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사람들, 브라보! - 발레 돈키호테 내한공연

마린스키 발레단 및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
글 입력 2018.11.25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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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 Quixote by Natasha Razina ⓒ State Academic Mariinsky Theatre (6).JPG
 


발레 공연은 살면서 세 번째였다. 비싼 돈을 내고 어린 나에게 호두까기인형을 보여주었을 엄마, 아빠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내 기억이 온전한 이후의 발레 공연은 세 번째다.


첫 번째는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의 마타하리 공연이었다. 그 공연은 생각보다는 내게 인상깊게 남지 않았다. 발레단이 공연을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다지 큰 감동이 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토리라인에 크게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리가 나빴던 탓도 있는 것 같다. 국립발레단의 공연을 생각하면 멋지게 빼입은 사람들만 기억난다. (나는 꼬리가 길게 내려온 연미복도 보았고 황금색 드레스도 보았다.)


두 번째는 프라하에서 본 발레공연이었다. 크리스마스였다. 호두까기인형 같은 발레공연을, 프라하에서, 크리스마스에, 그리 비싸지도 않은 가격으로 볼 수 있었다. 얼른 예매하고 잔뜩 기대했는데 이게 웬걸. 발레학원에서 일주일 연습한 것 같은 실력에, 음악은 오케스트라가 아닌 MR이었고, 공연장은 고등학교 체육관 같은 곳이었다. 알고보니 이 시즌 프라하에서는 이런 식의 간이 공연을 많이 열린다고. 어쨌든, 두 번째 기억은 별로 안 좋았다.

그러다보니 애초에 발레 공연에 대한 기대감이 별로 없었는데, 사촌동생이 이 발레 공연을 추천했다. 그 친구는 성인이 되어서도 취미 발레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고보면 성인이 되어서 취미로 발레를 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발레의 매력이 대체 무엇이길래. 그래서, 발레로 유명한 러시아, 그리고 그 러시아에서도 유명한 마린스키 발레단이 오케스트라와 함께 내한한다고 하여 공연장을 찾았다.


포스터.jpg
 

공연은 세종문화회관에서 진행되었다. 장장 세시간에 걸친(3막의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쉬는 시간을 포함한 시간이다) 공연 시간 탓에 살짝 긴장했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 충분해서 허리가 아프다거나 하는 어려움도 없었고, 스토리 전개가 없어 지루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스토리를 잘 몰라도 괜찮았다.

돈키호테는 그런 책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이름을 알고 한 마디 정도로 정리할 수 있는 명장면을 알고 있지만 읽지는 않은 책. 예를 들어 톰 소여의 모험이나 안나 카레니나 같은 책. 돈키호테가 미친 기사여서 풍차를 향해 달려나가고, 그에게는 산초라는 사이드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 이상의 줄거리는 몰랐다. 사전에 줄거리를 읽고 가기는 했지만 생소한 외국 이름들은 머리 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줄거리를 이해할 수 있을지 긴장하며 극을 보기 시작했지만 무척 익숙한 ‘열렬한 사랑 - 부모의 반대 - 해결사의 등장’이라는 구조 때문에 줄거리를 파악하기 좋았고, 무용수들의 표정과 몸짓 연기 만으로도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솔직히, 줄거리가 완벽히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니다. 특히 2막의 내용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갑자기 여자주인공이 없어졌는데, 뭔가 꿈 같은 상황에 나타났다? 뒤에 서있는 돈키호테는 왜 저기에 있는 것이며, 왜 돈키호테는 주인공들의 사랑을 엮어주려하는 걸까? 줄거리에 뚫린 구멍들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내가 공연을 보며 느꼈던 경외심이다. 무용수들에 대한 경외심.


Viktoria Tereshkina in Don Quixote by Natasha Razina ⓒ State Academic Mariinsky Theatre (2).jpg
 

메인으로 연기를 펼치는 무용수들 이외에도 무대에 오른 무용수들 모두, 이 유명한, 역사 깊은 발레단에 들어가기 위해 얼마나 많이 연습했을지. 그리고 이들도 얼마나, 나름 무용으로 주위 또래들 사이를 주름잡던 사람들이었을지 상상했다. 어떤 완성 뒤에 숨겨진 노력을 생각하면 그들이 무척 대단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주연 무용수로, 이렇게 3시간 내내 등장하며 극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대체 얼마나 연습을 해야하는 걸까. 얼마만큼의 재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일까. 재능은 모르겠지만 노력의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옷 뒤쪽은 무용수의 등이 보이도록 파여있었는데, 여자무용수가 팔을 쫙 뻗을 때마다 등쪽 근육이 하나하나 드러났다. 정말 쫙, 근육이 드러났다. 발끝으로 걸어다니는 모든 동작에서도 그녀의 다리근육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무용수들은 이 모든 상황에서도 다양한 강약 조절과 표정 연기로 감정을 전달했다. 근육이 쫙 드러날 정도로 힘주어 팔을 뻗고 발끝을 세워 걸어다니면서도 감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무용수들의 노력을 몇 차례 엿 볼 기회가 지나간 뒤, 나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저렇게 어려운 것이라고 느꼈다. 힘차게 날아올라 공중에 잠시 멈춘 것처럼 떠있다가도, 침착하게 착지하는 것. 그리고 바로 다음 동작으로 이어가는 것. 발끝만으로 열바퀴도 넘게 돈 이후에도 꼿꼿이 서있는 것. 그 모든 동작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이 모든 동작은 인간이 본래 행동하도록 만들어진 체계와 반대되는데도 말이다. 중력의 영향을 받는 인간은 공중에 멈춘 채로 떠 있을 수 없고, 높은 곳에서 점프한 뒤에는 그 충격을 몸으로 흡수한다. 수 차례 자리에서 돈다면, 균형기관도 흔들려서 그 어지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대게 된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위해서 그들은 인간에게 주어진 본래 체계, 즉 한계를 극복했다. 무대에서 아름다움을 전달하기 위해, 발레의 몸짓들로 사람들에게 여러 감정과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수없이 훈련한 것이다. 어떤 몸짓을 통해 감동을 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Don Quixote by Valentin Baranovsky ⓒ State Academic Mariinsky Theatre (2).JPG
 

다시, 무용수에서 극 전체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와보면, 전체적인 밸런스가 무척 훌륭한 공연이었다. 무용수들의 실력도 좋았지만 오케스트라도 훌륭했다. 기억에 남는 실수도 없고 무용과 매끄럽게 어우러졌다. 개인적으로는 무용수들의 몸짓에 감탄하느라 음악을 많이 즐기지 못해서 아쉽다. 따로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고 싶을 정도다. 극장의 사운드와 분위기도 아늑해서 쉽게 몰입할 수 있었고, 무대미술과 의상도 정말 멋졌다.

막이 바뀔 때마다 변하던 무대는 2층의 발코니도 있고 1층의 테이블도 있는 입체적인 구조여서 더욱 실감났고, 배경에 크게 세워진 단풍나무의 색감과 분위기도 정말 아름다웠다. 술집과 다양한 상황에서 무용수들이 입은 의상은 ‘스페인’스러웠지만, 그것이 아주 열정적인 느낌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재작년에 본 카르멘이 열정의 끝을 찍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스페인-열정적-사랑’ 테마는 느끼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한 무대에 많게는 20명도 넘는 무용수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주목을 받게 되는 건 단 두 사람 혹은 많아야 다섯 사람이다. 나는 그 뒤의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런데 무척 섬세한 연기를 펼치는 것이 아닌가. 예를 들어, 3막에서 계속 컵을 닦던 사내가 있었다. 주인공들은 자꾸만 잔을 비우고는 컵을 뒤로 던졌는데, 그 컵을 주워 계속 닦는 역할의 남자 무용수가 있었다. 그런데 주울 때마다 리액션이 조금씩 달랐다. 그냥 줍기도 하고, 누가 던졌나 쳐다보고 줍기도 하고, 왜 자꾸 던지나 짜증나는 듯이 쳐다보며 줍기도 했다. 그리고 무척 열심히 컵을 닦았다. 이렇게, 시선이 잘 가지 않는 사람들도 무척이나 열심히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 인상적이었고 또 좋았다. 사실 이건 연출자의 노력이기도 하지만, 작은 배역도 놓치지 않으려는 배우의 노력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Philipp Stepin & Elena Yevseyeva in Don Quixote by Valentin Baranovsky ⓒ State Academic Mariinsky Theatre (1).jpg
 

한계를 극복한 사람들과, 멋진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노력한 모든 이들 덕에 즐거운 공연 관람이었다. 나는 앞으로도 종종 발레 공연을 보러갈 것 같다. 그리고 매번 ‘마린스키 발레단처럼 좋을까’ 걱정할 것 같다. 그만큼, 내게는 즐겁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브라보!


김나연 서명 태그(이메일 없음).jpg
 

[김나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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