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부조리의 바다를 표류하는 청년에게, 연극 '라플레시아'

글 입력 2018.12.07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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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라플레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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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청춘은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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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벽은 라플레시아의 넓은 꽃잎을 연상케 한다. 이와는 반대로 하얀 배경과 푸른 조명은 시리거나 시들어버린 청년의 모습을 담는다. 연극 ‘라플레시아’는 그렇게 불완전한 수에 불과한 미생의 이야기를 다룬다.

 

‘미생(未生)’만큼 오늘의 청춘을 대변하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아직 완전히 다 피어나진 않았지만, 어느 순간 이 상태에서 멈춰버릴 것 같은 불안이 공존하는 청년은 언제나 불안하고 방황한다. 사실 당장의 문제는 ‘취업’이란 생계유지의 문제이겠지만, 길게 본다면 자아 정체성을 형성이란 고민에 당착한다. 취업을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외람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취업이 능사는 아니며 구직 활동 이후에 사내 생활 속에서 더 큰 갈등을 맞이할 수도 있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신의 장난이라 하겠다. 퀸의 노래 가사처럼 어찌됐건 바람은 불고, 인생은 흐르기 때문이다. *(Anyway the wind blows... - Bohemian Rhapsody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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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스펙도 없고 특별한 재능도 없는 주인공 구진남은 우여곡절 끝에 취업에 성공한다. 요즘말로 ‘취뽀’한 셈이다. 구직을 했다는 사실도 잠시 그는 자신이 ‘왜 뽑혔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진다. 그럼에도 취업난이 어렵다보니 건설적인 고민보다 ‘이곳에서 최선을 다하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며 열정신입사원으로 제 몫을 다하려 한다.

 

언제나 삶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사회는 열심만으로 온전한 보상을 가져다주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회사의 분위기를 아무것도 모르는 구진남은 열정과 성실로 최선을 다한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열정을 쏟아 붓지만, 사원들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의 호의에 응답한다. 어딘가 모르게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 회사는 사내 정치가 팽배한 곳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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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 회사는 사내정치 뿐만 아니라 상여금, 승진,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갈등이 다양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구진남의 등장 이전부터 회사는 사실 썩을 대로 썩어 있던 것이다. 다만 극 중 구진남의 등장을 통해서 회사의 곪은 부분이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작품은 구진남의 열정과 반비례하는 사원의 모습, 그 안에 있는 여러 갈등의 모습을 표현하면서 사회 곳곳에 만연한 직장 내 따돌림, 계약문제, 인사비리 등을 비판한다. 그렇게 ‘라플레시아’는 구진남을 중심으로 직장 내 부조리를 다각도로 그려낸다.

 



부패, 순수에서 타락에 이르기까지



본래 식물로서 ‘라플레시아’의 또 다른 이름은 ‘시체꽃’이다. 꽃가루를 옮기는 과정이 끝나고 나면 냄새를 풍기며 썩어버리기에 이러한 별칭이 생겼다. 이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관점에 의해 지칭된 단어다. 라플레시아는 생존 방식으로서 최선을 다하여 냄새를 풍길 뿐이다. 하지만 진선미를 추구하는 인간에 있어서는 라플레시아의 번식은 그저 시체꽃이라 불리는 원인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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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작품 속 구진남의 위치도 인간의 시선에서 비춰지는 라플레시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는 어렵게 구한 직장에서 최선을 다하며 사원으로서 인정받길 원한다. 하지만 몇몇의 사원들에게 구진남은 그저 사내 정치의 소모품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구진남은 직장 내 부패의 늪에 빠지게 된다.


구진남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악취를 풍기는 라플레시아와 처지가 비슷하다.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정과 성실로 제 몫을 다하려 하지만 기존의 사원들에 있어 구진남은 무색무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인간이 라플레시아의 존재를 시체꽃이란 이름을 붙여 어딘가 모르게 꺼려지는 느낌을 주는 것처럼, 구진남 또한 별 다른 색이 없는 존재이기에 아무데나 사용 가능한 존재로 다가온다. 개별의 주체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닌 타인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라플레시아와 구진남의 존재는 기구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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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전개 과정에서 인상 깊은 것은 단연 분장이다. 맨 처음 배우들은 민낯에 가까운 얼굴로 등장한다.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신입사원 구진남을 반기는 직원들이다.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직장 내 부조리가 수면 위로 드러남에 따라서 배우들은 조금씩 분장을 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피부를, 그 다음에는 아이 섀도우를, 뒤이어는 아이라인을 그리면서 처음과는 다른 모습으로 연기를 한다. 이때 달라지는 것은 배우의 얼굴뿐만이 아니다. 분장이 진해짐과 동시에 사원들은 갈수록 난폭해진다. 이성을 잃고 마는 것이다. 자신을 애써 치장하고, 지나친 감정의 동요는 본래 순수했던 자신의 모습을 상실하게 만든다.

 

더욱이 구진남의 경우는 타의에 의해서 분장되는 존재다. 이제 막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은, 사회생활이라곤 아무 것도 모르는 구진남은 사원들과 사내정치의 압박에 의해서 변해간다. 사원들은 너도나도 앞장서서 구진남을 분장시킨다. 그렇게 만들어진 구진남은 열정을 가득 안고 첫 발을 내딛던 순간과는 다른 우울과 무기력의 인물로 무너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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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하다 싶을 정도로 진한 분장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현실의 심각함을 대변하는 시그널은 아닐까 싶다. 지금도 사회 곳곳에서는 떠오르지 못한 부조리가 넘쳐난다. 작은 사회라 대변하는 학교에서도 따돌림, 편가르기 등 부정을 저지르는 일들이 만연하다. 그렇다면 일상은 어떤가. 패스트푸드점 갑질 등 자신만 생각하는 무한이기주의로부터 타인을 깎아내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결론은 간단하다. 맨 처음 등장한 순수한 민낯처럼 경쟁의식 없이, 갑질관념 없이 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면 된다. 맹자의 성선설 따위 불신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반부패연극 ‘라플레시아’는 세상을 향해 이유 있는 외침을 던진다. 어찌 보면 썩은 냄새를 풍기는 시체꽃에 불과하지만, 있는 그대로로 보면 라플레시아는 살아있는 생물로서 제 가치를 다하고 있다. 희생양, 소모품, 대체재로 환원되는 직장 내 부조리를 그대로 맞이하는 것은 완생이 되지 못한 미생들의 몫이다.


사회는 불완전한 존재인 청년들이 부패를 마주하지 않고 완생으로 나아갈 수 있게, 더 이상 청년을 소모의 대상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라플레시아' 속 구진남은 어디에도 있고 언제라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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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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