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욕망의 전차 속 위험한 줄다리기

글 입력 2019.02.22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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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1: 인간은 진보했는가?


어젯밤 영화가 끝나자마자, 같이 본 친구에게 건넨 첫 마디는 ‘인간이 정말 진보한 것 같지 않니?’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에 표현된 18세기 영국의 모습은 정말 기괴했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남자에게 오렌지 껍질을 던지면서 놀고 있는 귀족들, 하녀에게 요구되는 무조건적 복종과 계급에 따라 부여되는 차별적인 인권, 욕망의 전차에 올라타 뒤틀린 삶을 더 꼬아대고 있는 주인공들의 잔상은 내가 당연히 누려왔던 모든 것의 소중함을 체감하게 했다. 하지만, 친구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영화 속 사회와 다르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 물음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를 생각의 의자에 묶어두고 있다.

친구가 내게 그렇게 되물은 이유는, 현대 사회에서 나체로 사람을 세워두고 무언가를 던지는 노골적인 행위가 허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암묵적이고 비유적인 방식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행위를 통해 쾌감을 느끼는 상황이 근절된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욕망과 성취 간의 괴리에서 불행해지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형식적 계급은 봉건주의의 타파와 함께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자들에게 실질적 계급은 여전히 넘어야 할 장애물이다.


과연, 우리는, 그들과 다를까? 다르지 않다면, 인류가 언젠가 지긋지긋한 불평등과 지저분한 욕망과 가식적이고 표면적인 관계로부터 벗어나는 날이 오기는 할까?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질문2: 이 영화 속에 ‘사랑’이 있는가?


영화의 주요 인물은 세 명의 여성이다. 첫째로, 죽은 남편과의 관계에서 17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그들 모두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고자 17마리의 토끼를 키우고 있는 유약한 여왕 앤이 있다. 둘째로, 여왕을 오랫동안 보좌하며 몸이 안 좋은 그녀 대신 실질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동시에, 남편을 전장에 보내고 여왕과 육체적 연인 관계를 갖고 있는 귀족 사라가 있다. 셋째로, 본래 귀족 신분이었지만 집안의 몰락과 함께 창녀로 전락했다가, 사라의 도움으로 하녀 자리를 얻은 뒤 여왕의 총애를 얻어 신분 상승을 하기 위해 애쓰는 애비게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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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비게일은 앤과 사라의 굳건했던 관계에 균열을 내는 존재로 묘사된다. 사라는 마치 언니처럼, 때로는 엄마처럼 엄격하게 앤을 통제하려 하기에, 상처받은 여왕이 원하는 핫초코와 같은 달콤함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사라는 귀족 출신으로, 전쟁 영웅의 아내로, 국정의 권력자로 실패 없는 인생을 살아온 당당하고 매력적인 여자이다. 그러나 시궁창까지 떨어져 보았기에 상처로 점철된 애비게일은, 본능적으로 앤이 원하는 언사와 행동이 무엇인지 안다. 앤의 다리 질환을 완화시킬 약초를 캐오고, 다리를 주무르면서 의도적으로 그녀를 유혹하고, 토끼들을 귀여워하면서 앤의 아픔에 눈물을 머금는 애비게일의 모습은 겉으로 보기에 완벽히 상냥하지만 실상 전부 치밀하게 계획된 행동이다.

애비게일은 결국 야당인 토리당의 당수 할리와 손을 잡고, 사라 쪽 세력이었던 휘그당을 무너뜨린다. 사라는 애비게일이 건넨 독이 든 차를 마시고 매춘굴에서 일어나게 되고, 이후 궁에 돌아오지만 앤에 의해 남편과 함께 외국으로 쫓겨나고 만다. 처음에 나는, 주관 없는 여왕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한없이 아양을 떠는 여인에게 마음을 완전히 뺏긴 나머지 이성을 잃고 내린 결정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해설을 읽고, 그 해설에 매료된 나머지 내 의견을 수정하게 되었다.

이동진 평론가의 해석에 따르면, 유약하고 능력 없어 보이는 여왕은 사실 애비게일과 마찬가지로 권력에 대한 욕심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여왕은 영화의 마지막에 하는 연설에서 원래 읽으려던 원고를 내려놓고 즉흥적으로 할리와 애비게일의 손을 들어주는 모습을 보이는데, 아마 본래 원고에 쓰여 있던 연설은 사라와 그의 측근들을 복권시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사라를 사랑했으니까. 하지만 막판에 결국 여왕이 택한 것은 사랑이 아닌 권력이었다. 숙종이 자주 사용하고는 했던 환국정치의 기법처럼, 집권당을 바꿈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내가 스스로에게 물은 질문에 대한 답을 하자면, 그렇다. 이 영화에 사랑은 있다. 마지막까지 사랑을 지킨 유일한 사람, 사라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앤에게 화가 나서 앤이 자신에게 쓴 연애편지를 신문에 기고하여 세상에 알리고 여왕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말겠다고 폭언을 하지만, 그 말을 하자마자 앤을 해칠 수도 있는 그 편지들을 불에 태워버리고 만다.


‘너는 나와의 싸움에서 졌어’라고 자신을 조롱하는 애비게일에게, 사라는 말한다. 너와 나는, 게임의 목적이 달랐어.



애비게일에게 여왕은 신분 상승을 위한 도구일 뿐이었지만, 사라에게 여왕은 자신의 분신이자 사랑이자 발가락처럼 떼어낼 수 없는 일부였다.

결국 이 영화의 승자는, 사라라고 생각한다. 사랑 없이 무인도에 둘 뿐이 남겨진 애비게일과 앤은 게임에서 졌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상처가 될 사건을 겪기는 했지만, 스스로에게 부끄러울 행동을 하지 않은 채 궁을 아름답게 떠난 사라야말로 ‘더 페이버릿’의 승자다.



질문3: 영화 속 상징들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토끼, 추락, 남성


‘더 페이버릿’은 영화의 미장센, 배우들의 연기력, 다양한 촬영기법 등 내용 외적인 요소들에서도 청중들을 황홀하게 하지만 여러 상징들을 이용해서 스토리를 풍부하게 풀어낸다는 점에서 가장 매혹적이다. 영화의 몇 가지 상징들을, 주관적 관점에서 해석해보고자 한다.


1) 토끼
영화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된다. 앤은 사라에게 자신의 예쁜 토끼들을 좀 보라고 이야기하는데, 사라는 사랑에도 한계가 있다며 그럴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녀는 왜 그런 반응을 보인 걸까?

그건 토끼가 여왕에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를, 사라가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전부 유산, 사산, 이른 나이에의 죽음 등을 통해 잃어버린, 상실의 아픔에 푹 적셔진 여왕의 상처가 현실에서 형상화된 것이 토끼라는 걸 그녀가 절실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사라에게는 그 상처를 직면하는 일이 버겁고 두려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2) 추락

궁에 처음 들어오기 전, 애비게일은 마차에서 떨어져 똥이 흩뿌려진 진흙에 몸을 담구고 만다. 자신의 사촌이지만, 이제는 계급과 처지가 너무도 달라져버린 사라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에비게일은 ‘저 파리들은 네 친구니?’라는 모욕적 언사를 들었다.

에비게일의 계략에 넘어가 독이 든 차를 마신 사라는, 말을 타고 달려가다가 삶에서 처음으로 말에서 떨어지고, 큰 부상을 입는다. 그리고 매춘굴에서 일어나 창녀로 살 뻔하다가 겨우 궁에 연락이 닿아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애비게일이 마차에서, 사라는 말에서 떨어지는 장면은 그들의 삶 전체가 붕괴되던 순간과 오버랩되어 ‘추락’의 이미지가 갖는 의미에 대해 곱씹게 한다. 감독은 어쩌면 위기와 고통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찾아온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포레스트 검프에 나오듯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은 것이어서 단 맛과 쓴 맛을 결국에 모두 경험하고야 만다는 클리쉐적인 이야기를, 이미지의 추상성에 결부시켜 좀 더 고풍스럽게 표현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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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남성

‘더 페이버릿’의 특이한 점은, 남성 캐릭터의 비중에 비해 여성 캐릭터의 비중이 훨씬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사실상 유의미한 남성 캐릭터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토리당의 당수이자 애비게일에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인물인 ‘할리’가 있긴 하지만, 그 역시 정치적 야망 이외의 모든 인간적 특성을 거세당한 인물로 등장할 뿐이다. 이야기의 핵심인 사랑, 욕망, 우정, 질투 등의 감정은 여성 인물들 사이에서만 등장한다.

‘더 페이버릿’에서 남성은 부각되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부정적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영화 초반부에 마차에서 애비게일을 떨어뜨린 인물도 남성이고, 할리는 애비게일과의 첫 산책에서 자신에게 여왕과 사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것을 강요하며 그녀를 구덩이 안으로 밀어버린다. 18세기 영국은 남성이 화장을 하면서 여성을 유혹하려고 하던 거의 유일한 시대라고 하는데, 이러한 배경이 철저히 고증됨에 따라 남성 인물들이 희화화되는 측면도 있다.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해석한다면, 이는 기존 작품들에서 권력과 욕망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여성들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패러다임의 전환을 꾀하려는 감독의 의중이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질문4: 엔딩 장면에 대한 ‘이창희’의 주관적 견해


여왕 앤의 역할을 맡은 ‘올리비아 콜먼’의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언제나 온화하고 사람 좋은 더 페이버릿의 감독 란티모스가 유일하게 한 번 그녀에게 미간을 찌푸린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그녀가 예전 작품의 엔딩 장면이 무슨 의미였냐고 질문했을 때였다. 그만큼 란티모스 감독은 해석의 다양성을 추구하기로 유명하다.

‘더 페이버릿’의 난해한 엔딩 역시, 란티모스 감독이 목표로 하듯이 개개인의 주관에 따른 가변적 설명을 가능하게 하는 엔딩이다. 애비게일은 여왕의 환심을 얻으려 애쓰는 동안에는 그토록 예뻐하던 토끼를 발로 지그시 짓밟으며 조소를 머금다가, 앤의 광적인 부름을 받게 된다. 그녀는 하기 싫다는 표정을 만면에 지으며 억지로 다가가 무릎을 꿇은 채 앤의 무릎을 주무른다. 앤의 표정 역시 무엇인가에 쫓기는 악몽을 꾼 사람처럼 괴로워 보인다. 그리고 장면이 서서히 전환되며, 스크린에 토끼가 한 마리씩 늘어나다가 결국 토끼 몇십 마리로 꽉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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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가 앤의 뿌리 깊은, 뽑힐 수 없는 상처를 상징한다고 가정하면 마지막에 스크린을 뒤덮어버린 토끼들은 여왕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함으로써 스스로를 더 깊은 상처의 굴로 밀어 넣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애비게일이 무릎을 꿇고 여왕의 다리를 주무르는 장면은 마치 하나의 성행위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이는 창녀로 살았던 과거를 그토록 증오했던 애비게일이 귀족의 신분을 갖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행의 수렁에서 자신을 빼내오지 못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욕망의 밭을 일구며 사는 인간은 수확 후에도 불안정하다. 인생의 유일한 목적을 상실한 채 허망함에서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질문5: ‘더 페이버릿’을 한 단어로 정의해야 한다면?


내가 선택한 단어는, ‘도끼’다. 광고인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라는 책을 좋아해서 여러 번 읽었는데, 내용보다도 마음에 들었던 것은 그가 고심해서 골랐을 제목이었다. 도끼가 될 수 있는 것은 비단 책뿐만이 아니다. 인간을 소재로 다루는 것들, 예컨대 좋은 영화나 드라마, 웹툰, 세계관이 아름다운 게임, 가사와 멜로디의 조화가 가슴을 울리는 노래까지 많은 것들이 감수성의 얼음을 깨뜨리는 매서운 도끼가 된다. 내게 ‘더 페이버릿’은 막 날을 갈아 윤이 흐르는 도끼와도 같았다. 영화를 보자마자, 무엇이든 쓰고 싶어졌다.

‘더 페이버릿’은 실화를 기반으로 했지만, 대중들에게 잘 조명되지 않았던 앤 여왕의 시대를 배경으로 했을 뿐 아니라 아직은 다수에게 낯선 레즈비언 소재를 활용했기에 처음 영화를 마주한 이들에게 신선하고 불편한 충격을 준다. 하지만, 충격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두 시간의 유쾌한 블랙 코미디와 생각을 마비시킬 만큼 냉혹한 비극을 동시에 선사시켜 준다. 또한, 면밀한 고증을 거친 과거의 재현을 만나게 해줌으로써, 세계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작금의 현실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만든다. 내게 찾아온 고민은 글에서 첫 번째로 언급한 질문이었던, 영화 속 인물들이 속한 사회와 우리 사회의 차이점, 더 나아가 ‘더 페이버릿’ 속 그녀들과 나 자신의 차이점에 대한 것이었다.

나의 행위들을 추동하는 것은 욕망인가, 사랑인가, 아니면 둘 사이의 혼합인가? 욕망에 눈이 멀어 중요한 가치를 외면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경험한 ‘상실’들은 앞으로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필연적으로 답이 없는 질문들이지만, 그 질문들을 답하기 위해 애쓸 수 있어서 행복했다.


좋은 작품은 때로 삶의 거울이 된다. 그 거울에 마음을 비추어 보고 나면, 현실의 거울로는 보이지 않던 심장의 때와 먼지가 보인다.



이 글을 읽은 당신에게도, ‘더 페이버릿’이 특별해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이창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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