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세계로 싹트는 사랑과 갈등, <장거리 사랑> [도서]

글 입력 2019.02.04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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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장거리 사랑’이라는 독특한 사랑을 하고 있는 새로운 가족 형태가 등장했으며 이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 이들은 한 지붕아래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거나 서로 다른 나라에 살고 있지만 가족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등 국가 간 경계를 넘어선 장거리 사랑을 하고 있다.


이러한 가족 형태는 한 지붕아래에서 같은 민족끼리 사는 것이 당연했던 기존의 ‘가족’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났기에 새로운 가족 안에서는 여러 대립과 혼란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또한, ‘장거리 사랑’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대립과 혼란을 다룬 베티 마흐무디의 ‘내 딸 없이는 안 돼’나 얀 바일러의 ‘마리아 그는 그걸 좋아하지 않아’등과 같은 문학작품들이 대중적 인기를 끈 것을 보면 이러한 새로운 가족 형태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낯선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소설 속에서 다뤄지는 혼란과 갈등들이 사람들의 공감을 끌었다는 건 수많은 사람들 역시 새로운 가족 형태에 많은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울리히 벡·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의 <장거리사랑>은 바로 이를 다룬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장거리사랑>은 ‘세계가족’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을 도입하여 ‘장거리 사랑’으로 인한 수많은 혼란과 대립들을 고찰한다.


보편적인 개념으로 다양한 형태의 ‘장거리 사랑’속에서 연관성을 찾아내어 이들의 본질을 탐구한다. 이에 따라 장거리사랑으로 인한 혼란과 대립에 대한 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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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족이란



‘세계가족’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국가간 경계를 넘어선 장거리 가족을 말하는 걸까? 이를 위해서는 먼저 ‘세계가족’과 구별되는 ‘일국가족’을 알아야 된다. 일국가족은 기존의 가족 개념으로, 가족의 구성원들이 모두 '같은 장소, 국적, 모국어'로 결합되어 있는 가족형태를 말한다. 일국가족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가족의 본질’로 여겨져 왔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발견되는 이주 노동자 가정부, 대리모, 서로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가족, 한 지붕아래에서 다른 국적을 가지고 있는 가족 등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될까? 이들은 기존 가족의 본질적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들은 함께 살고 있다. 인종, 국가, 문화, 종교 등의 경계를 넘어서 장거리 사랑을 행하고 있다. ‘세계가족’이란 이들을 말한다. 세계가족은 기존 가족의 본질인 '같은 장소, 국적, 가족'을 모두 별개의 요소로 만들어버린다. 그렇다면 세계가족은 ‘다지역 가족’이나 ‘다민족 가족’ 두 유형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이는 훨씬 더 다양하고 분화된 세계가족을 너무 편협하게 규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가족의 개념에서 세계가족의 규정은 지구화되고 불명확한 수많은 가족 유형을 포괄한다. 그러므로 세계가족의 다양성과 불명확함은 오히려 세계가족의 본질적 특징이 되어 ‘정도차이’가 세계가족을 규정하는 기준이 된다. 즉, 현실의 다양한 가족 형태는 일국가족이나 세계가족으로 명확히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국가족이나 세계가족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 지 ‘정도차이’만 가질 뿐이다.


이렇게 세계가족을 규정하면 ‘문화’의 개념도 달라지게 된다. 세계가족은 여러 문화를 공존하고 있기에 ‘문화’자체가 모순이 되며 세계가족을 비정상으로 만든다. 세계가족에게 ‘나의 문화’, ‘너의 문화’란 없으며 이들 사이의 이동 역시도 없다. 세계가족에게 문화는 선택이 아니라 그저 그 자체로 다 용납된다.


 


지구적 운명공동체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앞서 얘기했듯이 세계가족에서 기존의 가족 개념의 본질적 요소인 ‘장소, 국적, 가족’은 모두 분리되어 별개의 요소가 되어간다. 이는 초국적 국가, 기업에 이어 초국적 가족의 등장을 의미한다. 국민, 종교, 종족을 넘어 국민들을 초국가적으로 연결하는 ‘세계시민정치화’가 이루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양상이 미래의 전망이 될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변화하는 가족의 형태와 더불어 변하고 있는 다른 사회 영역들을 관찰하여 어떻게 다양한 운명공동체가 형성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첫 번째 예가 장기이식이다. 장기이식은 국경이나 거리에 상관없이 의료기술에 의해 두 타자의 신체의 융합을 가능케한다. 이때의 융합은 인종, 계급, 국적, 종교를 나누지 않는다. 서로 다른 이러한 요소들이 어떠한 구별없이, 자발적으로 연결된다. 연결된 후에는 분리될 수 없다. 즉, 이러한 접촉 없는 결합 또한 현실 사회의 인간조건이 되고 국민국가 아래에서 진행되어 세계시민정치화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운명공동체는 국민국가식 단일문화의 종말을 알린다.


두 번째로는 세계시장을 말할 수 있다. 기업들은 더 이상 국민국가에 결박되어 있지 않다. 기업들은 통신기술과 정보기술을 최대한 활용하여, 이익을 수출하기 위해 세계시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거대기업집단인 콘체른내에서 국경을 초월한 노동을 조직함으로써 세계적 노동력을 끌어오고 투자지, 생산지, 주거지 등을 국경을 초월한 분리를 함으로써 세계적 생산 라인을 형성한다. 즉, 민주적 통제장치로부터 경제적 이해관계가 자유로워지면서 지배와 정치가 분리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취업 노동 역시 마찬가지다. 시장이 세계로 가면서 노동시장 역시 국경을 초월해 이루어지고 있다. 노동자들은 같은 나라 사람들과 경쟁할 뿐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와도 경쟁한다. 그들에게 일자리를 뺏기지 않으려 하고 그들에게 적대감을 품는다. 이는 한편으로 세계시민정치화가 된다해서 의식과 태도 역시 개방적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세 번째로는 종교다. 세계시민정치화가 되면서 종교들 역시 다양해지고 그들이 모시는 신들 역시 증가하고 있다. 더 이상 유일신을 운운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신도들이 다양한 영역에 분포되어버렸고 타종교의 신도들과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종교 간 갈등 상황 역시도 더 쉽게 불러올 수 있음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기후변화다. 기후는 자연과 사회를 결합시키며 지구적이다. 그러므로 전 세계가 기후변화에 영향을 받으며 기후변화에 책임을 다같이 책임을 나누어야 된다.

 

이렇듯 가족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 영역에도 운명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이는 곧 위험공동체도 형성되었음을 말한다. 지구적 타자가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고 그들의 삶의 방식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기후변화나 테러와 같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세계적 공존을 해야하며 이는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합된다. 세계시민정치화는 일상적에서부터 경계를 붕괴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상관없이 개인, 집단, 사회는 이에 동참하게 된다.




장거리사랑의 문제 1) 가사노동 이주여성 : 먼 곳으로부터의 모성애



<장거리사랑>은 세계가족의 구체적 예시 중 하나로 가사노동 이주여성을 들고 있다. 가사노동 이주여성을 세계시민적 관점으로 탐구함으로써 남녀 사이의 평등 실현 아래에 또 다른 불평등 구조가 내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세계적 불평등 관계가 일국가족 내부로 들어옴으로써 지극히 ‘개인적인’모습으로 불평등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포착할 수 있다.


가사노동 이주여성은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가 더 이상 반숙련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자 서구의 산어베착 아닌 서구의 개인 가정으로 가는 길이 추구되는 상황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남녀의 분업이 일어나면서 아이와 노령층을 보살필 시간이 부족하게 되었고 이를 외국인 도우미가 충당하게 되면서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노동자나 고용자 모두에게 ‘윈윈 상황’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고용자는 가사와 육아를 이주여성에게 맡김으로써 자신의 일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고 이주여성은 돈을 벌어 자신의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가사노동 이주여성’ 현상의 어두운 뒷면을 보지 못한 것이다.


서구 국가들이 이민법을 강화하자 이주여성들은 불법과 합법사이에서 추방을 염려하며 매일을 불안감에 떨며 보낸다. 이런 상황에서 부당한 착취가 자신에게 행해져도 어떠한 저항도 못하고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이주여성에게 가사노동을 전가하는 것은 근본적인 남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주여성이 갑작스럽게 사라지게 되면 남성은 변함없이 일에 전념하지만 여성은 가정일을 떠맡게 되는 상황이 온다. 결국 이주여성 가사노동은 이러한 남녀 문제의 임시적 해결책일 뿐이다. 게다가 가사노동 이주여성의 가정은 엄마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또다른 이주여성을 채용한다. 즉, 돌봄의 지구적 연쇄가 생기는 것이다.


이로부터 친모와 아이의 관계는 흔들리게 되고 이주여성은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즉, 결핍은 계속해서 결핍을 낳고 곁에서 아이를 돌봐야한다는 ‘모성애’라는 관념은 흔들리게 된다. 결국 ‘가사노동 여성이주’라는 세계가족 현상은 윈윈 상황이라고 할 수 없다. 이 현상은 비용, 이익의 비대칭적 분배를 함으로써 근본적인 불평등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며 ‘남녀분업’의 근본적인 문제를 회피하게 한다. 또한, 네트워크가 넓어지면서 이러한 사회적 위계질서는 더욱더 심화될 거라 예상된다.




장거리사랑의 문제 2) 저의 생모는 스페인산 난자입니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돈을 받고 대신 아이를 낳아주는 '대리모'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가장 친밀한 친족관계가 세계에서 형성이 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의료관광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 결부되는 규범은 이를 따라오지 못하여 기술과 규범사이에는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틈을 메우기 위한 여러 윤리적 논쟁이 생기게 되지만 의료기술의 엄청난 발전속도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갑작스러운 의료기술의 발전에 윤리적 논쟁은 불확실하게 되고 모든 입장은 상대화되었다. 허용의 범위와 금지의 범위의 기준이 모호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삶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가족에 대한 선택의 폭은 넓어졌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이를 적극 활용한다. 대리모에 대한 ‘선전’을 증폭시키고 긍정의 수사학을 통해 체외수정을 정당화하며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주어 수요를 늘린다.


그렇다면 윤리적 논쟁이 허물어지고 있다고 해서, 수요가 증가한다고 해서 ‘대리모’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대리모’ 현상 역시도 그 뒷면에는 사회적 위계질서의 어두운 측면이 존재하며 인간의 윤리적 측면에 대한 문제점이 있다. 대리모 아웃소싱회사는 그들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자유주의에 걸맞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이라고 한다. 아이를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한다. 또한, 이 서비스 역시 대리모는 돈을 벌고 아이를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이를 가지는 ‘윈윈 상황’이라 한다.


그러나 이 체외수정이 과정은 지나치게 기계적이다. 대리모들은 아이를 임신하는 동안 자신의 가정을 만나지도, 성관계를 갖지도 못하고 정해진 식단을 먹으며 정해진 장소에서 기계처럼 살아간다. 대리모를 사람이 아니라 완벽히 상품으로 취급하여 착취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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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모들의 생활 모습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태어난 아이는 자신에 대한 정체성에 혼란을 겪게 되지만 사회는 이러한 혼란에 대답해주지 않는다. 아이는 자신의 가장 본질적인 생물학적 뿌리를 잃어버린 채, 그 뿌리에 대해 그리워하며 상실감과 슬픔에 고통을 겪는다. 어쩌면 인간을 상품처럼 생산하는, 가장 비인간적인 행태가 만연하게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발전하는 미래에서 하나의 짜집기 가족 유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결국 ‘세계가족’이 늘어가고 있고 ‘세계시민정치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에서 이러한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고찰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장거리사랑에서 필요한 것



‘장거리 사랑’이 말한듯이 국경과 문화는 점점 허물어지고 있고 사회적 현상은 다양해지고 있다. 이로부터 생겨나는 새로운 문제들 역시 증가하고 있다. 잠시만 방심하면 이러한 흐름에 그대로 자신을 놓아버리게 되어 윤리적인 문제들이 순식간에 무너져버릴 위험도 있다. 이는 고스란히 개인에게 영향을 끼친다. 저자에 따르면 개인 모두는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운명적공동체이자 위험적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니 문득 인문학을 배우면서 정작 현실에서의 인간 문제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미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는데, 그에 대한 인식과 수준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한때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예멘 난민 사태'만 봐도 그렇다. 난민을 반대한 수많은 사람들이 보여준 거부감은 세계화가 진행되든 말든 우리나라는 준비가 안됐음을 보여준다.


세계화가 이루어질수록,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해왔던 것들은 더욱 흔들리기 마련이다. 저자는 당연히 사람의 본능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모성애’가 사실을 사회가 만들어낸 본성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제기한다.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자하는 욕망도 사실은 사회가 만들어낸 걸 수도 모른다는 의문을 제기한다. 세계의 흐름과 기술의 흐름을 못 따라간다면 이러한 의문들은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럴수록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의미를 묻고, 인간 자아를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윤리적 측면과 관계돼서 기술발전을 어디까지 허용해야하는지 범위를 설정하고, 이러한 범위를 기준으로 기술발전으로 인해 생겨나는 문제들에 대한 방안을 모색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된다.



[김량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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