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angle] 완벽한 날 3. 편지

마지막으로 이 말을 하면 될 것 같았다
글 입력 2018.11.2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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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날 2-2.



*


여름 편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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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angle}
-여름빛 물-
완벽한 날 3. 편지



[7월 5일]



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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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톡톡



가벼운 빗소리에 묵직한 한숨을 올리며 아침을 맞이했다. 비 오는 날의 아침. 어젯밤에 내리기 시작한 비가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럽다. 어제 몇 시에 잤는지도 모른다. 새벽 두 시가 넘어서 시계를 확인하고는 한참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자고 싶은데, 잘 수가 없었다. 어제의 대화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사실 그 대화를 계속해서 곱씹어 보다가 늦게 자버렸다. 참 특이한 대화라며 이불을 한 번 더 몸에 감으며 생각했다. 희미한 회색빛 아침이 겨우 내는 햇빛을 흰 벽이 반사 시키며 방을 그나마 밝게 비추고 있었다.


회색, 회색, 내가 떠오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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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아쉽지만.

씻고 조식을 먹기로 했다. 어젯밤 내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요동쳤다. 최근 듣던 꼬르륵 소리 중에 제일 요란했다. 어쩌면 내 인생을 통틀어서 제일 요란했었을 수도. 아침이라 또 배가 고프진 않지만 내 배가 안쓰러워서 먹기로 했다. 오늘은 엽서 종이와 펜도 함께 들고나왔다. 고마운 장소에 고마움을 남겨야 한다는 마음에.

토스트기에 식빵을 올렸다. 어제를 교훈 삼아 타이머를 훨씬 줄였다. 털컥! 살짝 노란 빛이 되었다. 더 구워졌으면 좋겠는데. 다시 한번 손잡이를 내렸다. 털컥! 탄 빵이 튀어 올랐다. 말도 안 돼 갑자기 그렇게 타버리기야? 웃픈 한숨을 내쉬었다. 버리고 다시 구울까, 식빵 아까운데, 시간이 없어서 그냥 먹기로 했다. 어제보다는 그래도 덜 탄 것 같고 바삭하니 맛있겠지, 잼을 바르면 맛있겠지, 먹어도 될 이유를 쪼개고 쪼개 만들어낸다. 

하얀 엽서 종이 위에 글귀를 적었다. 첫날 문 앞에서 나를 계속 생각하게 했던 그 글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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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선, 반짝반짝 빛나는 십 대.

자물쇠 채워진 시간, 단단한 이십대.

느슨해지는 삼십 대. 초조한 사십대.

가끔은 희망과 약속의 시간이 있는, 버팀의 오십 대.

지금은, 육십 대.

그리고 난 단순하고 헌신적이고 싶다. 떡갈나무처럼.


- 메리 올리버. 완벽한 날들



처음에는 그가 말하는 이십 대를 읽으며 나의 이십 대는 어떤지, 고작 2년 하고도 조금 더 살긴 했는데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겹쳐지는 건 아빠였다. 아빠의 사십 대가 초조했을까, 지금의 오십 대에 희망과 약속의 시간이 있으실까. 메리 올리버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계속 그렇게 돌고 도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메리 올리버는 그렇게 말하네, 나는 어떨지, 메리 올리버는 그렇게 말했네, 아빠는 어떠실까, 메리 올리버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뱅글뱅글 생각을 맴돌면서 나는 완벽한 날들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얀 엽서 위에 검은 글씨뿐이지만, 거기에 다소 급하고 아침이라 피곤한 손길로 이어지는 글씨였지만, 지금 아침에 떠오르는 마음을 그대로 적어내렸다. 까만 글씨에는 표현된 고마움을 흰 여백에는 미처 표현하지 못한 고마움을 꽉꽉 채웠다. 다시 올 수 있을까, 그때에도 이 엽서가 남아있을까 라며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글이 모여있는 곳에 살며시 세워 놓았다. 40분. 20분이 남았다, 얼른 나갈 준비를 해야겠다.



첫날 입고 왔던 노란 옷을 급하게 걸쳤다.

노란 불.

어제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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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여행이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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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와서 체크 아웃을 하고 커피를 받았다. 넓은 창가에는 여름비가 예쁘게 내리고 있었다. 예쁘게. 나는 창가에 앉았다. 여름비를 닮고 싶었다.


또다시 하얀 엽서를 꺼낸다. 세 장 꺼낸다. 미리 준비한 편지지도 꺼낸다. 편지지는 여름을 닮은 초록색이었다. 평소 마음을 잘 전달하지 못하는 사람인지라 이번 기회에 뭐라도 써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편지, 편지, 편지, 아침부터 편지쟁이가 돼버렸다.


그냥 흰 엽서를 주기에는 아무리 여백이 좋다지만 허한 것 같아서 뭘 그릴까 고민하다가 여행 동안 만난 것을 그리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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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구름

여름 바다

여름 비



*



정말 소중한 사람인지라 편지지에 따로 글을 쓰면서 그가 자꾸만 떠올라 울컥울컥한다. 그래서 내가 그를 평소에 곰곰이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그냥 터져버려서. 콸콸콸. 그래도 계속 쓴다, 지금 아니면 또 얼마간 아무것도 안 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으휴 잘 터지는 눈물샘 어디 가지 않았다. 여린 눈물주머니는 그렇게 나를 이루고야 만다. 코를 훌쩍거렸다. 코감기 걸린척했다. 물이 많이 고인다 싶으면 아무 생각 없이 비 내리는 창가를 바라봤다. 엽서로 옮겨 친구에게 장난스러운 글을 쓰기도 했다. 그렇게 제일 먼저 쓰기 시작한 편지지는 제일 마지막에 완성되었다. 마음이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글을 썼다. 버스를 예약했다. 결국 나는 저녁에 가기로 했다.

음, 막연하다. 돌아가야 할 일상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아직 돌아가지도 않았는데.

어제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흠, 떠나려니 마음도 갈피를 못 잡는 것 같다.



*



"잠깐 위에서 식사하고 올게요, 편하게 계세요"



뒤돌아보니 이 공간에 나 혼자뿐이었다. 음, 더 돌아다녀 보기로 한다. 이따가 완벽한 날들을 사기로 해서 그쪽 서가로 다가갔다. 우연찮게 작은 책에게 반해버렸다. 정확히는 제목에. '꿈수집가'. 이 책도 사야겠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통장 잔액을 머릿속에서 굴려본다. 그러다가 어젯밤에 읽던 만화책에서 필사해두고 싶어 찍어둔 글이 생각났다. 그걸 필사하기로 했다.



*



같은 테이블에 놓인 꽃을 보니

노래 하나가 떠올라 적었다.

내가 힘들 때 괜스레 위로를 많이 받았던

그런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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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꼭 맞추어 어제에 도착했습니다"


...


아, 나도 어제로 다시 도착하고 싶다.

마음이 불쑥 튀어나온다.



*



슬슬 가야겠다. 마음에 둔 책을 사기로 했다.


"완벽한 날들"

"꿈수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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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가 다치지 않게 조심히 가방에 담고, 천천히 짐을 싸고, 책 두 권을 들고, 문을 나섰다.


비가 안 오는 줄 알았더니 부슬부슬 우산을 쓰기 애매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쓸지 말지 고민을 하다가 그냥 간다. 잠깐 뒤돌아봤는데, ..., 잠깐 뒤돌아봤다. 가다가 결국 우산을 썼다. 이럴 비였으면, 차라리 안개가 나았지 않았을까. 아닌가, 다른 이들에겐 불친절할 수 있겠구나.


발걸음을 옮긴다.

아, 여행은 아직 조금 남아있다.



*



맥주를 마시러 왔다. 뭘 마실까 하다가 흑맥주를 시켰다.

이유는 아직 안 마셔봤고, 방금 카톡으로 친구와 흑맥주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완벽한 날들을 펼쳤다. 완벽한 날들, 생각해보면 여행 오기 전만 해도 너무 어색한 말이었는데, 이제는 너무 친근해져 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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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까지는 3시간 정도 남았다.


뭘 했냐면…. 내게 다가온 이곳의 강아지를 쓰다듬어 주다가, 책을 읽다가, 옆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를 보다가, 책을 읽다가, 나쵸를 조금씩 집어 먹다가, 맥주를 마시다가. 그럴 뿐이었다. 완벽한 날들을 천천히 읽으면서. 천천히.


그러고 있다가 강아지가 다시 내게 왔다. 내가 쓰다듬어주니 갑자기 내 손을 마구 핥는다. 나는 이런 적이 처음이라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렇게 하도록 두었다. 나는 강아지를 잘 모른다. 알긴 알지, 하지만 강아지의 언어는 잘 모른다. 그래서 막상 내게 달려드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다. 쓰다듬어 주었다, 잠깐 멈추니 다시 내 손을 마구 핥는다. 손이 강아지의 흔적으로 미지근해졌다. 그러다가 손을 슬쩍 치워 보니 내 다리를 핥는다. 너무 간지러워서 다시 내 손을 주었다.


갑자기 내 앞에 드러눕는다. 나는 이틀 전처럼 배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게 내가 강아지에게 전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인 것 같아서. 계속 의자에 앉은 채로 상체를 숙이고 있다 보니 허리가 아파서 잠시 손을 떼고 허리를 세웠다. 강아지가 내 손을 툭툭 치고 핥는다. 나는 다시 배를 쓰다듬어주었다. 장난기가 생겼다. 쓰다듬다가 멈춘다. 강아지는 다시 내 손을 툭툭 치며 다시 쓰다듬으라고 말한다. 나는 그렇게 알아들었다. 사랑스럽다. 너는 사랑 받을 줄 아는구나.



사랑받을 줄 안다는 게 뭘까.

사랑받을 줄 안다....사랑을 받을 줄 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작 하루 이틀 만남인데도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을 향해 손길을 달라는 강아지의 모습이 그냥 사랑스러워 보여서. 이런 건가. 모르겠다.


그러다가 글을 몇 편 읽고, 꿈수집가 책에서 꿈 몇 조각을 읽었다. 생각해보니 어젯밤은 꿈을 꾸지 않았다. 최근 들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랬구나, 오랜만에 꿈을 안 꿨네. 푹 잤네. 5시 반이었다. 슬슬 갈 준비를 하면 되었다. 버스 시간까지 반 시간이 남았다.



음.


아까보다는 돌아갈 수 있는 마음이 조금 더 정리된 것 같다.

갈피, 책갈피가 가지런히 꽂힌 기분이었다. 내게.


음.


조금 더 마음을 다잡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오늘 하루를 다시 더듬어보았다. 어제도, 그 전날도.

그러다 생각났다. 그래 그러면 좋을 것 같아.

마지막으로 이 말을 하면 될 것 같았다.



"완벽한 날이었어."



밖은 여전히 여름비가 내리고 있었다.

부슬부슬



부슬부슬



-end-




*



Beh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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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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