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뮤지컬 <엘리자벳> 리뷰: 진짜 엘리자벳은 어디에? [공연예술]

글 입력 2019.02.22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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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작품의 직접적인 내용 일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최근 서울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에서 공연된 뮤지컬 <엘리자벳> (이하 <엘리자벳>)이 2월 10일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엘리자벳>은 이후 대전, 광주, 부산, 수원 등 8개 도시에서도 공연될 예정이다.


<엘리자벳>은 <모차르트!>, <레베카> 등 다수의 흥행작을 쓴 작가 미하엘 쿤체와 작곡가 실베스터 르베이 콤비의 작품으로, 국내에서는 2012년 초연됐다. 오스트리아 역사상 가장 아름다웠던 황후 엘리자벳 폰 비텔스바흐를 주인공으로 하여, 생의 끝자락에서 죽음을 선택할 때까지 자유를 갈망하던 엘리자벳의 삶을 그린다. 초연부터 누적 관객 15만명을 동원하고, 2013년 앙코르 공연 당시 97%의 객석 점유율을 기록하는 등 대성공을 거두며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은 작품이기도 하다. ‘죽음’ 역을 맡았던 김준수 배우의 티켓 파워를 감안하더라도, 작품 자체의 흥행성 없이는 불가능했던 기록이었다.


실제로 <엘리자벳>은 화려한 무대와 중독성 강한 넘버, 비교적 탄탄한 역사적 고증으로 오랜 시간 호평을 받았다. <엘리자벳>에 참여한 배우들은 그해 시상식을 휩쓸었다. 2018년도의 <엘리자벳>은 극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죽음’ 역에 아이돌 출신 배우만을 캐스팅하는 문제로 개막 전 논란을 빚었지만, 개막 후 해당 배우들이 보여준 기대 이상의 연기력과 안정적인 가창력 덕분에 관객들의 원성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더불어 주인공 엘리자벳 역에 옥주현, 김소현과 함께 베테랑 뮤지컬 배우 신영숙이 새롭게 합류하게 되면서 2018 <엘리자벳>은 관객들의 기대감을 높였다. 또, 공연 기간 중 공개된 뉴캐스트의 뮤직비디오와 무대의상 제작 영상도 관람을 망설이고 있던 예비 관객들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다. 개막 전 작은 소음에도 불구하고, 2018 <엘리자벳>은 흥행에 자신이 있는 듯했다. 여태 잘해왔듯, 이번에도 질 높은 공연으로 관객의 마음을 울릴 채비를 마친 듯 보였다.


필자가 2월 초 <엘리자벳>을 찾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6년간 <엘리자벳>을 찾은 관객의 수가 공연의 질을 방증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공연은 화려했다. 무대의상은 관객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고, 넘버도 익히 알려진 대로 만족스러웠으며, 배우 한 명 한 명의 연기도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모두 출중했다. 특히 필자가 본 루케니 역의 박강현, 엘리자벳 역의 옥주현, 대공비 소피 역의 이소유 배우의 연기와 노래는 훌륭했다. 루케니를 극의 해설사로 설정하는 등 작품이 행한 영리한 선택들도 주목할 만 했다. 아울러 초연 때부터 ‘죽음’ 역으로 큰 인기를 얻은 김준수 배우의 역량도 확인할 수 있었던 공연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아쉬운 점이 많은 작품이었다. 특히 주인공 엘리자벳을 묘사한 방식에 있어서는 실망감이 컸다. 앞서 언급했듯 엘리자벳은 갑갑한 궁정 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기를 갈망하는 인물이다. 일생동안, 그리고 죽어서도 국민들의 뜨거운 사랑과 관심을 받았던 인물이지만, 정작 그녀는 궁정의 감시와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쓸쓸한 인생을 살았다. 작품은 이러한 엘리자벳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시간을 주기보다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 그녀가 또다시 갇히게 했다.


간단히 말해 <엘리자벳>의 주체는 엘리자벳이 아니다. 작품의 제목이 캐릭터의 이름인 ‘엘리자벳’임을 고려했을 때 적잖이 당황스러운 구조라 할 수 있겠다. <엘리자벳>은 엘리자벳의 자유를 향한 의지나 주체성보다는, 대중에 의해 오랜 시간 소비되었던 엘리자벳의 예쁜 이미지를 인물 관계로, 엘리자벳의 드레스로, 극의 플롯으로 무대에 재현하는 데에 집중한 듯하다.


그렇게 대상화된 엘리자벳의 삶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극중에서 엘리자벳은 늘 타인의 시선에 둘러싸여 있다. 엘리자벳의 삶은 극중 해설사 역할을 하는 루케니를 포함한 타 인물들의 대사와 시선, 넘버를 통해 묘사된다. 엘리자벳이 직접 자신의 욕구에 대해 긴 시간 노래하는 것은 ‘나는 나만의 것’ 넘버를 부를 때 정도이다. 엘리자벳은 시어머니인 대공비 소피에 의해 쓸데없이 자유분방한 며느리로, 황제 프란츠 요제프에 의해 사랑하는 아내로, 황태자 루돌프에게 잔인한 어머니로 설명된다. 엘리자벳이 그들과 맺은 관계 자체가 아니라, 엘리자벳이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할 때에 그들이 엘리자벳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주인공이 엘리자벳인지, 프란츠 요제프 황제인지, 아니면 합스부르크 왕가의 스캔들인지 헷갈릴 정도로 극중 엘리자벳의 비중은 적다. 엘리자벳이 자유를 외치는 넘버 ‘나는 나만의 것’이 그저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위해 삽입되었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특히 엘리자벳과 ‘죽음’과의 관계는 더욱 그녀를 비참하게 한다. ‘죽음’은 엘리자벳에게 반해, 자신만이 진정한 자유를 줄 수 있다며 그녀를 유혹하는 캐릭터이다. 엘리자벳은 일생동안 자유를 그리워하지만, 그것을 쟁취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무기력한 인생을 산다. 엘리자벳은 스스로 세상과 충돌하며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는 혜성과 같은 인물이 아닌, 자유를 얻으러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루케니의 칼에 찔려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했을 때에도, 절망에 빠졌던 엘리자벳은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엘리자벳과 ‘죽음’의 관계가 심지어 '자유'로 연결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작품의 홍보 문구인 ‘죽음마저 사랑에 빠지게 한 아름다운 황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두 인물은 사랑으로 연결된 관계이다. 또 '죽음'이 부르는 넘버 ‘마지막 춤’의 가사 ‘한 여잘 사랑하는 두 남자의 뻔하지만 새로운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황후 엘리자벳, ‘죽음’, 황제 프란츠 요제프는 '삼각 관계'로 설정된다. 그리고 엘리자벳의 시어머니인 대공비 소피는 아들에게 ‘엘리자벳이야 나야?’ 등의 말을 하며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고 황후에게 정신이 팔린 무능한 황제에게 서운함을 표한다. 합스부르크 왕가를 배경으로 하는 극에 지극히 한국적인 고부 갈등과 연인 사이 삼각 관계 이야기를 녹여낸 것은 한국 관객을 겨냥한 제작진의 선택이었을까? 


또한 언급했듯이 죽음’이 엘리자벳과 사랑에 빠진 한 남성으로 설정된 순간, ‘죽음'의 역할도 모호해졌다. ‘죽음’은 신비로움을 자아내고, 음침한 분위기를 드리워 극 전체의 분위기를 형성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강력한 캐릭터이다. 또 죽음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의인화하여 독립된 캐릭터로 만든 것은 아주 매력적인 설정인데, 그러한 매력을 상쇄시켜버릴 만큼 해당 캐릭터가 짊어져야 할 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부족해 보인다.


‘죽음’이 <엘리자벳>에서 사랑에 빠진 남성에 불과했다는 것은 그가 엘리자벳의 아들인 황태자 루돌프에게 보인 모습에서 확실해진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루돌프가 자살을 택했을 때 그의 시체를 거둬가는 ‘죽음’의 모습은 차갑기 그지없다. 그가 괴로워하던 루돌프에게 자유를 주겠다며 설득했던 모습은 기만이었다는 것이 단번에 드러난다. 그러나 엘리자벳에게 ‘죽음’이 보이는 모습은 짝사랑 중인 남성의 모습이다. 이미 연인이 있어 자신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다가, 절망에 빠져 죽음이 간절해질 때만 자신을 찾는 엘리자벳에게 그는 질투 어린 화를 낸다. 또, 엘리자벳이 칼에 찔려 사망한 후 엘리자벳과 '죽음'이 만나게 되었을 때, 두 인물은 엘리자벳이 그토록 원하던 자유가 아닌 '진정한 사랑'을 찾은 존재들로 연출된다. 죽음은 왜 인간을 유혹하는가?’,' 죽음이라는 개념이 인간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등의 고민은 연인의 속성이 부여된 ‘죽음'의 캐릭터 때문에 작품에서 사라져버렸다. ‘죽음’이 고통에 빠진 여성을 구원하는, ‘어두침침한' 백마 탄 왕자님 뿐이 되지 않는 설정이다.


이렇게 <엘리자벳>이 자유가 아닌 사랑과 스캔들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은 상당히 아쉽다. 작품이 개성 넘치는 넘버들은 물론, ‘죽음’이나 루케니와 같은 매력적인 인물들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작품의 제목은 자유를 위한 엘리자벳의 치열한 선택들이 아니라, ‘죽음’에게 사랑받고, 많은 사람들에게 문화적 코드로서 소비된 엘리자벳의 '이미지'를 작품이 보여줄 것임을 드러낸 것이었다. 작품이 묘사하는 엘리자벳은 대중이 기억하는 합스부르크 왕가 스캔들의 상징일 뿐이다. ‘나는 나만의 것’에서 이야기하였듯, 엘리자벳이 원했던 것은 ‘낯선 시선들 속에 자신을 내버려두는 것’이지, 자신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 갇히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엘리자벳이 보는 세상이 아닌, 세상이 보는 엘리자벳을 그리는 이 작품에서 진짜 엘리자벳은 어디에 있을까? 



[이승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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