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삶의 이치를 담은, 도서 <사서>

글 입력 2019.02.17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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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는 항상 변한다. 그래서 지식도, 기술도, 예술도 모두 시대의 흐름에 따라 주류와 비주류가 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양극단을 넘나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시간이 지나면 대다수의 모든 것들이 바래지고 변하기 마련인데도 불구하고, 그 가치가 퇴색되지 않고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특히 글 중에서 그러한 것들을 우리는 고전이라 부른다. 논어에서 온고이지신이라 말했던 그 표현이 바로 이 고전들에 두고 두고 적용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트인사이트를 통해 만난 출판사 나무발전소의 사서는 옛 고전 중의 고전인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을 정말 자세하게 현대어로 풀어 설명해 준 책이었다.




목  차​


이 책의 특징 및 활용법
시작하는 말

제1권 대학(大學)


제2권 논어(論語)

제3권 맹자(孟子)

제4권 중용(中庸)


주요 인물 사전  
찾아보기(개념어, 사자성어) 



 

오랜만에 유학과 관련된 책을 읽으려니 나름대로 감회가 새로웠다. 이젠 몇 구절 기억이 나지도 않지만, 어릴 때 사자소학을 배운 경험이 있고 그래서 학생 때 동양 고전들에 조금씩 손을 댔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대학 필수 수업 과목이었던 들었던 유학 수업은 그 내용이 이제 기억이 거의 나지도 않을 정도다. 거기다 그 때를 포함하여 지금까지 사서를 전부 다 읽은 적은 없었다. 특히나 대학, 논어, 맹자는 책을 조금이라도 본 적이 있는데 어째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중용은 정말 단 한 번도 읽어본 일조차 없었다. 도덕, 윤리 시간에 배웠던 그 조각난 지식이 전부 다라고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었는데 정말 어쩌다 그랬을까. 새삼 그러다 보니 7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스스로가 매우 대견하게 느껴질 것 같았다.


*


네 권의 책은 각기 다 다르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대학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어릴 때에는 대학이 가장 분량이 적어서 좋았다. 어릴 때 논어나 맹자를 다 본 적은 없었지만 대학은 다 봤다. 그만큼 어린이가 보더라도 짧아서 부담없이 읽기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담이 없다는 건, 어렸을 때 기준으로 읽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오히려 지금 와서 다시 읽으니 정말 한 대목 한 대목 매우 집약적으로 생각할 거리들을 시사하고 있어 양은 적을 지라도 이를 읽어내려가는 시간이 짧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특히나 대학은 사서의 다른 책들보다도 삶의 매순간에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지을 내면의 본질에 대해 많은 화두를 던지고 있기에, 처음 대학을 읽었던 시절보다 지금의 나에게 더욱 많은 생각할 거리들을 안겨주었다. 그 중에서 이번에 특히 눈에 들었던 대목은 "신유심재(身有心在)"라는 표현이 나오는 대목이었다. 역자 신창호는 이 대목을 '몸과 마음의 올바름을 간직한다'라고 해설을 붙였다. 몸과 마음에 무언가를 담아두거나 묻어두는 것은 '바른' 상태가 아니므로 자기 수양을 위해서는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노여움, 두려움 같은 부정적인 감정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 역시도 포함이 된다.


결국 현인이라면, 삶을 사는 데 있어 누구나 느끼는 희로애락을 느끼더라도 그것으로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니라 평정심을 유지하며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특히 기쁨을 억누르는 것보다 화를 억누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한다면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화를 폭발하듯 분출해내고 나면, 그게 내 몸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걸 느낄 수 있다. 울화가 내 몸을 휩쓸고 가면 느껴지는 그 답답함과 열감은 언제 느껴도 불쾌하기 이를 데 없다. 거기다가 그 상태에서 다시 평정심으로 회복되기까지의 시간 또한 짧지 않다. 그러니 정말로, 몸과 마음의 올바른 상태를 유지해나가는 건 정말 현대인에게도 아주 중요한 일이다. 특히 홧병이 나기 쉬운 직장인들이라면 더더욱.


*


사서 중에 두번째 책인 논어는 사실 유교 최고의 경전이나 다름없다. 공자가 직접 쓴 책은 아니지만 대화체로 풀어나간 이 책은 공자의 여러 일화들 속에서 묻어나는 지혜들을 여실히 볼 수 있다. 그러나 공자가 직접 쓴 책이 아니기 때문에 불분명한 부분도 분명 있다. 그래서 사서 중에서도 특히 논어에 대한 해설서들이 지금까지도 많이 나오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화자의 그 마음이 논어 전반에 걸쳐 느껴지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논어의 서두는, 정말 누구나 한문 시간에 한 번쯤은 외운 기억이 있는 익숙한 표현이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그리고 이어지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신의 본분을 다하면 그것이 군자가 아니겠는가 하는 표현. 가히 논어의 서두에 있기에 가장 적합한 문장이 아닌가 싶다.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 함께 할 수 있는 벗을 만나는 기쁨, 그리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충실하게 살아가는 의지. 그 모든 것이 공자라는 인물의 모호하고도 베일에 쌓여있는 그 삶을 충분히 드러내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공자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그런 삶이라면 정말 행복할 것이다. 특히나 외부의 평가와 상관없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며 산다는 것은 인생의 어느 시점에 이루더라도 정말 큰 성취임에 틀림없다.


또한 "언불가불신(言不可不愼)"이라 말한 것과 같이, 말을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게 삶인 것 같다. 논어에 정말 귀한 말들이 많은 데도 이 말이 유독 나에게 와닿는 것은, 최근에 내가 입밖으로 말을 꺼내놓고도 삼가지 못한 게 후회되어서 그런 것 같다. 특히나 일과 관련하여 언쟁이 오가게 되면 말을 삼가는 게 더욱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그런 언쟁이 오가는 건 그만큼 오랜 시간동안 그 사람에 대해 쌓인 것들이 많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미 충분히 답답하게 만든 사람이 화까지 나게 만들면 그 순간에는 말을 삼간다는 선택지는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라면 모를까, 원래 그러지 않던 사람이 화난 채로 말을 쏟아내고 나면 말을 삼갈 것을 하고 후회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러니 처음부터 말을 가려서 하고, 삼가는 게 더욱 중요하다.


*


아. 맹자는 어렵다. 사서 중에 가장 읽어내리기 어려운 게 맹자인 것 같다. 비교적 짧게 짧게 진행되는 대학, 논어를 읽다가 맹자에 접어들면 한없이 길게 이어지는 한문을 보고 멈칫 하게 된다. 대학과 논어가 가벼운 명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맹자는 특히나 인간 본성과 그 도야, 그리고 이를 왕도에까지 확장시키며 아주 넓은 사유의 폭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의 일화를 위한 한문이 쇄도할 수밖에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맹자에서는 맹자와 고자의 인간 본성에 대한 논쟁이 이 책의 가장 핵심이 아닐까. 인간의 본성이,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선하다고 표현한 맹자와 인간 본성 자체는 선악이 없다고 말한 고자의 논쟁은 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재미있다. 윤리 시간에 딱딱 끊어서 배우던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대화의 흐름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마치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의 논쟁을 보던 것과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런 고대의 논쟁을 쭉 읽어내려가다보면 처음에 공통적으로 받는 느낌이 '왜 이렇게 장황한가' 하는 것이고, 뒤이어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상대의 허점을 파고드는 수준인데' 하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 언제 읽더라도 장황하고, 굳이 이렇게까지 말을 늘여서 설명해야 하나 싶고, 논증이라는 느낌이 그다지 들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생각을 조금만 달리 해보면, 정말 흥미로운 대목들이다. 왜냐하면 후대인 우리야 이미 아주 정제되고 고도화된 사유들을 접했고 특히 그것을 지식이라는 명목 하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그 사유가 후대의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고 또 후대의 누군가가 어떻게 발전시켰는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상황과 달리, 국가나 맹자가 쓰이던 그 기원전 시대에서는 현대 수준으로 집약된 지성의 집합체가 애당초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비록 현대의 관점에서 너무 장황하거나 비논리적이라 할 지라도, 그 논쟁을 이어가기 위해 사유를 발전시켜 나가는 고대 사상가들의 발언들을 함께 짚어나가 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재밌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맹자는 그런 재미를 찾으며 읽어가는 것이 가장 몰입하기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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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단 한 번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중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미 학교에서 너무나 많이 배운 바 있다. 인간의 마음이 지향해야 하는 방향성에 대해 이만큼 제대로 표현하는 말이 있을까. 더군다나 중용은 그 내용이 길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마음이 가져야 하는, 그리고 우주 만물이 취하고 있는 그 도를 아주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나 이 책이 재미있는 것은, 서양철학과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적 사유는 곧 통치에 대한 원론적이고도 실천적인 지향점을 제공했다. 이는 통치 이념이 필요했던 통치자와 그런 사상적 뿌리를 제공해줄 수 있는 사상가들의 이해가 서로 일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서양철학의 경우 이와 같은 관념에 대한 침투, 논증 그리고 발전이 철학적 토대를 이루어나갔다면 동양철학의 경우에는 그보다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고 또 이를 쓰는 방법에 대하여 몰두해왔다. 중용이 예기의 한 편에 불과했다가 한 권의 책으로 발전되어 사서가 된 것을 보면 동양철학에서 마음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명약관화하게 알 수 있다. 그만큼 심오하다.






오랜만에 읽은 사서는 정말 삶의 이치를 담고 있었다. 고전은 그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의 손때를 타가며 읽혀진 이유가 다 있다. 그만큼 시간이 흐르더라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와 현재의 국가 구조가 많이 다른 만큼 통치와 관련하여 나오는 내용들은 현대에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부분들 역시 있었다. 그러나 사서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것은, 인간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올바름을 추구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집대성하여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석미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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