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켓북마크] 지금부터 '가짜'가 공연됩니다 : 연극 <애들러와 깁>의 손원정 연출가

글 입력 2018.10.24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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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 #4 진실 혹은 거짓


영화 <매트릭스>의 1편에서 네오(키아누 리브스)가 꺼내는 책은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이다. 이 책이 상징하듯 영화는 실재와 가상, 진짜와 가짜의 문제를 세계관에 녹인다. 네오가 살던 곳은 시뮬라크르의 미궁. 실재는 비어있고 이미지가 그 자리를 대체하는 곳이다. 네오는 빨간 약을 먹고 나서야 이 세계가 '진짜'가 아님을 깨닫는다.


어쩌면 우리도 미궁에 갇혀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영화 속 가상현실 세계에 우리 역시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수많은 이미지, 모방, 상징들을 보며 '진짜'를 보고 있다고 믿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이건 어떤가? 저 너머에 '진짜'가 있다면 우리는 네오처럼 '빨간 약'을 고를 수 있을까? 기꺼이 '진짜'를 보길 원할까? 그 끝이 척박하고 끔찍한 '실재의 사막'이래도 그럴 수 있을까? 글쎄다.


*


[PEOPLE] 연극 <애들러와 깁> 손원정 연출가 인터뷰



세상이 흉흉해질 때마다 신문을 장식하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진실’이다. 무정부 상태에 가까웠던 몇 년 전에도, 그리고 사람이 사람에게 저토록 잔혹할 수 있구나 매일같이 깨닫는 요즈음에도 진실은 끊임없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그럴 때마다 이야기는 대중의 답답함을 해소해주곤 했다. 형사는 흉악범을 멋지게 처결하고, 역사 속 영웅은 난세를 구하고, 변호사는 정의와 진실을 기치로 내걸며 법정 안에서 활약한다. 즉 호시절이 아닌 때에,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줬던 건 정의를 좇는 이야기, 진실을 구도하는 이야기였던 거다.

그런 면에서 연극 <애들러와 깁>은 심히 불편하다. ‘시원하지 않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애들러와 깁>은 예술이 현실을 욕망하다가 끝내는 폭주해버리는 이야기를 그린다. 작품은 배우 루이즈가 실존 인물인 애들러와 깁의 생애를 욕망하고 결국 그들 개인의 삶을, 예술을 먹어치워 버리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준다. 거기엔 ‘마땅히 어째야 한다’는 윤리성도, 정의와 진실을 위한 거룩함도, '현실보다 나은’ 이야기가 줄 수 있는 카타르시스도 없다. 오히려 거대한 아귀를 벌린 예술은 지난한 현실을 삼켜버린다. 앞선 이야기들과 정반대에 위치해 있는 셈이다.

작품이 보여주는 건 '거짓을 벗겨내 진실로 향하는 여정'이 아니다. (이렇게 했으면 오히려 쉬웠을 테다.) <애들러와 깁>은 '진실'을 철학적인 질문으로 확장시킨다. 루이즈가 가진 '진짜를 향한 욕망'에 주목하며, 결국 연극과 예술의 진실성을 자문한다. 그곳엔 끝없는 자기 회의와 질문만 있을 뿐이다. 단호한 경계를 지우고 연극 스스로가 ‘가짜’를 자임하는 <애들러와 깁>. 극장 안에서 ‘가짜’를 만들고 있는 손원정 연출가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 날 것에서 출발한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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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드라마터그, 비평가, 연출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이어오고 계십니다. 연출자와 드라마터그일 때의 역할이 다른 만큼, <애들러와 깁>에 임하는 마음가짐도 다를 것 같은데요?

 

: 비슷한 부분도 많지만 연출가와 드라마터그는 기본적으로 달라요. 드라마터그는 프로덕션의 결정권을 가지지 않는데요. 충분한 조언을 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지만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제한되고, 그렇기 때문에 책임으로부터 약간은 자유로운 부분이 있어요. 거기에 비해서 연출이라는 위치는 모든 걸 결정해야 하고, 모든 결정에 대해서 최종 책임을 져야만 하는 위치예요. 그래서 훨씬 무거운 마음가짐이죠.

 

그런데 작업을 하면서는 겹쳐지는 부분이 되게 많았어요. 제가 드라마터그를 하면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이게 어떻게 보일까’,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대 위에서 얼마나 잘 들리고 보일까’였거든요? 이번 작품을 연출하면서도 그걸 가장 크게 생각했어요. 배우들의 말이 어떻게 들리고, 배우들이 존재하는 것이 관객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 수 있을까. 그걸 생각하면서 이번 작품을 조율하고 만들어갔어요.



E. 원작 희곡에서 수정된 부분이 있나요?

 

: 거의 없어요. 거의 그대로인데 언어적인 부분을 반영하려 노력한 면은 있어요. 원작 영어본에는 ‘루이즈와 샘이 처음에는 아무런 억양 없이 이야기를 하다가 1/3지점부터 조금씩 미국 억양을 쓴다. 그리고 나중엔 완벽한 미국 억양을 구사한다’든가, ‘루이즈가 애들러를 모사할 때, 약한 오스트리아식 억양을 조금 쓰다가 나중엔 약한 오스트리아식 억양이 섞인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든가, 이런 것들이 지문에 있어요. 이건 번역상 만질 수 없는 거여서 오랫동안 고민했죠. 도대체 어떻게 만들까. 그렇다고 사투리를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웃음)

 

결국은 ‘해석적인 모방’에 착안했어요. 거리를 둔 액팅에서 점점 더 에너지를 많이 쓰고, 감정 표현과 제스처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원작 지문을 재해석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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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그럼 작품 초반의 정적인 연출도 지문을 반영하기 위함이었겠네요?

 

: 지문의 영향도 컸죠. 하지만 제가 이 텍스트를 봤을 때 가장 중요한 건 거리를 멀리 둔, 최대한 아무것도 개입시키지 않은 날 것의 배우, 날 것의 말부터 출발해, 점차 그 재현에 살을 붙여가며 축적시키는 것이었어요.

 

배우들은 가짜잖아요. 이 작품 속 배우들도 원래 자기의 몸, 자기 얼굴에다가 다른 사람의 피부를 입히고 옷을 입히면서 타인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해요. 이런 형식적 변화를 노출하면서 ‘예술가를 욕망하는 루이즈’라는 극 중 인물을 구축하고자 했죠. 에너지의 변화로 이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진짜와 가짜의 경계, 그 안에서 루이즈라는 한 여자의 욕망이 얼마나 커지는지. 그 사랑이 얼마나 순결하게 괴물이 되어가는지를 표현하려 했어요.

 

 

E. 루이즈와 깁이 마주하는 장면에서 ‘드라마’로 전환되는 것도 대본 상에 있었나요?


: (루이즈와 깁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마주 보는 것 역시 대본상에 있던 거였어요. 그런데 중간에 시선을 교환한다든지 다시 앞을 본다든지, 제스처가 생긴다든지 하는 것들은 저희가 만들었죠.




▶ '진짜'가 되려 하는 루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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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연극을 보면서 ‘정조 이서진’, ‘미실 고현정’과 같이 배우의 이미지로 대체된 실존인물들이 떠오르더라고요(웃음) 진짜를 모방하는 루이즈의 욕망에 관해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 저는 루이즈가 처음부터 ‘애들러를 지우고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할 거야!’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거라 봤어요. 아직 모르는 분들도 계시던데, 앞에서 논문 발표하는 인물이 젊은 시절의 루이즈예요. 20대 파릇파릇한 시절의 루이즈! 그게 왜 중요하냐면 루이즈라는 여자는 오랫동안 애들러와 깁이라는 두 예술가의 삶과 예술세계를 흠모한 사람이에요. 거기서부터 출발한 거죠. 중간은 비어있지만 어쨌거나 하퍼를 만나서 배우가 되고 공부를 하고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을 연기할 기회가 생긴 거죠.

 

여기까지도 나쁘다고 얘기할 수는 없어요. 더 잘하고 싶고, 정말 최선을 다해서 그 사람과 똑같이 되고 싶고. 어떻게 보면 아름다운 욕심이잖아요. 그래서 폐가에 찾아간 거예요. 자료를 찾고, 진짜를 영화에 담고, 최대한 진짜처럼 자기가 보이고 싶어서요. 그런데 거기에 죽은 줄 알았던 깁이 있었던 거죠. 이 연극에서 루이즈는 한 걸음 한 걸음 단계를 밟을 때마다, 아름답고 순수했던 욕망을 부추기는 불씨들을 만나는 거예요.

   

 

E. 루이즈를 전형적인 악인이라고 볼 순 없는 거네요?

 

: 그렇죠. 루이즈를 마냥 악한 사람이라고 볼 순 없어요. 사랑이 똑같이 되고 싶은 욕망으로 구현된 거고, 그게 이 극에서는 상당히 파괴적으로 표출된 거죠. 애들러의 해골을 볼 수 있다는 건 배우로서는 정말 선물과도 같은, 로또와도 같은 일이었을 거예요. 우리한테는 되게 끔찍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정말 아름다운 일이었다고 저는 생각해요. 루이즈는 나쁜 여자가 절대 아니에요. 루이즈 입장에선 이 기회를 왜 놓쳐요? 죽은 줄 알았던 애들러의 연인이 내 눈앞에 있는데, 진짜를 찍을 기회가 온 건데 그걸 왜 버려. 이렇게 된 거죠. 그게 계속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흠모가 욕망이 되고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 순간 윤리는 중요하지 않게 된 거예요. 이 인물은 일관성이 분명히 있거든요. 그런데 그 행동을 보면 우리는 질리고, 무섭고, 저 여자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런 거죠.

 

연습하는 내내 그런 얘기를 했어요. 루이즈는 히스테릭한 여자, 정신 나간 여자가 아니다. 오히려 정신이 굉장히 맑고 목표의식이 뚜렷하고 그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의지가 너무 강한 사람이다. 그걸 우리는 광기라 부르는 것이다 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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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루이즈는 어떤 욕망을 대변하는 걸까요?

 

: 연극 속 루이즈의 모습은 연극 밖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무언가를 너무나 좋아하고, 그걸 갖고 싶어 하고 결국 갖는 행위와 루이즈의 행위는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그게 특히 예술인 경우엔 더 그렇죠. 진짜가 우리 눈앞에 있을 때 조금만 더 하면 내 거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내가 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경우가 꽤 많은 것 같아요. 우리가 예술을 소비하는 방식, 아름다운 것을 욕망하고 소유하는 방식인 거죠. 루이즈는 그 방식을 어린 학생에서부터 큰 배우가 되기까지 착실히 따라온 거고요. 어쩌면 성장일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이 메시지가 벌거벗은 극장 안에 있기 때문에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예술 중에서 제일 모방을 잘하는 것, 제일 가짜를 진짜처럼 잘 만드는 게 연극이고 그다음이 영화거든요. 가짜인 배우들이 진짜처럼 행세하는 곳이 바로 극장이고요. 형식적으로, 조건적으로, 이야기적으로 잘 본다면 이런 구조가 읽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했죠.

 

 

E. 개인적인 감상인데요. <애들러와 깁>을 보던 중에, 뱅크시가 자기 그림을 파쇄한 사건도 떠오르더라고요.


: 공교롭게도 정말 얻어걸린 거죠(웃음) 여담으로 뱅크시는 소비도 되지만 스스로를 소비재로 만드는 데도 탁월한 예술가라고 생각해요.


 


▶ 소비의 시대, 비주류의 삶



E. 과거 인터뷰에서 ‘왜 이 연극을 지금 이 시점에 해야 하는지’를 고민한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애들러와 깁>은 왜 지금 이 시점일까요?

   

: 사실 이번에는 그런 생각을 안 하고 덤볐어요. 팀 크라우치 작가에게서 이 대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너무 매력적이어서 꼭 번역하고 싶고, 남에게 주기 싫다는 마음이 들었죠. 진짜와 가짜의 문제는 연극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양한 방식으로 한 번쯤? 혹은 여러 번 할 수밖에 없는 고민이고 안게 되는 과제인 것 같아요.

 

이 작품은 그걸 조금 더 본격적으로 전면에 내세우고 있죠. 저는 좀 지친 것 같아요. 요란한 예술에 대한 질림? 브랜드 만들고, 뭐든지 명품으로 만들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물론 연극은 조금 덜한 편이지만요. 아마 ‘당신도 그러잖아!’라고 하면 저를 포함해서 모두 ‘난 아냐!’라고 하겠지만(웃음) 소비재를 만들고 무엇이든 상품으로 만들어버리고 그걸 어떻게 하면 고상하게 살까, 다른 방식으로 소유할까, 그런 것들이 만연한 시대잖아요. 굉장히 고상하고 우아하고 점잖은 척하지만 까발리면 절대 그러지 않고요.


그런 것에 대한 피로감이 점점 커지고 있었기 때문에 작가가 시놉시스를 이야기했을 때 ‘해보고 싶다’,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시의성을 뚜렷하게 염두에 두진 않았지만 할 만한 작품이고 해볼 만한 질문이고, 나눠볼 만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엇보다도 캐릭터들이 매력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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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관객들 사이에선 개막 전부터 '애들러와 깁의 사랑', 즉 두 여성의 동성애가 큰 이슈를 모았어요. 이 설정이 작품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 제 생각엔 70년대의 파격을 구현하고자 했던 것 같아요. 주류 바깥에서 비주류적인 삶을 살고, 사랑을 하고, 그런 예술을 하는 사람들. 즉 소비자본주의라는 주류 바깥의 사람을 그리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파격이 아니겠지만 당시 미국도 여성 동성애에 관해선 열려 있던 사회가 아니었으니까요.

 

결국 이 작품이 하는 말은 ‘소비재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 예술가와 삶을 우리가 어떻게 먹어치우고 있는가’, ‘사랑이란 이유로 존경이란 명목으로 가차 없이 파괴하는가’인 것 같아요. 그래서 루이즈를 마냥 욕할 수 없는 것이고요.

 

 


▶ 소비의 시대, 비주류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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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다양한 오브제의 활용이 눈에 띄는데요. 그중에서도 ‘가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퍽 난감하더라고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 가재 때문에 어떤 분들은 현대미술을 논하기도 하세요. 이 작품의 주요 소재는 현대미술이지만, 이야기를 끌어가는 방식은 철저하게 연극적인데요. 연극은 결국 가짜 놀이잖아요. 아닌 사람이 인척 하는 거. 내가 왕이 아닌데 왕인 척하고 (티스푼을 들며) 이런 거로 때리고 ‘너 죽었어!’라고 말을 해도 말이 되는, 되게 가벼운 놀이죠.

 

하지만 어른들의 세계에 편입되면서 상당히 진지해져요. 티스푼을 들고 때리는 것과 무거운 망치를 들고 때리는 것은 연극 안에서 똑같은 값을 가지고 있는데, 연극의 가벼운 놀이성을 우리가 쉽게 지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 힘이 없어요. 가재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어요. 총이 가재가 될 수도 있다는 거죠. 페인트를 칠하지만 우리는 그 순간 피라고 인식하잖아요. 초반의 모든 장치는 그래요. 이것은 결국 다 놀이. 연극 놀이, 허구 만들기. 우리가 좋아하는 거, 그거죠. 거기서 배우도 배우로서 거리 두는 연기를 하고 있고, 모든 소품과 장치도 유희적으로 사용되고 있어요.

 

 

E. 가재엔 별 의미가 없었던 거였군요(웃음)

 

: 루이즈의 욕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놀이성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점점 사라지고 리얼리즘적으로 연극이 진화해요. 초반에 나오는 페인트, 가재, 조그만 삽, 폼 스틱 다 그냥 쓰이는 거예요. 별 의미 없어요. 폼 스틱으로 바닥을 쳤는데 잔인하게 개를 죽였다고 생각해서 그 장면을 싫어하는 분들도 계시잖아요. 이 소품들의 사용으로 결국 우리는 일종의 놀이를 경험하는 거죠. 또 가벼움과 무거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게 소품의 사용인 거고요. 가재가 꼭 가재일 필요는 없어요. 대본에 그렇게 쓰여 있었지만, 처음엔 ‘꼭 가재여야 하나’ 했어요. 그런데 저희 무대디자이너가 가재가 좋겠다고 해서 가재를 내놓게 된 거죠.


 

E. ‘샘’을 언급하지 않는 루이즈의 결말도 인상적이었어요.


: 이 작품의 인물들은 되게 전형성이 강한 인물들이에요. 깨끗해요. 캐릭터 중에 복잡한 사람이 없어요. 작가가 그렇게 쓴 것 같고요. 샘이 코치를 했지만 루이즈 자신이 해낸 거고 루이즈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제 생각인데요. 드라마터지적으로 봤을 때 자기가 피 흘리면서 죽게 내버려 둔 사람을 시상식에서 언급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가식적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반대였대도 아마 똑같이 경악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러나저러나(웃음) 지금은 언급이 안 돼서 경악하지만, 풋풋하고 아름다운 표정으로 ‘당신이 살아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하면 어떨까요?

 

 

E: 그것도 되게 문제적이네요(웃음)

 

: 그렇죠. 샘도 참 불쌍해요, 정말 개인적으로. 대충하고 나올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웃음) 절대 착한 인간은 아닌데 불쌍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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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그림자와 영상 연출은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들더라고요. 어떤 의도였나요?

 

: 완전히 다 뒤섞어 버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처음엔 실루엣만 보여주다가 맨 마지막엔 살짝 빛을 비쳐줘요. 이게 진짜일 수 있고, 가짜일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러나 결국은 다 찍은 거고 만들고 있는 거고. (E:아, 연극도 가짜이니까?) 그렇죠.

 

영상은 클라이맥스와 상상을 원하는 사람에겐 갑갑할 수 있어요. ‘왜 다해주지?’, ‘왜 나에게 여지를 안 주지?’라고요. 원작 텍스트가 하고 있는 질문은 그거예요. 우리는 더 진짜 같은 것을 은연중에 추구하잖아요. 그래서 욕망의 정점인 영화, 그리고 영화 중에서도 다큐멘터리 영화를 배치한 거죠. 다 만들어진 거예요. 끝까지 해소되지 않은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진짜'의 끝을 보여주는 거죠. 가장 비모방적이고 비재현적으로 평상복을 입고 시작해서, 사실주의적인 연극으로 귀결되고 진짜를 죽이는 것, 그러고 나서 소위 진짜와 가짜가 서로 충돌하고 그 가운데 '가짜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 진짜'인 다큐멘터리 영상이 나온 거죠.

 

작가가 허구와 현실의 관계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이거 다 거짓말이야’라는 건 조롱하려는 게 아니라, 진짜를 어떠한 방식으로 바라보고 사유하고, 허구를 통해서 무엇을 욕망하고 어떤 진짜의 경험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거죠. 그런 맥락에서 연극이 물리적인 진짜 안에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고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현실을, 오늘을 이야기하고 사유할 수 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거고요.




▶ '가짜'가 사는 극장


 

E. 드라마터그, 연출로 참여하셨던 <맨끝줄 소년>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환상과 현실 사이의 긴장감에 매력을 느끼시나요?

 

: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러네요(웃음) 그냥 재미있어요. 둘 다 다른 방식으로 재미있었죠. 저 역시 연극적 허구가 현실에 침투하는 방식, 무엇보다도 극장이 만들어내는 확장성에 관심이 커요. 저는 연극의 가짜를 좋아해요. 우리가 가짜인 줄 알면서도 보기 때문에 가짜에 은유의 여지가 훨씬 더 많이 있는 거죠. 상상할 수 있는 거리, 상상해야만 하는 공간을 선물하거나 요구하는 곳이 극장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맨끝줄 소년>도 그러한 부분이 있었죠. <맨끝줄 소년>…. 희미하네요(웃음)

 

 

E. 결국 끝내 웃는 건 클라우디오와 루이즈네요. 왜 이들이 몰락하는 결말보다 이들이 끝내 웃는 결말이어야 할까요?


: 저는 클라우디오와 헤르만의 관계가 ‘이기고 지는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클라우디오는 개입하고 싶어서 개입하지만, 자기의 상상이 깨지는 비극을 맞잖아요. 불쌍한 면도 있어요. 클라우디오 때문에 파탄이 났지만 클라우디오 역시 깊은 상처를 받았죠. 결국 소설 안에서 주인공이 되려 할 때, 자기를 받아들여 주는 사람도 없었고요. 클라우디오의 웃음은 냉소인 것 같아요.

 

반면 루이즈는 다 자기 걸로 만들었죠. 깁이 승기를 잡았다면 이야기가 아예 안 됐겠죠? 깁은 그런 거에 관심이 없는 여자였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세상 쿨한 여자잖아요. 의리 있고, 평생을 바쳐서 시신과 폐허가 된 공간을 지키려 했던 사람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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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가짜’를 말하는 연극에서 관객분들은 어떤 걸 느끼고 돌아가실까요? ‘진짜’를 기대하고 오시는 분들도 계실 텐데요.

 

: 그건 제가 관객분들에게 조언을 구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요?(웃음) 저희는 늘 관객과 만나는 걸 상상하면서 작업하지만 절대 모르는 거거든요. 그분들이 어떤 걸 기대하시고 한 시간 반 동안 어떤 걸 경험하시는지. 그런데 때로는 내가 기대한 것과 다른 걸 보는 즐거움도 있지 않을까요? 저도 <애들러와 깁>이 절대 친절한 작품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같이 버텨주신다면 작품이 너무나 잘 만들어져서가 아니라, 이 작품이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에 응해주시는 분들이 계신 게 아닐까. 다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알아주시는 분들이 소중한 거고, 그런 거 아닐까요?


 

E. 그런 작업을 잇는 게 쉽진 않아 보이는데요. 배우들과는 어떻게 준비하셨나요?

 

: 배우들이랑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말씀드렸다시피 작품 초반과 후반의 발화 방식이 바뀌잖아요. 후반부를 만들 땐, 최선을 다해서 세 사람을 믿었어요. 진짜 샘이고 진짜 루이즈, 진짜 깁이라고요. 저희만큼 열심히 믿은 사람이 없어요. 저희가 열심히 믿어야지만 의심의 여지 없이 결과적인 모순이 생기니까요. 우리가 다름을 보여주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것에 걸리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초반에는 우리가 어떻게 말을 할까, 시선을 어떻게 처리할까 등 ‘배우’로서의 표현 방식에 중점을 두었다면, 뒷부분 조명이 들어오고부터는 리얼리즘적으로 연습했어요. 두 가지 결의 연기를 한 거죠. 앞에는 배우, 뒤는 캐릭터.

 

 

E. 앞으로 준비하고 있는 작업, 혹은 매력을 느끼고 있는 이야기가 있을까요?

 

: 제가 지금 이 작품에 너무 눌려 있어요(웃음) 극단은 지금 당장 계획하고 있는 건 없어요. 워낙 공동 창작이란 작업을 하는 극단이라 헐렁하게 띄엄띄엄 만나서 ‘망각과 기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공동창작 워크숍을 몇 번 했어요. 기회가 되면 그걸 공연으로 올리면 좋겠다고 구상하고 있는데,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요.


*


많은 사람들이 자명하다고 믿는 것. 그것에 물음을 던지는 건 꽤나 큰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정적인 연출, 익숙하지 않은 발화, 친절하지 않은 이야기를 무대 위에서 선보이는 것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관객들이 낯설어할, 난해해 할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형식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것에 질문을 던지고, 다시 이 사유를 관객과 나누는 작업은 분명 의미 있다. 이것이 진실이라고, 이게 바로 진짜라고 소리 높여 말하는 깔때기 앞에서 그게 꼭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고, 우리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고 말하는 목소리. 이게 ‘진짜’를 향한 철학적 사유의 시작이고 예술을 만드는 사람이 끊임없이 자문해야 할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빨간 약과 파란 약 중에 기꺼이 빨간 약을 선택해, '실재의 사막'을 보겠다는 관객들이 있으니 말이다.

 

손원정 연출가와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말이 떠올랐다. 그의 문장을 빌리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적어도 이야기라는 장르에서만큼은 이 세상의 모든 단호한 경계들에 대해서 확신보다는 회의를 품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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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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