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뭉클한 인터뷰 [사람]

글 입력 2019.04.17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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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우리'를 위한 당신의 아침


엄마의아침1.jpg


새벽 다섯 시, 첫 발소리.

곧이어 찬물로 정신을 깨워내는 소리.
타닥타닥 냄비에 불을 올리는 소리.

그리고 ... 취사가 시작되었습니다.


28년째 우리 집의 아침을 여는 사람, 나의 엄마에 의한 소리다. 해가 뜨고 나서 잠자리에 들거나 그마저도 깊은 수면에 빠지지 못하는 요즘에서야 엄마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에디터를 직업으로 삼으며 지금까지 80명 이상을 만나고 인터뷰했다. 상대적으로 밖에서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집에 들어오면 입을 꾹 닫았다. 그러다 문득 일면식 없는 사람들의 삶은 그리 궁금해하면서, 가족들과는 가벼운 일상조차 나누지 않고 있다는 것이 애석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무뚝뚝한 딸이자 손녀이자 동생, 누나인 나는 가족 에세이(인터뷰)를 작업한다는 빌미로 가족들의 일상에 한껏 궁금증을 표하기로 했다.

오늘은 유독 발소리가 무겁게 들린다. 나는 지금 잠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다가, 금세 반쯤 감긴 눈을 비비고 일어나 엄마가 있는 주방으로 향한다. '그래, 첫 인터뷰이는 엄마로 하자.'



#1


쿠쿠, 쿠쿠, 열심히 일하는 전기밥솥 소리가 정적을 깨운다.

"엄마 벌써 밥해? 아직 해도 안 떴는데..."

"얘는 새삼스럽게 뭘 이런 걸 물어. 항상 다섯시에서 다섯시 반 사이엔 일어나지."

"아... 매일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구나. 그럼 엄마의 아침 스케줄은 어떻게 되는데?"

"엄마는 다 그래. 일어나서 제일 먼저 손 씻고 세수를 해. 밥에 눈곱 떨어지면 안 되잖니? 가끔은 몽롱한 상태로 바깥을 쳐다보면서 멍 때릴 때가 있기도 하고. 그리곤 밥을 안치고 국이 끓는 사이에 샤워하고 나와. 밥이 다 되면 신랑 도시락을 싸고 아침밥을 차리고 가족들이 밥 먹는 동안 출근 준비를 해. 그래서 난 밥을 호다닥 먹어야 해."

십여년 전, 내가 고등학교를 입학할 무렵 아빠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개인택시를 시작했다. 그는 택시 일 이전에도 업무 특성상 식사 시간이 일정치 않았다. 그렇기에 남편 끼니 걱정으로 시작된 엄마의 '신랑 도시락 싸기' 프로젝트는 아마 내 기억이 닿는 시점쯤 부터 시작되었을 테다.

"엄마 대단하다, 매일 도시락 먹는 아빠도 힘들겠지만 그걸 만드는 일도 만만치 않을 거 같아."

"아무래도 그렇지. 밥을 동글동글 뭉쳐서 주먹밥 여섯 개를 만들어. 각각 다른 색으로, 맛도 다르게. 이렇게 하면 한 끼에 적어도 반찬을 네다섯 개는 먹을 수 있으니 나름 영양도 챙기는 셈이지. 그리고 일하면서 배고프지 않게 틈틈이 먹을 수 있게끔 과일이랑 떡이랑 물도 같이 챙겨줘. 이렇게 도시락 싼지도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가네. 너희 아빠는 매일 똑같은 주먹밥이어도 항상 맛있대. 그래도 질릴 수 있으니까 조금씩 다르게 싸주려고 나름 연구도 하는데 그게 엄마한텐 재미이자 기쁨이야."



#2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전기밥솥이 마지막 소리를 내고 떠나자 부시럭부시럭 가족들이 일어나는 소리가 다시 정적을 깨운다.

"음~밥 냄새! 지금 여섯시 반인데 벌써 밥 먹어?"

"그럼. 내가 일곱시 반 전엔 나가야 하니까. 두 시간 만에 이걸 다 하려면 잠시 앉아있을 틈 없이 바빠. 그래도 다행히 신랑이 역까지 태워다 주고, 가끔은 직장까지 데려다주기도 하니까 조금 여유가 있기도 해. 예쁜 신랑이지."

나는 분주하게 밥을 차리는 엄마를 살짝 거들며 귀찮게 계속 말을 덧붙인다.

"우리 엄마 엄청 바쁘네. 엄마도 유난히 힘든 아침이 있을 텐데..."

"유난히 힘든 날? 그런 건 없는데.. 여름엔 좀 힘들지. 작년 여름엔 워낙에 더웠잖아. 자다가 자주 깨니까 더 피곤함을 느끼기도 했고 또 음식이 잘 상하니까 가족들이 당일에 먹을 수 있는 반찬이랑 국을 만들어두고 출근했어. 그래도 이제 너희가 다 커서 옛날 같진 않아. 옛날엔 너희 삼 남매 차례로 깨우고 쫓아다니면서 밥 먹이고 학교 보내고 했으니까. 게다가 밥 먹는 시간도 제각각이라 아침에만 밥을 두세 번 차린 적도 있어. 그래도 네 언니가 밥을 두 공기식 먹고 가서 참 예쁘고 뿌듯했어. 참, 넌 밥을 워낙 안 먹으니 걱정이다. 조금이라도 먹으면 밥 맛있게 해줄게."

"그 말만으로도 배부르다. 엄마 오늘 퇴근하고 뭐 할래?"

"일단 집에 들어오면 엄마라는 직업에 다시 출근하는 기분이야. 두 개의 직업에서 완전히 퇴근하고 싶어. 지금까지 해온 게 피곤하거나 싫었다는 건 아니야. 다 식구들을 위한 일이니까. 그래도 요즘은 잠깐의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네. 종일 혼자 있어 보고 싶기도 하고... 이런 표현은 좀 이상한가? 아무튼, 질문이 왜 이렇게 많아. 그만하고 이거 간 좀 봐봐. 짜니?"





메뉴 설정에 따라 고슬고슬한 쌀밥, 되직한 죽 그리고 누룽지를 만들어내는 전기밥솥처럼, 엄마는 스스로 아니 가족들에 맞춘 설정에 따라 다양한 일을 해낸다. 푸우욱 소리를 끝으로 전기밥솥은 할 일을 다 마치고 퇴근하지만, 엄마의 아침 엄마의 하루에는 퇴근이란 것이 없다.

28년간 이어진 엄마의 아침은 나에겐 늘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에서야 이 틈 없는 아침을 늘 본인의 역할이라 새기고 한 번의 불평 없이 묵묵하게 지속해온 엄마의 곁에서 그저 난, 익숙함에 숨어 애써 엄마의 고단함을 모른척했던 무심한 딸임을 알게 되었다. 더하여 너무나도 담담한 엄마의 목소리, 말투 그리고 표정이 내 마음을 더 먹먹하게 만든다.

그리고 난 오늘의 대화를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뭉클한 인터뷰'라 칭하게 되었다. 엄마의 시간과 시선을 따라간 인터뷰는 내게 뭉클함과 총 17분 분량의 엄마의 음성을 녹음 앱에 남겼다.



에디터 김선영_네임택.png
 

[김선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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