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누가 그에게서 자리를 빼앗았을까? _연극 '보이첵'을 보고

의자의 의미와 도덕률
글 입력 2019.02.07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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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첵, 보이첵,,!

 

 연극은 보이첵을 부르는 목소리로 시작된다. 모두들 보이첵의 선, 그 위의 사람들이다. 수직관계와 상하관계에서 그들은 보이첵에게 명령을 하고 조롱하고 비웃는다. 그럴때면 보이첵 배우는 의자를 들어올려 자신의 얼굴을 등걸이에 끼운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압박 상황에 처하게 될 때마다 자신을 의자로 가두어간다.

   

연극 <보이첵>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의자로서 이 모든 상황을 표현한다는 점이다.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가구’ 혹은 ‘틀’인 의자는 인간의 밀도 있는 고뇌나 고차원적인 상황까지 어려움 없이 혹은 그 이상으로 묘사해낸다. 그 의자에 주목하며, 우리는 왜 '사다리움직임연구소'라는 극단이 택한 오브제가 '의자'였나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는게 좋겠다.

  


 *

논의에 깊이 들어가기에 앞서,

 앞으로의 글은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임을

분명히 해둔다

 

 

그것은 의자의 근본과 관계된다. 의자는 직관적으로 곧 '자리'를 의미한다. 의자가 없다는 것은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 연극에서 의자가 없었던 인물은 누구였을까. 바로 보이첵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섞이지 못하고 그 가난함을 조롱만 당하고 성당 뒤켠에서 드디어 한자리를 차지하여 인생의 고달픔을 토로했던 이는 누구였는가를 생각해보면 결국, 의자에 제대로 앉지못한 보이첵은 이 세상에 앉아있을 구석 하나 없는 인물이었다. 연극의 내내에서 보이첵은 마땅한 자리가 없는 인물이었다. 곧, 연극의 내내에 활용할 오브제로 의자를 택한 것은, 보이첵은 그 누구보다 '의자'가 없음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의자는 또한 자세와 연관된다. 푹신하고 포근한 의자에 앉으면 우리는 편안한 자세를 취하지만 딱딱하고,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으면 우리는 곧잘 경직된다는 게 그 증거다. 다리 네 개에 판자 하나의 단순한 구조지만, 결국엔 그것이 우리의 ‘자세’를 바꾸어 놓는다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 자세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에도 영향을 미친다. 의자가 자세로, 자세가 마음가짐으로 불번지듯 이어진다. 그래서 많은 이윤 목적의 집단에서는 더 상위의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편안한 의자를, 낮은 직급의 사람에겐 조금 덜 푹신한 의자를 부여한다. 자세가 곧 마음가짐으로 연결됨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 <보이첵>처럼 모두 동일한 의자를 사용하는 경우엔 어떠할까. 이와 같은 경우엔 해석이 더 쉬워진다. 인물들에게 모두 동일한 구조가 주어졌기 때문에, 그 구조 위의 자세만 보면 되기 때문이다. 그 자세가 곧 인물들의 ‘태도’다. 그리고 그 태도는 곧, 그 인물의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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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에 사용된 11개의 의자들


 

연극에서 보이첵을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의자 위에서 편안한 자세를 보인다. 상사들은 모두 의자 위에서 널부러져 앉고, 다리를 벌리고 앉아있으며, 등받이에 자신의 중심을 기대어 앉는다. 또한 의사는 다른 사람들이 갖다 대어 주는 의자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가장 최고권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는 중대장은 심지어 의자를 쓰러뜨려 그 위에 누워 배를 긁기에 이른다.


그에 반해 보이첵은 의자에 제대로 앉지조차 못한다. 상사들에게 의자를 나르고, 생체실험을 위해 의사를 기다릴 때에는 관객 모두가 걱정할 만큼 오랫동안 의자의 등받이 두 개 사이에서 공중에 몸을 띄우고 있다. 보이첵은 '매우' 낮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의 이러한 소견이 모두 빗나가도 좋을만큼, 연극 <보이첵>에서 의자란 오브제의 사용은 완벽했다. 예를 들어, 배우들은 모두 의자를 어떻게 사용할지를 알고 있었고 그 모든 사용법은 평범한 일상의 것과는 달랐다. 그들은 의자를 술병인양 하늘로 던지고 받았고, 또한 어지러운 마음을 나타내듯 나무의자를 몇 번이고 돌렸다. 또 보이첵은 고민과 번뇌의 높음으로 의자 4-5개를 쌓아 그 위에 위태롭게 서있었다. 이 연극이 받았다는 찬사가 이해가 되는 장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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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었던 보이첵의 모습



보이첵, 그는 마지막으로 마리를 죽이고 위를 바라보며 극을 마쳤다. 그가 바라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이었을 수도, 자신이 죽인 마리였을 수도 있다. 혹은 자신이 짓밟아버린 '선'의 영역이었을 수도 있다. 필자는 그가 마지막으로 하늘에서 찾은 것이 '의자'이진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다. 이 세상에선 그가 갖지 못한, 누군가를 위해 옮겨다니기만 했던, 사소하고 기본적인 그 오브제를 그는 마지막 하늘에서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은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채 힘겹게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하층민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가 보이첵과 사람들의 자리를 뺏었을까? 이 연극이 남겨둔 물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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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하는 보이첵



P.S. 경제적 피폐가 도덕성의 피폐로 이어지나요?



줄거리에서 가장 중심적인 인물은 두 명이라고 할 수 있다. 보이첵과 마리, 이 연극에서 유일하게 도덕적 번민을 겪는 인물들이다. 보이첵의 번민은 자신이 하층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부조리한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아내를 상사에게 빼앗기고, 참여한 생체 실험에서는 소변을 누는 것조차 쉬이 허락되지 않는다. 마리는 보다 더 매력적인 캐릭터다. 그녀는 바람을 피우면서도 괴로워하며, 자신의 행동에 '세상은 이 지경', '어차피 모두는 지옥에 간다'며 간간히 변명을 덧대며 살아간다. 이 연극의 고민하는 두 사람이 사회의 가장 하층부에 있는 것이 증명하는 바는 무엇일까. 결국 경제적 피폐가 도덕적 피폐로 이어진다는 것일까.


예전 필자가 가르치는 독서논술 시간에,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이야기를 하며 '경제적 피폐가 도덕성의 피폐로 이어질까'에 대한 논의를 한 적이 있다. 자신도 답을 내지 못한 문제로 아이들에게 생각을 이끌어내도록 하는 부족한 선생님으로서의 죄책감에 슬퍼했다. 그 오랜 슬픔의 끝에 낸 필자의 답은, '아닙니다'라는 것이었다. 이 답은 먼저 도덕률에 대한 선택지도 결국, 여타의 질문들과 같이 '예' 혹은 '아니오'를 고르는 것이라는 데에 전제를 둔다. 옳고 그름의 판별은, 그 이전에 '예' 혹은 '아니오'를 판단하는 것이다.


앞에 가는 무거운 짐을 들고 계신 할머니를 도와줄 것 입니까? 예, 아니오. 쓰레기를 쓰레기통이 아니라 길바닥에 버리겠습니까? 예, 아니오. 바람을 핀 아내를 살해하시겠습니까? 예 ,아니오.


여기에서 윤리적인 '예' 혹은 '아니오'를 택하는 데에 있어, ‘경제력’은 그렇게 많은 영향을 끼치는 요소가 아니다. 이에는 수많은 여타의 요소들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본성, 교육, 혹은 사회적 요인과 같은 것들이다. 반대로 경제력의 만족이 '선한 사람'을 만드는 것도 아닌 것이다. 이 또한 도덕성을 쌓는데에는 수많은 요소들이 개입되며, 경제력의 결핍이 정신적 피폐로 직결되는 것이 아님을 반증한다. 하지만 동시에 간과해서는 안될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력이 부족한 사람은 도덕성이 부족한 행동에 대해 더 엄청난 무게를 지게 된다는 것이다.


경제력이 결핍된 사람들의 도덕적 결핍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도덕성보다 더 두드러질 수 밖에 없다. 경제력이 높은 사람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도덕성 부재를 가릴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보이첵과 같은 하층민은 그런 기회를 받기 어렵다. 아마 경제력과 도덕성에 대한 생각은 더 많고 다양할 것 같은데, 필자는 이즈음에서 추신과 소견을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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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첵과 의자들, 그리고 도덕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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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첵


사다리움직임연구소


CKL STAGE


2019.01.30 - 02.10



[손민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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