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리는 모두 고아이기에

고아 이야기: 전쟁 속 두 여성의 사랑과 연대
글 입력 2019.01.26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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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고아이기에

고아 이야기: 전쟁 속 두 여성의 사랑과 연대





잠시 카페에 앉아 커피나 좀 마실 생각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3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5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을, 이렇게 책을 펼친 자리에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이 책 [고아 이야기]는 추리 소설도 아니고, SF도, 판타지도 아닌 역사 소설이다. 전쟁통에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이 두꺼운 소설이 뭐가 그렇게 재미있을까 싶은데, 엄청 재밌다. 재미있다 못해 읽고 나면 여운으로 인해 기운이 쭉 빠질 정도다. 추천사들이 입을 모아 말한 것처럼 이 소설 [고아 이야기]는 흡인력이 대단한 작품이었다. 노아와 아스트리드, 두 여자의 역사가 빠른 속도로 전개되면서도 시대적 디테일과 감정선을 놓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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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큰 줄기는 단순하다.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 독일군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가족에게서 쫓겨난 소녀 노아는 어렵사리 낳은 아이마저 기관에 빼앗기고 완벽한 혼자가 된다. 노아는 어느 날 갓난아기를 잔뜩 실은 유개화차를 목격하고 홀린 듯 그중 한 아기를 훔쳐 달아난다. 헤맨 끝에 도착한 곳은 서커스단. 그곳엔 아스트리드가 있었다. 독일군과 결혼한 유태인 아스트리드는 전쟁이 발발한 후,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라며 남편으로부터 이혼 통보를 받는다. 역시 유태인인 다른 가족들의 행방은 알 수가 없고, 아스트리드 역시 철저한 혼자가 된다. 그런 아스트리드가 거처로 삼은 곳이 바로 이 서커스단.


모든 사건은 노아가 서커스단에 들어오면서 벌어진다. 누구도 믿어선 안 되는, 그 불신 속에서 노아와 아스트리드는 거짓말로 서로를 속이고 자신을 감춘다. 하지만 오해와 갈등이 빚어질수록 되려 그들은 이 세계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서로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전쟁 속 서커스단에서 벌어지는 거짓말, 갈등, 연대, 사랑, 희망... 믿어선 안 되는 사람을 믿고, 사랑해선 안 되는 사람을 사랑해버리는 사람들. 그 믿음과 사랑은 정말 틀린 것이었을까?



나는 턱을 빳빳이 치켜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관객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면

서커스는 아직 죽은 게 아니었다.


이번에도 우리는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 고아 이야기 中



노아와 아스트리드에게 서커스는 단지 직업도, 취미도, 생존 수단도 아니다. 생(生), 그 자체다. 바깥세상과 단절시켜주는 든든한 벽이자, 소통과 연대로 가득한 집이며, 성취와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일터이고, 사랑이 피어나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철저한 혼자'가 주는 괴로움을 알기에, 모두 서커스에 필사적이다. 다시는 버려지지 않기 위해서. 집을 지키고,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희망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위태로운 줄 하나에 건다. 그들을 그렇게 필사적으로 만드는 힘, 그것은 바로 [희망]이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 전쟁통에서 누군가는 웃음과 환상을 위해 공중 그네 위에 발을 내디딘다는 사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큰 위로가 된다. 니체는 "세상에서 가장 고통받는 동물이 웃음을 발명했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현실이 괴로울수록 웃음을 찾고 유희를 탐닉한다. 죽이고 고발하고 버림받는 일이 가득한 사회는 서커스의 천막 아래로 사라진다. 의자에 앉는 순간 관객들은 서커스가 초대하는 환상의 세계에 기꺼이 몰입하고 빠져든다.


서커스에는 국경이 없다. 정치적인 이념도 없고 독재자도 없으며 폭력도, 죽음도, 슬픔도 없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이 있을 뿐이다. 아슬아슬한 묘기는 더욱 '순간'에 집중하게 한다. 무사히 곡예를 성공해낼 것인가, 사람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위태로운 공연을 감상한다. 가슴이 쫄깃해질수록, 웃음이 터져 나올수록 바깥세상은 아득해진다. 마치 지난밤의 악몽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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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낯선 곳이라도,

그리고 아무리 힘든 시간이라고 해도

함께 손을 잡고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편안하고 수월할 거라 믿어.


- 고아 이야기 中



어쩌면 우리 모두, 고아가 아닐까? 세계가 주는 고통 앞에 홀로 맞서야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고아라고 부른다. 7포 세대라는 뼈 아픈 농담이 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3포 세대. 여기에 인간관계와 내 집 마련을 포기하는 5포 세대, 그리고 꿈과 희망마저 포기하면 7포 세대가 된다. 포기할 것 많고, 해야 할 일은 많은 이 치열한 삶. 마치 전쟁 같다. 인기 드라마 <SKY 캐슬>만 봐도 그렇다. 공부가 지옥이다. 입시는 전쟁이다. 전쟁 같은 입시가 끝나면 종로에 늘어선 영어학원, 노량진의 고시촌이 제2의 전쟁터가 된다. 입사를 한다고 그 치열한 연극이 막을 내리진 않는다. 고된 하루 끝, 엘리베이터에 비친 내 얼굴은 노아와 닮아있다. 고통과 불안 앞에 맨몸으로 홀로 선 우리는 결국 노아이고, 아스트리드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하지만 우리는 노아와 아스트리드를 통해 배웠다. 비록 그 지옥 같은 전쟁 속에서도 "내 편"이 있다면, 고통을 나눠가질 "내 사람이" 곁에 있다면 우리는 웃을 수 있다.  학교를 마치고, 학원을 마치고, 업무를 마치고 돌아온 우리가 그럼에도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내 편"이 있기 때문이다. 집에서 나를 기다려주는 엄마, 내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친구, 상사의 뒷담화를 까며 감정을 공유해줄 동료. 수많은 고아 속 우두커니 선 섬이 되지 않는 것. 다리를 놓아 연결되고 소통되는 것. 그것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의지와 힘이 되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한 번도 공중 그네를 타본 적 없는 노아에게 아스트리드는 말한다. 나를 믿으라고. 나는 어떻게든 네 손을 잡을 테니까 너는 그냥 나를 믿고 몸을 던지면 된다고. 노아와 아스트리드, 두 여성이 보여주는 전쟁 속 사랑과 연대의 이야기.  아니, 이 책은 어쩌면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당신을 위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스펙터클한 동시에 따뜻하고 섬세한 소설을 기다려온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책, [고아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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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정보


제목: 고아 이야기(원제: The Orphan’s Tale)

분류: 소설 / 외국소설 / 미국 소설

지은이: 팜 제노프(Pam Jenoff)

옮긴이: 정윤희

출판사: 도서출판 잔

발행일: 2018년 11월 12일

판형: 130×195(mm) / 페이퍼백페이지: 504쪽

정가: 14,800원

ISBN: 979-11-965176-0-1 03840

CIP제어번호: CIP2018034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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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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