버리는 것도 점점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고 고생 끝에 최애의 무대를 봐도 그전처럼 행복하지 않았다. 아주 천천히 끌어오르다 온기를 오래 머금을 가마솥인줄 알았던 내 마음은 팔팔 끓는 커피포트였고 공급되던 전기는 그날 이후 끊겼다. 어째서 가장 열망하던 것을 하고 나면 성취감보다는 생각보다 별것 아니란 허무함이 앞서는 걸까.
 
우리가 응원하던 그룹은 햇병아리 신인이었지만 팬들은 결코 신인이 아니었다. 여러 아이돌 덕질을 겪고 이 그룹에 정착한 덕질 만렙을 찍은 고인물이었다. 오래된 덕질 경력에 맞게 팬덤 연령대는 20대 초반부터 30대 초반. 신인그룹치고 굉장히 높은 편이었다. 나잇대가 어찌됐든 존중받아야 할 고객의 입장에서 방송국의 고객 대우는 형편없었다. 한 방송사 씨큐는 제 말을 듣지 않는다며 팬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강압적인 행동으로 갑질을 해댔다. 단지 아이돌을 좋아하는 여성들이기에 얕보고 무시하는 것이다. 나는 그 팬싸 이후로 이런 취급을 받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 최애를 응원하러 왔단 이유로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지? 익숙해진 푸대접도 마음이 식으니 억울해졌다. 그때부터 방송국에 발길을 끊었다.
  
빠순이로 취급받는 데에 면역이 있었지만 한번 시작된 현타는 그것을 뚫고 온몸에 전이됐다. 최애를 위해 기꺼이 나의 시간과 돈을 바쳤으나 결국 내게 돌아오는 것은 자괴감과 회의감이란 걸 인정해야만 했다. 작은 모니터에서 그는 매일같이 고맙다, 사랑한다 속삭였고 우리는 끈끈한 유대감이 있는 사이라고 생각했지만 확실히 깨달았다. 유대는커녕 손 뻗으면 닿을수도, 보고 싶다고 볼 수도 없는 사이라는 걸, 나는 언제나 사랑을 퍼붓기만 하는 위치라는 걸. 그동안 느꼈던 감정의 교류란 일방적인 사랑을 주는 나의 착각에서 기인했다는 것.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괜찮다 되뇐 건 정신승리였다는 것을.
 
내가 키운 아이돌, 내가 성장시킨 스타. 그 뽕에 취해 대리 만족하고 희열을 느꼈다. 죄다 부질없는 시간 낭비라고 비하하고 더 후회하기 전에 여기서 그만둬야 했다. 그리고 그맘때즈음 나의 스타는 신인 티를 벗고 인기몰이를 시작했다. 점차 못보던 유입팬들이 늘어나자 내가 아니어도 그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허무함까지 더해졌다. 동시에 질투심, 경쟁심까지 느끼며 그에게서 한 걸음 더 멀어졌다.

그의 성격과 실력을 사랑했으면서 왜 나는 그에게 더 많은 것을 원했나. 사실 내가 사랑한 그의 겉모습은 실제가 아닌 그의 페르소나일지도 모른다. 참 허무하지 않나. 그동안 내가 봐온 그는 어쩌면 내 사랑이 투영되어 만들어진 가상일지도 모르는 일이란게.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었던 결과가 이거구나. 그러나 한편으론 그를 이해한다. 이제 그에 대한 원망이나 섭섭함은 없다. 다만 우리가 ‘우리’라는 단어로 묶이기엔 서로 닿을 수 없이 멀리 있단 걸 온몸으로 느꼈을 뿐.

그의 음악적 재능이 좋았다면 거기서 끝냈어야 했는데 항상 적당히가 어렵다. 뚜렷이 그어지지 않은 선 안으로 빠져들어 한 인간에 환상을 품고 꿈까지 의탁해 숭고한 감정을 품었다. 지금 와서는 우스울 뿐이다. 물론 내 지난 덕질과 감정에 대해서 후회하는 건 아니다. 문제의 그 팬사인회를 간 것을 후회하지도 않는다. 그저 예정된 수순을 밟고 현실로 돌아온 것일 뿐. 그러나 나는 여전히 아주 먼 발치에서 그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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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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