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가 만난 건, 운명이었지 [사람]

글 입력 2019.02.20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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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은 대개 운명적으로 시작된다. 왜 하필 그 때, 그 곳에서, 그 상황에 당신을 만나게 되었을까. 언젠가부터 이미 정해진 일인 것처럼, 우리는 원래 만날 운명이었던 거지. 우리는 기가 막히는 수많은 우연에 우리의 사랑을 내던진다. (내던진다는 표현이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아무렇게나 힘차게 던지다.’라니. 딱히 별다른 의지나 의도는 없는 듯 보이지만, 결국 사랑에 빠지는 주체는 역시 우리이지 않은가.) 사실 돌아보면 끼워 맞추기 식으로 의미를 부여했던 경우도 많았는데. 그래도 당신은 운명이었던 것 같다.



2.



며칠 전에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봤던 영화 ‘500일의 썸머’를 다시 본 적이 있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땐 톰이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썸머를 보면서, 순화 시켜 표현하자면 ‘나쁜 여자’라 입 아프게 욕을 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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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이 지난 지금 영화를 보니 욕이 나오긴 커녕 ‘현실적인’ 이들의 연애를 보며 울컥하기까지 하더라. 6년간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기껏 해봐야 두세 번 남짓한, 사랑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경험들 덕분인 것 같다. 미안해요, 썸머.




3.



썸머를 보고 첫 눈에 반해버린 톰. 톰에게 썸머가 건넨 첫 대사는 ‘저도 그 노래 좋아해요-’였다. 아, 이건 운명이다. 그녀가 나와 같은 음악을 좋아한다니, 어떻게 운명이 아닐 수가 있겠어. 생각보다 사소한 이유로 불씨는 지펴지고 사랑은 시작된다.


취향. 개인적으로 취향은 사랑을 가능케 하는 데에 대단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취향이 같다면 어렵지 않게 할 말도, 함께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지니까.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어떤 옷을 입는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우리는 당신의 ‘취향’을 알고 싶어 한다. 수많은 취향 중에 공통점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꼭 운명처럼 느껴지곤 한다. 사실 수많은 우연 중 하나일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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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우연이 딱 맞게 떨어져 운명처럼 만났는데, 운명적으로 나와 공통점까지 갖고 있다. 역시 우리는 만날 수밖에 없었어. 여기에 자신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는 오만이 더해지면 사랑이 완성된다. 사실 유일할 수 있는 건 사랑이라는 '관계'가 갖는 일종의 명분 덕분일 텐데. 어쨌거나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건 그 자체로 가슴 뛰는 일이다. 우리는 결국 그 달콤한 꼬임에 넘어가고 만다.


운명적인 당신도 실은 지독히 다른 ‘남’이다. 영원한 사랑 따윈 없다고 말하는 썸머와, 그 반대인 톰처럼. 우리를 이어준 건 운명일지라도, 계속해서 싸우고, 다투고 이별을 반복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아주 당연하단 듯이.


그리고, 우리는 운명적인 사랑을 또 다시 시작한다. 아주 당연하단 듯이.​



4.



몇 년 전에 같은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연히 만난 누군가에게 빠지게 되었던 적이 있다. 이유는 단순히 같은 담배를 피우는 남자를 본 적이 없어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철도 없고 어이도 없는 이유인데, 그땐 정말 운명처럼 느껴졌다.)


​알고 보니 그는 비흡연자였지만 그 사실은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모두가 서먹했던 그 사이에서 내게 말 한 번 건네기 위해 새 담배를, 그것도 하필 같은 종류의 것으로 한가득 쥔 채 다가왔다는 사실 만으로 운명인 것처럼 느껴지곤 하니까. 엇비슷한 음악 취향이나 전공 분야를 가졌다는 사실을 하나씩 알아가면서, 우리는 알면 알수록 신기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역시 운명이었다며. 사실 누구보다 성격과 성향이 다른 사람이었고, 그래서 매일같이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했지만, 아무튼.


그가 나랑 같은 술집을 좋아해, 나랑 같은 게임을 하더라, 나랑 노래 취향이 너무 잘맞아-누군지는 밝힐 수 없겠다만 아무튼 최근에 나의 친구들이 '사랑에 빠진 이유들'은 이랬다. 100%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런 이유들 때문에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생각보다 별 시답지 않은 이유로 사랑에 빠지곤 한다. 내가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니, 역시 당신은 운명이었던 것 같다. 사실 별 사소한 이유들에 운명이란 이름을 붙이는 것 같긴 하지만 어찌됐건 사랑하니까,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냥’ 만난 것보단 ‘운명적으로’ 만난 게 더 극적이고, 특별하고, 아름다우니까. 그리고 내 사랑은 누구보다도 극적이고, 특별하고, 아름다우니까.




5.



-내가 식당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다가와 책 내용을 물었어. 그 이가 내 남편이야.

-그랬구나. 그래서?

-내가 영화를 보러 갔더라면? 다른 식당에 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1분만 늦게 식당에 갔다면? 우리는 만날 운명이었던 거야.


톰과 썸머는 뒤바뀌었다. 톰은 썸머의 말이 맞았다고. 운명이나 반쪽, 진정한 사랑 따위는 없는 거라 말하지만 반대로 썸머는 운명적인 사랑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는 톰에게 '우리는 운명이 아니었던 거야.'라 말한다. 톰에게 썸머는 운명과 같은 사랑이었을 텐데. 운명적인 사랑은 진정 존재할까? 썸머의 말처럼 어느 날 아침 문득 ‘이 사람이다-’라는 느낌을 주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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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동화 같은 사랑 따위를 믿지 않겠다던 톰은 한 회사의 면접에서 또 다시 운명을 만난다. 그녀의 이름은 어텀(autumn), 가을이다. 뜨거웠던, 뜨겁다 못해 모든 걸 불태워 재만 남겨버렸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그것도 면접장에서 우연히. 역시 이건 운명이 아닐 리가 없다. 운명적인 사랑은 늘 그렇게 또 다시 시작된다.




Epi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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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적거나 같잖은 해석을 내놓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언젠가는 사랑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었던 것, 그 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운명’에 관한.


오래 만난 연인과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어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고, 만난 지 두 달도 채 안되어 영원을 약속하는 연예인들을 보면 ‘운명의 짝’이라는 게 정말로 있는 건가 싶다. 우리는 늘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사랑하지 않는가. 이 사랑은 진정한 사랑일까. ‘운명’은 정말 존재할까? 누가 뭐래도 나는 '있다'고 말하고 싶다.


*


우리는 기가 막힌 운명들 속에서 살아간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특별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이 글 속에서 내내 내가 말했던 '사랑'은 사실 연인 관계만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다. 최근에 내가 사귄 사랑하는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해보자면.


1. 동네 술집에서 친구들끼리 우연히 합석을 하는 바람에 알게 된 고등학교 친구 H. 고등학교에 다니던 3년간 단 한마디도 나눠본 적이 없던 H는 알고 보니 내 옆집에 살고 있었다. 덕분에 매일같이 만나는 가족 같은 친구가 되었다. 마침 성격도 전공도 비슷해서 함께 있으면 할 이야기가 참 많다.


2. 일을 하다가 만난 B(총 4명이다.)는 동갑이라는 이유로 말을 트게 되었다. 이 친구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가 너무 좋아서, 퇴근길에 종종 함께 술을 먹기도 했는데 마침 감정기복이 심한 나를 참 잘 알아주고 달래주는 친구들이어서 다정함이라던가, 따뜻함 따위를 늦게나마 배워가면서 친해질 수 있었다.


3. 취업 교육에서 만난 친구들인 K(총 6명이다.)는 함께 땡땡이(도망을 갔다는 건 아니고, 수업시간에 몰래 스마트폰 게임을 함께 하곤 했다.)를 치다가 우연히 친해지게 되었는데, 마침 개그 코드나 노는 스타일이 똑같아서, 그리고 함께 노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게 재미있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만날 정도로, 억지로 약속을 만들어서 만날 정도로 친해졌다.


그 밖에도 여러 운명적인 인연들을 참 많이도 만났다. 그리고 내가 멋대로 놀면서 이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건, 숨 막히게 폐쇄적이었던 아버지를 벗어나 친구 같은 엄마와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인연들을 되돌아보면, 참 운명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이 조금 길어진 것 같다. 아무튼, 내가 만난 모든 당신들에게 우리는 역시 운명이었던 것 같다고. 그 한 마디를 전해주고 싶었다. 크고 작은 운명적인 만남은 계속될 것이다. 운명이 있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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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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