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ROTEA] JUSTICE11: 건강한 개인이 줄 수 있는 사회의 '올바른 몫'

글 입력 2019.03.30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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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ROTEA] JUSTICE11

건강한 개인이 줄 수 있는 사회의 '올바른 몫'


숫자 11(Hendeka)는 속죄와 심판을 상징하는 수로, 어원상 '하나가 넘친다' 또는 '하나가 남는다'는 매우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10을 완결된 완성수로 생각했기 때문에 11은 지나침을 의미하는 불필요한 수이며 충만하고 완전한 수 10에 하나가 추가된 것은 조화와 논리에 반하는 교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반대로 11은 5와 6, 곧 지상과 천상이 결합된 수우주와 대우주의 위대한 결합이라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결합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전 단계를 거쳐야 한다.

성경에서는 11을 심판의 수로 다룬다. 성경에서는 창세기에서 시작해 요한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심판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첫번째 심판은 카인의 살인 행위(창세 4:11), 두번째 심판은 노아의 홍수(창세 7:11), 세 번째 심판은 가나안 열한 명의 아들들(창세 9:25), 네 번째 심판은 바벨탑의 붕괴(창세 11:7) 이다. 이외에도 소돔의 멸망, 이집트에 대한 열 한가지 심판, 이스라엘의 11년간의 통치 후의 멸망이 그렇다.


혹자는 유다의 배신으로 제자의 수가 11명이 되었을 때 예수가 못박혔을 때의 나이가 33세(3*11)임을 고려하여 "예수님께서 돌아가심은 삼위일체인 하느님께서 우리가 받을 심판(11)을 가져가셨다"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심판은 결국 속죄와 회개를 통해 구원을 바라게 한다. 가톨릭 전례에서도 11월은 위령성월이다. 위령성월이란 먼저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달로, 그리스도인들은 속죄와 심판의 달인 11월에 돌아가신 영혼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면서 죽음 앞에 있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회개한다.

정의를 의미하는 카드가 11번에 위치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필자는 후에 나올 <심판> 카드와 고려해, <정의>카드를 가톨릭에서 말하는 세계와 인류에 대한 심판보다는 인류의 조화와 평화를 위한 체계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가톨릭에서 비유되는 11의 반성과 조정의 의미에는 공감한다. 운명의 수레바퀴, 즉 10번 카드는 최종적인 완성과 종착지인 세계를 의미하는 21과 마찬가지로 원 띠 속에서 날개를 펼치며 충만감을 표현하고 있다. 어설퍼 보이지만 완성되어있는 우주의 원리에서 한발자국 나아간 인간은 다시 조화를 위해서 칼과 저울을 꺼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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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심판과 일곱 가지 자비 - 바렌트 반 오를리

1520년경, 패널에 유채, 248x218cm(중앙)

248x94cm(양쪽 날개), 안트베르펜 왕립 미술관


한국인들은 정의에 목말라 있다. 똑같은 교육체계와 콘크리트 같은 경제구조 속에서 그 누구보다 공정성을 바란 이들은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베스트 샐러로 만들었으며, 수저론이나 죽창이라는 농담을 만들어냈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는 평등이 중시되는 오늘날 더 중요시 여겨지는 가치다. 정의에 대해 울피아누스는 '각자에게 그의 몫을 돌려주고자 하는 항구적인 의지'라고 설명했으며, 존 롤스는 '정당화될 수 없는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로마 신화의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는 눈을 가리고 칼과 저울을 들고 있다. 검은 법의 엄중함과 사법의 권위와 권력을 나타내며, 저울은 법의 공정함과 고영함을 상징한다. 그녀는 법의 공정한 판단을 위해 눈을 가리고 있다. 카드를 보자마자 아마 당신은 이 유스티티아를 떠올렸을 것이다. 유스티티아(Justitia)는 법정 앞에 서있는 동상의 원형이자 영단어 정의(justice)의 어원이다. 오늘 볼 카드도 유스티티아와 닮아있다.

먼저 정의 카드 양쪽에서 균형을 잡아주고 있는 두 개의 회색 돌기둥은 앞서 교황 카드에서도 등장한 것이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립, 균형, 조화, 중재의 의미와 함께, 회색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감정을 억누르는 작용을 하는 색이다. 그 기둥 사이에는 보라색의 베일이 걸쳐져 있다. 보라색은 영적인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믿어져 왔으며 열정의 붉은 색과 냉정의 파란색의 중간 색이기도 하다. 베일 두편에는 무언가 가려진 채 노란 오로라를 내뿜고 있다. 이는 정의 카드의 인물을 수호하고자 하는 고귀하고 귀중한 무엇이다. 앞에 배치된 인물은 여성과 남성의 중간처럼 보는 중성적인 인물이다.

머리에 올려진 왕관은 그가 내리는 결정에 권위와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한다. 왕관 가운데 박혀있는 파란색 보석은 그가 개고간적이고 합리적이며 냉철한 이성으로 판단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대조적인 색을 띠는 붉은 옷은 그 판단에 대한 집행은 열정저긍로 힘 있게 이루어질 것임을 나타낸다. 어꺠에 둘러진 망토와 내의는 만인의 행복을 바라는 평화로움을 바라는 긍정적 사고와 미덕을 의미한다. 긴 옷 아래에 내밀어진 한 발은 인물의 실천력을 의미한다. 검은 마이너 아르카나와 마찬가지로 진취적인 권위와 냉정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의미한다. 저울은 객관적인 기준으로 공정하고 공평하게 판단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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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아래와 같은 일화를 피험자들에게 들려주었다. 줄리와 마크는 친남매다. 대학생인 둘은 함께 프랑스를 여행하던 중에 섹스를 했다. 어떤 강제도 없는 합의였다. 목격자는 없고, 피임은 완벽했고, 둘 다 성인이며, 불쾌함 없이 즐겼다. 둘은 남에게 말하거나 다시 섹스를 시도할 생각은 전혀 없다. 이후에 둘은 어색해지지 않고 더 친밀한 남매가 되었다. 자 그러니까, 피해자가 아무도 없다. 이 섹스는 잘못일까?

이처럼 그는 ‘누구에게도 해롭지 않지만 금기를 위반하는 이야기’를 잔뜩 만들어서, 세계를 돌며 여러 문화권 사람들을 조사했다. 사람들은 우선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이야기 했지만, 무해한 결과에 따른 이유에 대해 자세히 말하기 어려워했다. 이 때 사람들은 이야기의 설정을 벗어나서라도 어떻게든 피해자를 만들어냈다. “스스로 알아채지는 못해도 영혼 깊은 곳에서 죄책감으로 상처받을 것입니다” 조너선 하이트는 이성과 감정이 서로 독립적인 공통 통치자와 같다는 견해를 지지하기 위해서 연구했지만, 그가 진행한 실험에서 사람들은 순식간에, 그리고 감정적으로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이를 정당화할 이유를 찾기 위해 사후에 도덕적 추론을 했다.

이 과정은 ‘코끼리와 기수’의 비유로 설명되어진다. 기수는 통제된 인지 과정을, 코끼리는 자동적 인지 과정을 상징한다. 기수는 도덕적 추론을, 코끼리는 도덕적 감정을 포함한 도덕적 직관을 의미하는 것이며 기수는 코끼리의 시중을 든다는 하이트의 설명은 결국 도덕적 직관이 도덕적 추론보다 앞서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결과는 복잡한 사고를 낳는다. 아무리 논리적이어도 우리의 코끼리는 강아지의 흔들리는 꼬리처럼 먼저 반응하기 때문이다.

심판, 평등, 정의. 무엇이건 참 거창한 주제다. 여기에 대해 자유롭게 쓸 수 있느냐 묻는다면, 사실 필자도 잘 모르겠다. 정의는 무엇이고, 가능한 것인가? 우리의 도덕적 이성은 코끼리에 끌려다니는 기수에 불과하지 않는가. 가능하지 않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회의 정의를 관철시킬 수 있는가? 니체는 법치를 통해 정의가 잘 구현될 수는 있지만, 법이 정의구현만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심지어 정의에 반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시대가 변하고 윤리의 범위가 좀 더 세밀해지면서 법은 때로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법이 정의를 수호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뉴스를 볼 떄마다 이미 너무 많은 증거들을 보아왔다. 니체는 법적 정의를 넘어선 사회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로지 건강한 개인이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결국 니체는 정의의 구현을 개인의 의지적 노력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이 의견에 동의한다. 칼과 저울을 든 정의 집결자는 다른 곳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이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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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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