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12월 마지막 밤, 그가 찾아온다! 뮤지컬 미드나잇 [공연예술]

글 입력 2019.01.04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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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카베데다, 문 열어!

 

1937년 12월 31일. 모두가 잠든 밤, 신년을 맞이하고 축복하기 위해 한 부부가 춤을 춘다.


음악이 흐르고, 식탁 위에는 따뜻한 음식과 샴페인, 와인이 준비되어있는, 그야말로 완벽한 가정의 모습이다. 이때 들려오는 세 번의 노크 소리. 똑똑똑, 엔카베데다. 문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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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체제 하에 반역자를 속출해 처단하는 비밀 경찰, 엔카베데의 등장에 부부는 긴장한다.


문을 열어준 남편. 자신을 엔카베데라고 소개한 방문자, 비지터는 동료들이 자신을 태우러 올 때까지 잠시 실례하겠다며 집으로 들어온다. 부인은 겁을 먹고, 남편은 멋대로 구는 비지터를 침착하게 응대한다.


비지터가 집에 오래 머무를수록 그들의 불안감은 증폭된다. 부부는 비지터에게 이만 떠나줄 것을 요청하지만, 비지터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낸다. 그들이 한때 즐겁게 어울렸던 이웃들, 변호사 부부와, 아래층 과묵한 남자,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사람들. 그들이 잡혀가 무고하게 희생된 내막에는 바로 남편의 주도면밀한 고발이 있었던 것이다. 이웃과 가까운 사이였던 부인은 남편을 역겨워하지만, 비지터는 계속해서 그들이 서로에게 숨기고 있었던 추악한 민낯을 차례 차례 까발린다. 실은 부인 역시도 남편의 고발로 인해 이웃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고 그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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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었다!


부부는 서로를 비난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한다.


그들은 정말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눈 깜박할 새에 하루에도 몇 명이 잡혀가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시대다.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다음은 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평화가 얼마나 오래 갈 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이웃들을 팔아넘겨 얻은 보호권이 사실 아무런 효능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1막에서의 맨과 우먼은 독재 체제의 억압에 시달리는 개인으로 존재한다. 어제 끌려갔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오늘은 내가 아닐까 두려워하고, 오늘 끌려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숨죽여 안도할 수밖에 없는 나날. 이들을 방문한 비지터는 그야말로 악마같은 존재다. 부부는 그에게 잘못 보여 끌려가게 될까봐 전전긍긍한다.


그러나 부부의 위선이 폭로되는 2막에서는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체제를 살 찌우고 유지시키는 것 또한, 두려움에 떠는 개개인들임을 보여준다. 이들은 억압당하는 가련한 개인인 동시에, 체제 속에서 이득을 보고 살아남기 위해 적극적으로 동료를 팔아넘기는 또다른 지배계층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극 중 비지터는 시간을 멈추고 사람의 영혼을 뺴앗아가는 초인적인 존재, 악마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를 그저 악마로만 보는 것은 어쩐지 좀 단순한 해석 같아보인다. 비지터가 불러오는 고통은 그의 존재 자체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숨겨진 모습을 꺼내는 데서 오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2막에서 모든 비밀이 폭로되고 나자, 더 이상 부부는 비지터가 자신을 고문실로 끌고 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비지터가 더 입을 놀리지 못하도록, 그래서 더 이상은 자신들이 숨겨왔던 악한 모습들을 마주하지 않도록, 독재정권의 직속기관일지도 모르는 그를 잔인하게 공격하기까지 한다.


어릴 때, 이런 말을 들으며 컸다. 나쁜 짓을 저지르고 나서 마음이 아픈 것은, 동그랗게 생긴 우리의 마음 속에 뾰족하게 각이 선 모양의 양심이라는 것이 들어있어 그렇다고. 나쁜 행동을 하고 나면 이 뾰족한 양심이 뱅글 뱅글 돌며 마음을 찌르기 때문에 아픈 것이라고 말이다.


양심은 언제나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선명하게 속삭인다. 양심이 수반하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그렇게 양심에게서 멀어져 간다.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은 악마가 되어간다. 죄의식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양심의 목소리를 거부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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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지터는 말한다. 악마는 머리에 뿔이 달리고, 코에서는 불을 뿜는 모습이 아니라고. 오히려 길을 가다보면 가장 흔하게 마주칠 수 있는, 누구보다도 평범한 사람의 모습일 것이라고 말이다. 맨과 우먼 역시 특별하게 악랄한 인물은 아닐 것이다. 산만한 덩치의 장정들이 지하실로 끌고 가 위협한다면, 누가 정의와 도덕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선뜻 바칠 수 있겠는가? 주인공들의 이름이 따로 주어지지 않고 맨, 우먼으로 명명되는 것 또한 같은 의도일 것이다.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는 존재. 가장 위선적이고 동시에 가장 평범한 인물들. 그리고 양심은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끊임없이 되살아나, 우리가 악마임을 일깨운다.

 

비지터가 모든 비밀을 폭로하며 전개가 극적으로 흘러가는 2막에 들어서면, 유의미한 변화 두 가지가 눈에 띈다.


첫 번째, 성 역할의 반전이다. 1막에서의 부부는 전형적인 타입의 가정을 이루고 있다. 아름답고 연약한 아내와, 그런 아내를 지키는 듬직한 남편. 우먼은 남편과 이웃들을 밤낮으로 걱정하는 다정한 사람이다. 그러나 비지터가 부부의 악행을 떠벌리고, 나아가 아버지의 추악한 정체마저 들춰내자 우먼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비지터의 눈알을 뽑고 식칼로 그의 몸을 토막낸다. 그리고 그를 지키겠다던 맨은 막상 식칼을 손에 쥐자 못하겠다며 벌벌 떤다. 경악의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맨을 향해, 우먼은 전쟁 때는 더 했다고 외친다.


아버지가 지켜왔던 안온한 어린 시절, 그리고 전쟁. 전쟁 중 우먼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전쟁은 인간성을 파괴한다. 어쩌면 우먼은 파괴되기 전의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받아 왔던 울타리로서의 안전한 가정을 맨에게서도 기대했을지 모른다. 남자들이 지켜주는 세계에서 언제까지고 영원히 꼬마아가씨로 안주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맨과 우먼은 안전한 가정, 평범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각자 기성세대가 물려준 고정적인 성 역할을 답습하고 수행한다. 그리고 서로의 본모습을 지워가면서까지 간신히 지켜내던 환상은 그들이 외면했던 민낯이 폭로되는 순간 덧없이 부서지고 만다.

 

두 번째는 공간의 변화다. 비지터가 방문하기 전 그들의 가정은 그야말로 이상적이다. 당 내 고위간부의 집 답게 넓고, 따뜻하며 잔잔한 조명이 낮게 깔렸다. 아름다운 음악에 맞춰 부부는 춤을 추기도 하고 웃음소리도 넘친다. 끔찍했던 지난 1937년의죄의식은 묻어두고, 나만 조용히 눈을 감으면 평화롭고 행복한 신년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양심은 끝까지 살아남아 문을 두들긴다. Knock, Knock, Knock.


흔히 귀신이나 요괴, 악마와 같은 존재들은 주인의 초대를 통해 집에 들어올 수 있다고 한다. 비지터는 문을 두들겼고, 남편은 문을 열어 그를 초대했다. 그를 집에 들인 것이 남편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 하다. 맨은 비지터의 눈알을 뽑지도, 그를 토막내지도 못했다. 비지터가 그들 중 한 명의 영혼을 요구했을 때 그는 결국 창 밖으로 뛰어내려 자살한다. 비지터의 존재를 양심, 혹은 죄의식이라고 해석한다면 맨은 비겁자이지만 양심의 목소리에 여전히 귀를 기울였고, 결국 죄책감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먼은 강하다. 양심의 목소리마저 이겨낼 만큼 그렇다. 남편이 인간으로서 죽음을 택했다면 그는 악마, 비지터에게 영혼을 내어주고 살아간다. 그리고 우먼에게 남은 공간은 악마에게나 어울리는 공간이다. 악마가 악마의 모습을 하지 않는 것처럼, 지옥 역시 그렇다. 우먼이 갈 곳은 영원히 타오르는 불구덩이같은 곳은 아니다. 남편과 아버지가 떠나고 홀로 남겨진 공간, 그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안온하고 따뜻한 가정이 이제 영원한 지옥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지옥을 받아들인 우먼은 조용히 다가가 12번의 종을 울린다. 맨과 우먼이 선사했던 끔찍한 1937년은 지나고, 우먼이 홀로, 죄책감의 고통 속을 영원히 헤매야 하는 1938년의 시작, 영원한 지옥을 알리는 12번의 종소리.

 

*

 

돌이켜볼 때, 나 자신의 일은 언제나 어쩔 수 없는 것들이었다.


온 우주의 거대한 질서가 만들어낸 소용돌이에 휘말려 필연적으로 운명지어진 사건. 그러나 상대방의 일은 온전히 그 자신의 양심과 의지로 생각하게 된다. 작은 일 하나로 그의 의도를 의심하고, 인성을 판단했다.


사람에게는 다양한 모습이 존재한다. 우먼이 죽은 이웃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옹호하던 심약한 모습은 비지터의 눈알을 뽑고 그를 토막내는 모습 만큼이나 본모습일 것이다. 맨 역시 그렇다. 부인과 어울렸던 이웃들을 쪼잔하게 흉 보는 모습,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하는 모습, 자살할 정도로 죄책감을 시달리는 모습들이 모두 한 사람의 본심일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나 다층적이다.


나를 지나쳐간 사람들을 편협한 내 잣대로만 납작하게 판단하려 들고 색안경을 끼진 않았는지, 나 자신의 일은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정당화하고 양심의 목소리를 외면하진 않았는지, 또한 상대방에게는 비겁하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어 판단하려 들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며 다가오는 신년을 맞이하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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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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