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 [도서]

글 입력 2019.02.10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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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위화(余華)



일본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있다면, 중국에는 ‘위화(余華)’가 있다.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인 위화.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작가를 보면 대개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어릴 때부터 엄청난 양의 책을 읽었겠구나!”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학창시절에 책은 그리 가까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학창시절에 문화대혁명(1966~1976)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은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주도한 운동으로 전근대적인 문화와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사회주의를 실천하자는 운동이다. 이 운동 당시 각종 문화재와 예술품이 파괴되어 중국의 문화 예술은 침체기를 겪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위화가 이 시기에 읽을 수 있는 책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소설을 읽겠다는 강한 집념이 있었다. 그는 ‘마오쩌둥 선집’의 주해에 스토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읽기 시작한다. 이것마저 다 읽은 후에는 대자보를 읽는다. 간통을 고발하는 대자보에는 나름의 스토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암암리에 돌아다니는, 책의 시작과 끝이 일부 소실된 소설책도 찾아 읽는다. 결말이 너무 궁금하여 소설의 뒷이야기를 상상하던 것이 훗날 소설을 쓰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듯이 그의 글쓰기 인생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아 보이는 문화대혁명 덕분에 위화는 소설가의 길을 수월하게 걷게 된다. 그는 1982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80년대는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문학 잡지가 복간되고 새로 창간되는 시기였다. 자연히 그의 소설을 잡지에 실을 기회가 많아졌다. 기존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도 없는데 문학 잡지는 넘쳐나니 그야말로 소설가들에겐 기회의 시기였을 것이다. 이를 두고 그는 자신이 운이 좋았다고 한다.


 


위화(余華)의 글쓰기와 소설


 

소설가들은 소설을 어떻게 쓸까? 훌륭한 소설들은 어떻게 쓰인 것일까? 작가 지망생 혹은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품어봤을 의문이다.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을 읽다보면, 위화에 관해서는 저 질문의 궁금증이 해소된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쓴 소설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말한다. 어떤 작품은 그의 글쓰기 인생에 영향을 끼치고 반대로 어떤 작품은 그의 글쓰기 인생에서 영향을 받은 것을 보면서 신기하고도 흥미로웠다.

 

위화의 글쓰기 첫 스승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이다. 그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지의 무희>을 시작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 작품에 매료된다. 무릇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과 닮게 되는 법. 그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처럼 소설에서 디테일 묘사를 중시하게 된다. 덕분에 그의 글쓰기는 튼튼한 기초를 갖출 수 있었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그의 글쓰기를 한정하게 된다. 이때 그의 새로운 스승이 되어준 것이 바로 ‘프란츠 카프카’이다. 그는 카프카의 <시골 의사>를 보고 그를 옭아매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그림자에서 벗어난다. 이후에 쓰인 소설이 단편 <십팔 세에 집을 나서 먼 길을 가다>이다.



 

1986년 겨울, 저는 한차례의 비경험 독서를 하고 글쓰기의 감옥에서 자유 증서를 한 장 얻었습니다. 이 자유 증서는 바로 <시골 의사>였습니다. 감옥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온 저는 달리고 싶으면 달리고 천천히 거닐고 싶으면 거닐었습니다. 얼마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지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저를 글쓰기의 문으로 이끌어주었다면 카프카는 제 글쓰기에 자유를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 p197
 



위화의 대표작인 <인생>은 그의 글쓰기를 전환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는다. <인생>의 주인공은 농민인 ‘푸구이’이다. 위화는 처음에 소설의 시점을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설정한다. 작가의 감인 것일까. 그는 소설을 쓰다 느낌이 좋지 않아 1인칭 시점으로 변경한다. 후에 생각해보니, 관찰자 시점으로는 푸구이의 인생이 비극이기만 하지만, 1인칭 시점으로는 비극 안에 존재하는 행복도 담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위화는 자신이 설정한 캐릭터에 맞는 서술을 위한 고민을 한다. 그는 푸구이가 배운 것이 별로 없는 농민인 점을 고려해 단순한 단어로 서술을 이어간다. 언뜻 보면 그리 하기가 쉬워 보이지만, 복잡한 언어로 서술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줄어들고 작가가 자유롭게 단어를 선택하여 서술할 수 없기에 까다로운 작업일 것이다. 푸구이가 농민인 것이지, 작가가 농민인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작업이 그의 언어시스템의 한계를 넘게 한다.


 <허삼관 매혈기>는 위화의 소원에서 시작된다. 그는 상당히 소설가다운 소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작품 전체가 대화로 이루어진 소설을 쓰는 것이다. 그는 작품 전체가 대화인 제임스 조인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고 이런 꿈을 갖게 된다. 그는 <허삼관 매혈기>를 쓰던 중 소설의 앞부분이 대화문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닫고 그대로 소설 전체를 대화문으로 끌고 간다. 소설에 흔히 사용하는 서술 방식은 아니므로 당연히 쉽지 않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대화문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게 된다. 그는 누구보다 대화문에서 자유로워진다.




좋은 작가가 되려면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냐는 다소 추상적인 질문에 위화는 이런 답변을 내놓는다. “위대한 작품을 많이 읽으세요” 간단하고 단순하지만 반박할 수 없다. 내가 어느 순간 떨어진 문장력의 원인을 인터넷의 짤막하고 완성도 낮은 문장을 많이 본 것으로 두는 것과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또 다른 답변은 ‘사람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이 답변에 문득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었다. 예전 소설 관련 강의에서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었는데, 버스를 많이 타라는 것이었다. 버스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타기에 자연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많고 다양한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소설의 소재를 떠올릴 수도 있고, 사람의 유형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신선한 캐릭터를 얻기 위한 유용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결국 이것도 사람이 무엇인지 아는 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화는 사람이 무엇인지 잘 아는 작가로 ‘셰익스피어’와 ‘루쉰’을 든다. 일반적인 작가의 광인(狂人) 묘사는 누가 정해놓은 것도 아닌데 정해져 있다. 인물이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거나 중간에 문장부호를 넣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두 작가는 좀 다르다. 이들의 묘사하는 광인은 말을 더듬지 않고 조리 있게 한다. 그러나 읽다 보면 알게 된다. 아, 이 사람 제정신은 아니구나!



 

이런, 똥개 한 마리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제멋대로 구니 정말 큰일이군요! 이치대로 하자면 스스로 개라는 것을 인정하면 무슨 짓을 하든지 개로서의 약간의 총명함만 보이면 되겠지요. 하지만 이 녀석은 어떤가요? 제가 이 녀석보다 조금이라도 총명하지 않았다면 녀석의 과실이 전부 제 탓이 되고 말았을 겁니다. 그러면 녀석은 일찌감치 사람들에게 목이 졸려 죽었겠지요. 여러분이 제 대신 이 녀석을 평가해주세요. 녀석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일까요? 녀석이 공작(公爵)의 식탁 밑에서 서너 마리 신사의 모습을 갖춘 개들과 함께 한꺼번에 오줌을 갈긴 겁니다. 손님 하나가 말했지요. “이게 어디서 온 비루먹은 개야?” 또 다른 손님이 말했습니다. “쫓아버려! 쫓아버려!” 세 번째 사람이 말했지요. “채찍으로 후려쳐서 내쫓아버려!” 공작이 말했습니다. “목을 졸라 죽여버려.” 저는 이런 지린내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크랩이 한 짓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를 때리려는 사람들 앞에서 황급히 말했지요. “친구여, 이 개를 때릴 작정이시오?” 그가 말했습니다. “그래요.” 내가 말했지요. “그건 개를 너무 억울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오줌을 싼 사람은 저거든요.” 그는 나를 실컷 두들겨 패서 쫓아냈습니다. 세상에 자신의 노복을 위해 이런 억울함을 감내할 수 있는 주인이 몇이나 될까요?


셰익스피어 <베로나의 두 신사> 中




셰익스피어와 루쉰이 광인을 이렇게 묘사한 것은 유별난 작가여서가 아니라 사람이 무엇인지 알아서이다. 위화는 이 두 작가가 묘사한 광인과 유사한 인물을 직접 만나는 경험을 한다. 어느 날 그는 행사로 인해 베로나 정신병원을 방문하게 된다. 환자들과 질문을 주고받던 중 병원 관계자로 생각했던 한 남자가 그에게 질문한다. 첫 번째, 중국에서 작가로 사는 것은 어떠한가. 두 번째, 이탈리아 어느 도시에서 살고 있는가. 이 두 질문을 통해 위화는 사실은 그 남자도 환자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남자의 질문을 이해 못할 사람은 없다. 다만, 질문의 앞뒤가 맞지 않을 뿐이다.

 

사람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때로는 다른 사람과 놀랍도록 비슷하다가도 일반적인 예상 혹은 상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부모가 죽으면 몇 날 며칠 슬픔 속에서만 지낼 것 같지만 슬픔 속에서 웃을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이다. 그 때문에 진정한 사람의 모습을 찾는 것은 굉장히 섬세하고 까다로운 작업이다. 하지만 이를 찾아서 소설에 자연스럽게 녹일 수 있다면 그는 당연히 좋은 작가가 되어있을 것이다.

 





위화를 따라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그의 강연을 듣고 온 기분이다. 들어본 적도 없는 위화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듯했다. 책을 느리게 읽는 편인데 빠르게 넘어갔다. 위화라는 작가의 글쓰기 인생 자체가 소설처럼 흥미로워서였다. 문화대혁명을 넘어 중국 최고의 작가까지. 이것만으로도 한 편의 소설이지 않은가. 그의 소설에 대한 열정과 고민 그리고 고민을 넘는 과정 또한 인상적이었다. 그가 왜 중국에서 유명한 작가가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글쓰기가 막막해질 때마다 한 번씩 펴보게 될 책이 생긴 것 같아 마음이 든든하다.



[정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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