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시대의 물결, 페미니즘 - 연극 '환희, 물집, 화상'

유쾌한 유머와 깊이 있는 통찰력
글 입력 2019.04.19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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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페미니즘’은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조류이다. 연극 <환희, 물집, 화상>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주제를 경쾌하고 매끄럽게 풀어낸다. 연극에서 거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던 중년 여성 둘을 중심에 세웠다. 서로 다른 삶을 사는 두 여성과 또 다른 구/신세대 여성의 경험들이 20세기 페미니즘 이론들과 얽히며 놀라울 정도로 유쾌하게 전개되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 공연 소개 중


‘여성상위시대’와 ‘여성혐오시대’라는 말이 공존할 수 있었던 시기가 또 있었을까. 누군가가 가부장제의 몰락을 이야기하며 이 사회에 “남성혐오”가 만연해 있다고 치를 떨 때 누군가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되어버리는 사회에 환멸을 느낀다.

참으로 모순적이다. 도대체 이 사회는 어떤 사회기에 “남성혐오”와 여성혐오가 공존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 그 전에, 도대체 이 나라는 어떤 나라기에 “남성혐오”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일까. 참으로 신기한 사회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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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이 천만 부를 돌파했다. 2000년대 들어 천만 부가 넘게 팔린 소설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 이 책의 문학적 가치를 따지기 전에, 천만 부가 팔린 소설이 페미니즘 문학이라는 사실을 감각해야 한다. “똑똑해서 재수 없는 여자”는 이제 한 물 갔다. “예민해서 까다로운 여자”가 대세다.

“넌 뭐 그런 것까지 따져? 피곤하게.” “그냥 좀 편하게 살아. 그런 거 다 따지다가 너만 힘들어져.” “아니, 근데 요새 여자가 살기 좋은 세상인 건 맞지 않아?” “요샌 남자가 더 힘들어.” 페미니즘이 시대의 물결로 자리 잡은 세상에서 예민하고 까다로운 여자로 살아남기. 어떻게 보면 현 시대 페미니스트들의 공통된 고민일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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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환희, 물집, 화상’은 페미니즘과 막장 코미디를 엮었다. 진지한 투쟁에서 잠시 벗어나 여성주의를 유쾌하게, 그리고 냉철하게 파헤친다. 그렇다 하여 작품 속 페미니즘의 깊이가 얕은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심도 있는 분석과 고민이 웃음 사이사이에 심어져 있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지적 욕구와 유쾌한 웃음을 동시에 채울 수 있다.

이 극 속에 등장하는 그웬과 앨리스는 구시대 여성을, 에이버리는 페미니즘에 예민하게 감각하는 신세대 여성을 대변한다. 이들은 각각 필리스 슐레플리와 베티 프리단의 여성관과 이론을 기반으로 창조된 캐릭터다. 필리스 슐레플리와 베티 프리단은 20세기 여성의 삶을 대표한 라이벌로, 여성에 관한 의견 차이가 양극단에 위치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필리스 슐레플리는 미국 페미니즘의 제2물결을 견인한 여성운동가로서 <여성성의 신화>의 저자이며, 대표적인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이다. 성평등 쟁취를 위한 여성 파업을 주도하거나 여성이 꽃이 되지 않을 권리를 주창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필리스 슐레플리는 극우 보수 퍼스트레이디로 불리는 정치활동가였는데, 1970년대 미국수정헌법이 양성평등조항을 채택하는 것을 저지했을 정도로 여성 인권에 있어 소극적 입장을 취했다. 그는 여성은 아내이자 엄마로 집 안에 있을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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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이 극은 동시대 양극단에 위치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유머 있게 통찰하며 20세기 페미니즘 이론의 뒤를 밟는다. 이를 통해 ‘환희, 물집, 화상’은 성역할의 정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더불어 자유주의 페미니즘뿐 아니라 급진주의 페미니즘, 그리고 오늘날의 욕망과 도착을 다루는 페미니즘까지, 여성주의의 모든 흐름을 아우른다.

깊은 내용을 다루는 만큼, 렉쳐 퍼포먼스라는 형식을 극에 차용하여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강의에 시청각 자료로 활기를 불어 넣는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인물의 성격, 행동, 그리고 인물들 간의 관계에 대해 보다 자세히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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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21세기 한국의 페미니즘이 지나치게 급진적이며 폭력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유리창도 깨지 않고 돌도 던지지 않았는데 어디가 폭력적이라는 것인지 조금 의아하나, 확실히 논의가 다양하게 확장되는 경향이 뚜렷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이제 낙태죄도 그 수명을 다했고, 성희롱과 성폭력 피해자가 음지로 숨지 않아도 그를 단죄하지 않으며, 문화예술에서도 여성 이슈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고 있다.

바다 물결이 실어 나르는 것 중에는 필요 없는 물건도 있을 테고, 진주를 품은 조개도 있을 것이다. 커다란 물결 속에 쓸모없는 종잇조각이 한둘 섞였다 한들, 우리는 파도를 탓하지 않는다. 쓰레기를 버린 우리 자신을 탄할지언정 왜 파도가 저렇게 크게 일어서 쓰레기를 운반하느냐고 불평하지 않는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지, 왜 움직이고 난리냐며 바다에게 죄를 묻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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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도 마찬가지다. 그 어떤 운동도, 그 어떤 학문도, 그 어떤 사람도 완벽할 수는 없으며 목적지를 유토피아에 조준해서도 안 된다. 그저 오늘보다 조금 더 평등한 내일, 이 시대보다 조금 더 숨통 트이는 다음 세대를 바라보며 한 걸음씩 걸어갈 뿐이다.

그 걸음의 속도는 모두가 다르기 마련이고, 그 누구도 개척하지 않았던 길을 조금씩 개척할 적이면 크고 작은 다툼도 일기 마련이다. 파도에 운반된 돌멩이나 종잇조각을 보며 파도를 탓하지 않듯이, 우리는 페미니즘 물결이 싣고 온 갈등이나 불편함을 보고 여성과 여성주의를 탓해서는 안 된다. 불편함을 불편하게 여길 수 있게 된 것도 그 물결 덕이기 때문이다.

한 쪽으로 기울어진 시소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반대쪽에 더 큰 힘을 가해야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똑바로 서기 위해서는 더 큰 노력을 부어야 한다. 투명하지만 단단한 유리천장을 뚫기 위해서는 더 키를 키워야 한다. 더 이상 이런 잉여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 때까지 페미니즘은 계속되어야 하고, 예민함은 더 날카로워져야 하며, 불쾌함은 더 불편해져야 한다.

‘환희, 물집, 화상’이 주목하는 유쾌한 페미니즘이 단순히 웃음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웃음 속에 날카롭고 냉소적인 비판을 내재하듯, 우리는 더 용기를 가지고 불편해져야 한다.


공연개요

공연명 : 환희, 물집, 화상
장  소 : 산울림소극장
기  간 : 2019년 4월 17일(수) - 5월 5일(일)
시  간 : 평일 8시 / 주말 6시 (월 쉼) * 5월 1일 노동자의 날 8시 공연

제  작 : 프로덕션IDA + 극단 기일게
만든사람들 : 작 지나 지온프리도 / 번역 정윤경 / 연출 김희영
무대 모재연 / 조명 한원균 / 영상디자인 하트피플 / 음악 루크사운드 / 분장 임영희
조연출 곽정화, 이도연 / 그래픽 황가림 / 기획 나희경



시놉시스

대학원 룸메이트였던 캐서린과 그웬은 졸업 후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다. 캐서린은 더 큰 꿈을 위해 런던으로 떠나고, 고향에 남은 그웬은 결혼을 해 가정을 이룬다. 시간이 흘러, 유명 학자가 된 캐서린은 어머니 앨리스의 심장발작 소식을 듣는다. 문득 불안과 외로움을 느낀 캐서린은 안식년을 맞아 고향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길 결심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캐서린은 그곳에서 페미니즘 강의를 시작하지만 강의를 신청한 이는 그웬과 그녀의 베이비시터인 에이버리 둘 뿐, 전업주부로써 현재 자신의 삶을 부정당하고 싶지 않은 그웬과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에이버리는 수업마다 열띤 토론을 벌인다. 그들과 함께 토론하던 캐서린은 문득 자신이 정말 원했던 삶이 무엇인지 고민에 빠진다. 수업이 진행될수록 서로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한 교감을 느낀 캐서린과 그웬은 결국 위험한 자리 바꾸기 게임을 시작하기로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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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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