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조수석 인형에서 직접 차를 모는 주인공이 되기까지, <범블비> [영화]

글 입력 2019.01.01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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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가 있다. 늘 내 편이었던 아빠의 죽음이 트라우마가 되어 꿈을 포기한 10대 아이. 재혼한 엄마와는 갈수록 서먹해지고, 새아빠와 이부동생하고는 좀처럼 가까워지질 않는다. 완벽하게 행복한 가족 사이에서 나만 겉도는 것 같아 외로운 아이는 아빠와 함께했던 취미인 자동차 정비에 매진한다.


어느 날 우연히 주운 다 쓰러져가는 차가 사실은 외계 종족이었고, 아이는 이 친구와 함께 지구를 위기에서 구하고 그 과정에서 심적으로 성장하며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누구나 이 얘기를 들으면 아주 전형적인 틴에이저 성장 서사의 메카물이라고 심드렁하게 반응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10대 소녀라면? 그것도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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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한 스토리는 최근 개봉한 <범블비>의 줄거리다. 주인공 찰리는 방황하는 10대 소녀로, 모든 기억을 상실한 범블비를 보살피며 특별한 우정을 쌓는다. 범블비는 찰리의 도움으로 지구까지 추격해온 디셉티콘을 물리치고 옵티머스 프라임과 재회한다.


이 간단한 줄거리만 두고 봤을 때 <범블비>는 평범한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스핀오프지만, 단순히 상업영화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평가받는다. 이 영화가 10대 소녀의 성장담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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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포머 1를 떠올려보자. 주인공 샘 역의 샤이아 라보프보다 여자친구 미카엘라 역의 메간 폭스가 더 화제에 올랐었다. 섹시하게 차를 고치던 메간 폭스가 엄청난 임팩트를 준 이후 트랜스포머 시리즈는 마치 전통처럼 ‘트랜스포머 걸’의 역할을 여배우들에게 부여했다.


하지만 <범블비>의 찰리는 다르다. 찰리는 미카엘라처럼 메카닉이지만 섹시한 자세로 차를 고치거나 오토바이에 올라타지 않는다. 같은 메카닉이어도 미카엘라는 내내 너드 남주의 옆자리에 앉아있고 찰리는 직접 차를 몰며 지구를 위기에서 구한다. 이는 정말로 장족의 발전이다. 여배우가 잔뜩 성적 대상화되고 눈요깃거리로만 존재하는 역을 맡는 것은 오랜 할리우드의 악습이지만, 트랜스포머 시리즈는 특히나 이런 현상이 심했기 때문이다.


<범블비>는 기획 단계부터 이를 고려한 결과물이다. <범블비>의 각본가 크리스티나 허드슨은 “액션이 소년들을 위한 장르라는 것은 일종의 미신이다. 30, 40대 백인 남성이 아닌 나 같은 사람이 영웅이 되는 걸 보고 싶다. 그런 롤모델과 영웅 캐릭터를 갖고 싶었다.”라고 말한 전적이 있다. 그는 아시안계 영국 여성으로 현재 <배트걸>의 각본을 집필 중이다. 감독 트래비스 나이트는 <범블비>의 주인공을 10대 소녀로 내세운 이유가 그 동안 시리즈의 수동적 여성 캐릭터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것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내 회사가 만튼 첫 장편 작품은 <코렐라인: 비밀의 문>이었는데, ‘애니메이션 여자 주인공은 공주나 요정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거절 받았고 이때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결국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여전히 이러한 문제가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먼저 이런 것들을 해결하면 다음엔 반응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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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범블비>는 그동안 트랜스포머 프랜차이즈가 답습해온 방식을 시원하게 깨버린다. 그래서인지 <범블비>도 <스타워즈:라스트 제다이>만큼 팬보이들의 공격을 받고 있다. <라스트 제다이>가 여성 주인공을 내세우면서 스타워즈의 전통을 깨고 불필요하게 PC해졌다며 부르짖던 그들은 <범블비>에서도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걸 비아냥대며 범블비와 찰리의 유대가 얄팍하다고 비웃는다.


예쁘고 섹시한 여자친구를 꼬시기 위해 범블비를 부려먹던 샘이 찰리보다 범블비와 더 깊은 유대감을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배 아파 죽으려는 팬보이의 아집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동안의 트랜스포머 영화는 외계종족이라고 둘러댄 슈퍼카 전단 영상같았다면, <범블비>는 인간 소녀와 외계 종족의 우정을 서정적으로 잘 그려냈다. 눈이 아플 정도로 잔뜩 폭발만 하는 킬링타임 무비에서 그저 도구처럼 느껴졌던 오토봇에게 처음으로 정이 갔다.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함게 극복하며 성장해나가는 범블비와 찰리의 우정은 결코 얄팍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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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블비>가 완전무결한 영화라고는 할 수 없다. 대다수가 지적하듯이 할리우드 가족주의 서사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오토봇의 새파란 눈만큼 백인중심적으로 보인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블비>가 갖는 의의는 여자 아이도 로봇과 함께 뛰는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내 세대가 멋진 차를 몰고 다니는 남자의 옆자리를 채우는 여자 역할만 봐왔다면, <범블비> 세대의 여자아이들은 얼마든지 메카닉을 대동한 이야기의 주인공을 꿈꿀 수 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며 꼬마 남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저 아이에게는 메카닉 장르의 주인공이 당연히 남자이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블비>의 히로인 헤일리 스타인펠드는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긍정적으로 답변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이제야 여성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졌다. 여성 작가 크리스티나 허드슨이 아직 어린 여성들의 성장을 잘 다뤄줬다. 여성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여성의 목소리로 쓴다는 것은 굉장히 좋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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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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