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길 잃은 눈밭에서 햇빛을 맞닥뜨린 순간 [영화]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
글 입력 2018.11.25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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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듣는 말 중, 사람을 가장 설레게 하는 말이 있다면 ‘첫눈이 왔다’가 아닐까. 아침에 일어나 눈을 떠 보니 하늘과 땅이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중력이 나를 편애하듯 전기장판과 이불 속에 파묻혀 움직일 수 없었는데, 베란다 바깥이 온통 하얗다는 걸 깨닫고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눈이다. 그것도 첫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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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접 찍은 파주의 눈밭
 


파주의 설원에서 길을 잃다



오늘은 경기도 파주에 가야 했다. 서울 주민임에도 경기도 위례와 꼭 붙어사는 기분을 느끼는 나에게, 파주에 가는 일은 대한민국 국토를 횡으로 가로지르는 대장정과도 같았다. 장장 두 시간 반을 달려 파주에 도착했는데, 이게 웬걸. 목적지인 명필름아트센터에 도착하기도 전에 핸드폰이 꺼졌다. 롯데프리미엄아울렛에서 목적지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였다. 가는 길도 모르고, 택시도 잡히지 않는 상황에서 전의를 잃었다. 결국 눈앞에 보이는 아무 카페에 들어가 허탈한 심정으로 주문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요…….


눈먼 걸음으로 가 닿은 ‘종이와 나무’ 카페에는 고즈넉한 음악과 조명, 그리고 빔프로젝터에서 상영되는 <이터널 선샤인>이 있었다. 핸드폰을 충전하면서 울적한 심정으로 찬 커피를 들이켜고 있었는데, 주홍빛 조명 아래의 조엘과 클레멘타인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마침 보이는 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고, 이건 파주의 설원에서 길을 잃지 않았으면 만나지 못했을 우연이다.


오, 생각보다 괜찮은 하루가 될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턱을 괸 채로 검은 빨대를 잘근잘근 씹었다. 커피잔에는 여전히 얼음이 동동 떠다녔지만, 덕분에 첫눈 오는 날 길을 잃은 파주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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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이터널 선샤인>
 


<이터널 선샤인>, 영원할 수 없으면서 그런 척하는 햇빛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다. 사람도, 사람이 아닌 것도, 언젠가는 모나고 쪼개지고 녹슬기 마련이다. 시간이 1분 1초를 다투며 유구하게 흐르는 동안, 한순간의 시대를 사는 존재들은 매번 덧없이 사라질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람은 가끔 청개구리 기질이 있어서, 이러한 법칙이 자신만은 비켜 갈 것이라고 믿을 때가 있다. 바로 사랑에 빠졌을 때인데, 우리는 종종 그 순간을 ‘빠졌다’가 아니라 ‘미쳤다’고 표현한다, 꽤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는가. 영원할 수 없는 걸 영원하다고 믿는 바보들에게 이보다 어울리는 표현을 찾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터널 선샤인>의 ‘이터널(Eternal)’은 모순적인 단어다. 영원한 햇빛이라니. 영화의 원제가 ‘티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빛(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임을 생각해보면, 영원하다는 말은 매우 시적이고 감상적이며 무용하다. 실제로 이 원제는 영국의 시인인 알렉산더 포프의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Eloisa to Abelard)’라는 시에서 따온 구절이다.

 


결점 없는 수녀의 삶은 얼마나 행복한가!

세상을 잊고, 세상으로부터 잊히니.

티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빛!

모든 기도를 받아들이고, 모든 바람을 체념하니.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207~210행


 

이는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비극적 실화에서 영감을 받아 쓰인 시인데, 그 불행은 다음과 같다. 사랑에 빠졌던 두 사람은 원치 않게 서로를 등진 후 수도승과 수녀가 되었고, 세상으로의 통로가 봉쇄된 수도원에서 애절한 편지를 주고받는다. 속세를 떠났지만 속세의 기억을, 그것도 사랑의 기억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잊지 못한 사랑을 편지로 남겼는데, 알렉산더 포프는 그것의 번역본을 읽고 ‘영원한 햇빛’에 대한 시를 적었다. 적당히 의역하자면, 그 햇빛은 ‘잊힐 수 없는 사랑의 기억 속에 남은 햇빛’일 게 틀림없다.


망각의 순리를 거스르고 한순간의 낭만을 간직하려는 일은 때때로 바보 같은 일처럼 보인다. 앞서 얘기했듯, 사랑에 미치는 건 바보들만 하는 짓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과 클레멘타인 역시 그처럼 사랑이 영원하리라 믿었던 이들이다. 운명처럼 서로를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두 사람은 지독한 이별을 맞이하고 연애의 기억을 지우기까지 한다. 그럴 거면 왜 ‘영원한 햇빛’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나 싶지만, 이 두 단어의 진가는 조엘이 기억을 지우기로 한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면서 발휘된다.






영원한 건 없지만 다 지난 뒤에는



로이킴의 노래 ‘영원한 건 없지만’의 가사에는 ‘영원한 건 없지만 내 사람은 항상 아름답길’이라는 말이 있다. 사랑이 영원하기를 믿었던 이들도 언젠가는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 조엘과 클레멘타인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서 애정뿐 아니라 상처까지 주고받게 되었고, 자신들이 사랑에 빠진 바보였다는 걸 깨닫는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조차 마음대로 지속시킬 수 없고, 그리하여 영원할 것 같던 사랑도 영원할 수 없다는 걸 배우게 된다. 심지어 조엘은 자신이 무언가에 (그게 사랑인지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속았다고, 기만당했다고 여기기까지 한다. 배신감은 이윽고 두 사람에게, 사랑한 기억을 지우는 선택을 하게 만든다.


<이터널 선샤인>의 감독 미셸 공드리와 각본가 찰리 코프먼은 원래 클레멘타인이 계속 기억을 지우도록 할 생각이었다. 작중 설정상, 그녀는 고통스러운 연애를 완전히 잊는 게 특효약이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사랑은 영원할 수 없다’를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새하얀 백지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미셸 공드리와 찰리 코프먼은 결말을 열어둔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자신들이 기억을 지웠음을, 끔찍하게 이별했던 경험이 있음을 알게 되지만 ‘그래도 괜찮다(Okay)’라며 다시 연애를 시작하기로 한다. ‘영원한 건 없지만’, 새로운 시작에는 늘 그렇듯 새로운 끝이 예정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사람은 항상 아름답길’ 바라는 마음처럼. 우리는 결국 다시금 바보가 되기를 자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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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이터널 선샤인>



카페에서 일어나 충전된 핸드폰을 롱패딩 주머니에 넣고, 뒤늦게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울적하던 기분이 나아지긴 했지만, 그게 오래 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느릿느릿 걸어가다가 과속하는 자동차가 튀긴 눈발에 옷이 젖을 수도 있고(실제로 젖었다), 도착한 목적지에서 다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셔야 할 수도 있고(실제로 마셨다), 또는 명필름아트센터에 도착했음을 일행에게 알리기 직전에 핸드폰이 다시 꺼질 수도 있다(실제로 꺼졌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정성을 발 앞에 둔 채, 우리는 늘 행복한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는 덧없는 소망을 품는다. 나도 내가 오늘 파주에서 길을 잃을 줄은 몰랐으며,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찾은 카페가 내 마음에 쏙 들 줄은 더더욱 몰랐고, 그곳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만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러니 행복하든 불행하든, 모든 순간마다 감정은 단발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상투적인 결론이긴 하지만, 우리는 순간에 충실하여 변화를 유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과 조엘의 앞날에 어떤 그늘이 드리울지 조금도 몰랐으면서, ‘우린 결혼할 거예요’라고 단언한 클레멘타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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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이터널 선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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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령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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