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팔이] 3화: 당신을 설레게 했던 어린 시절의 무언가

애니메이션 <폴라 익스프레스>: 그렇게 나는 이야기를 사랑하게 되었다.
글 입력 2018.11.30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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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당신을 설레게 했던 어린 시절의 무언가


어릴 적 비디오방을 유독 자주 갔다. 사교성 좋은 우리 엄마가 동네 비디오방 주인아줌마(일명 재란이 아줌마)와 베프를 먹었기 때문이다. 마침 자식들도 같은 초등학교에 다녔던지라 두 아줌마는 학부모 겸 친구가 되어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나는 덩달아 재란이 아줌마의 비디오방과 친구가 되었다.

비디오방을 혹 모르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 설명을 드리자면, 그냥 도서관에 책 대신 비디오들이 꽂혀있는 데라고 생각하시면 된다. 물론 재란이 아줌마의 비디오방은 도서관보다 훨씬 더 통로도 좁고 꼬불꼬불했는데 그 미로 같던 공간이 좋았던 건지 앞뒤양옆으로 빼곡히 꽂혀있는 비디오들이 좋았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그냥 무턱대고 그 공간이 꽤 좋았다. 별별 비디오들이 다 있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부터 <외로운 옆집 누나의 어쩌구...>까지 참으로 종류도 다양했다.

비디오방을 자주 가는 만큼 비디오도 많이 빌려왔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많이 본 건 아니었고, 특이하게 그 때부터 한 영화를 보고 보고 또 보는 걸 좋아했던 탓에 최소 3번 이상은 돌려본 비디오들이 대출 목록의 주를 이루긴 했다. 대표적으로 기억나는 것들이 몇 개 있다. 장서희와 차승원 주연의 <귀신이 산다>. 초딩 꼬맹이가 이걸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귀신으로 나오는 서희 언니가 예뻐서 그랬던 거 아닐까. (그 예뻤던 서희 언니는 차후에 왜 너는 나를 만났냐며 점을 찍고 나와 복수를 꿈꾼다.) 애니메이션 <오세암>도 있다. 부모를 잃은 5살 아이가 장님 누나와 함께 절에 들어가 겪게 되는 이야기라서 ‘5세암’이다. 14년이 지난 지금도 결말을 떠올리면 눈물이 핑 돌만큼 명작이다. 다시 보고 싶은데 당최 파일을 구하기가 힘들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도 빼놓을 수 없다. 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내 첫사랑은 ‘하쿠’다.



애니메이션 <폴라 익스프레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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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넷플릭스를 뒤적이다가 우연히 이 애니메이션을 발견했다. 스틸컷에서부터 왠지 모르는 익숙함이 풍겨 나왔다. 딱 보아하니 이 친구, 재란이 아줌마네 비디오방 출신인 것 같았다. 신난다고 찜해놓고 후다닥 밥 먹고 들어와서 보기 시작했다. 하도 오래 전인지라 모든 부분들이 세세하게 기억나진 않았지만 익숙한 장면과 인물들이 등장했다. 잊고 지내던 어린 시절의 친구를 우연히 다시 만난 느낌이었다. 정말 눈물 나게 반가웠다.

내용은 이러하다.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산타의 존재를 의심하는 소년의 집 앞에 어마무시하게 거대한 북극행 기차가 도착한다. 대뜸 내려서 탈지 말지 물어보던 기관장은 소년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쿨하게 열차를 출발시키고, 고민하던 소년은 가까스로 Polar Express에 오른다! 아름답고 기상천외한 여정의 끝에 마침내 이들은 산타가 있는 북극의 난쟁이 마을에 도착한다. 하지만 소년한테는 아무래도 루돌프의 종소리가 들리지 않고 산타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소년은 산타를 믿기로 다짐한다. 그러자 기적처럼, 산타가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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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산타에게 선물로 받아온 루돌프의 종을 동생의 귓가에 흔들어주자 동생은 너무 아름다운 소리라며 손뼉을 쳐댄다. 하지만 소년의 부모님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며, 종이 고장 났다며 안쓰러워한다. 차츰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동생조차 종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소년의 귓가에는 어엿한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루돌프의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지.
중요한 건 이 열차가 어디로 향하는지가 아니라
네가 이 열차에 올라탔다는 거다.”

- 기관장의 대사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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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귓가에 아직까지도 종소리가 울릴 수 있었던 이유는 종소리가 들릴 것이라는 소년의 믿음 덕분이었다. 2004년 개봉, 그 후로 14년이 지나 이 애니메이션을 다시 만난 내가 그저 단순한 추억과 즐거움 이상의 감정을 느낀 이유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4년이 지난 이 애니메이션을 흔들었을 때 여전히 내 귓가에 설렘의 종소리가 들려온 이유는 내가 아직까지 이야기의 따듯한 힘을 너무나도 명백히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비디오방을 전전하던 꼬맹이는 결국 20대 중반이 된 지금, 사람과 세상과 사랑에 뿌리가 닿아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겠다는 멋진 꿈을 꾸고 있다. 나는 아직도 여전히 이야기가 나에게 설렘과 위안을 줄 수 있음을 명백히 믿는다. 이야기가 나의 시선과 울림을 담아내는 따듯한 그릇이 될 수 있음을 역시 믿는다. 그 믿음이 내가 재란이 아줌마의 비디오방을 통해 이야기라는 것과 친해지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아직까지도 이 친구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이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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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소년을 설레게 한 것은 종소리와 산타였고, 어린 나를 설레게 한 것은 비디오방과 이야기들이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어린 당신을 설레게 했던 것은 무엇인가. 영화도 좋고, 책도 좋고, TV 프로그램도 좋다. 장난감도 좋고 친구도 좋으며 장소도 좋다. 무엇이든 좋으니 나는 당신이 그것을 하나만이라도 떠올려보기를 감히 바란다. 분명 있을 것이다. 오래도록 잊고 있었을 지라도 잘 생각해보면 분명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우리는, 꽤 소박한 많은 것들에 설레어했기 때문이다.

완연한 연말이다. 숨을 쉬는데 입김이 나와서 이제 진짜 겨울이 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험기간이다. 시험기간인데 이야기를 사랑하게 된 나는 공부 따위 화끈하게 제껴버리고 열심히 영화와 애니메이션과 책을 흡입하고 있다. 그래도 나한테는 이게 공부려니 하며 애써 나 자신과 사이좋은 타협을 하고 있다. 정말 좋은 이야기꾼이 되려나보다.

날이 춥다. 다들 감기 안 걸리시길 바란다. 난 이미 한 번 걸렸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으로, 다들 추억하고 설레어하는 따듯한 겨울 보내시길 바란다.





+) 이 애니메이션의 놀라운 점 1: <백 투더 퓨쳐> 시리즈, <포레스트 검프>, <캐스트 어웨이> 등을 연출한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작품이다. 어쩐지 이야기 퀄리티가 남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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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애니메이션의 놀라운 점 2: 이 기관장 아저씨, 어디서 많이 본 듯 낯익지 않나? 그렇다. 톰 행크스이다. 톰 행크스를 본따 캐릭터를 디자인 했다. 더욱 놀라운 점은, 톰 행크스가 소년과 기관장 아저씨, 산타를 포함해 1인 6역의 목소리 연기를 한다. 만능 재주꾼 톰행크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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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애니메이션의 놀라운 점 3: 2004년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한 수준의 CG 퀄리티를 자랑한다. 요즘에 나왔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아트버스터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아름다운 영상미를 자랑한다.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하니 시기도 지금과 딱 맞는다. 추천한다는 얘기다. 강력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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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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