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신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연극 신의 아그네스 [공연예술]

글 입력 2018.10.22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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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네스 포스터.jpg


한 수녀원의 젊은 수녀가 아이를 낳는다. 작은 수녀원은 어떤 남성도 들어올 수 없는 곳. 남성의 개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 동정녀 마리아는 갓 낳은 예수를 목 졸라 죽이고 영아 살해죄 혐의로 기소된다. 그러나 그의 기억은 모두 사라진 상태. 그는 어떻게 임신하고 출산했으며, 누가, 왜 아이를 죽였을까? 불가사의한 사건 속에서 과학과 종교의 첨예한 대립을 다룬 연극 <신의 아그네스>를 만나보았다.

 

*

 

정신의학박사 리빙스턴은 법원으로부터 아그네스 수녀의 정신 감정을 의뢰받는다. 아그네스가 머무는 수녀원에 도착한 리빙스턴은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원장 수녀 미리암과 대립한다. 각각 종교와 과학, 충실한 믿음과 합리적 의심을 대변하는 둘의 논쟁은 아주 상징적인데, 한편으로는 르네상스 이래로 지겨우리만치 이어져 왔던 레퍼토리이므로 다소 뻔한 전개일 수도 있겠다. 극의 초중반까지 이 종교전쟁은 과학의 승리로 돌아간다. 사실 이것은 어떤 시선이라기보다 시점의 문제인데, 리빙스턴 박사에게는 극을 이끄는 사회자라는 중대한 역할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사회자는 관객과 무대 사이에 존재하면서 무대 속 세계로 이끄는 초대자이다. 관객에게 처음으로 모습을 보이고, 첫마디를 건네고, 함께 극 속으로 들어가며 절정의 순간에서는 그의 목소리로 이야기가 정리되니 관객들은 사회자에게 가장 많은 관용을 베풀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리빙스턴 박사는 관객들이 몰입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인물로서 사회자의 권력을 가져간다. 적당히 이성적이고 현대 과학을 신봉하며 적당한 양심과 종교에 대한 적절한 수준의 반발심, 그는 현대인들의 초상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리빙스턴 박사는 어느 순간부터 적절한 수준을 떠나버리고 만다. 수녀원에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죽은 여동생의 환상을 아그네스에게 투영하면서 그는 스스로가 인정하듯 아그네스에게 광적으로 집착하고, 종교의 목소리로 죽은 여동생 대신 아그네스를 과학의 힘으로 구원하리라 결심한다. 이 순간 리빙스턴 박사도 관객의 관용을 잃은 채 광신도로 전락한다. 미리암 수녀의 경우, 그는 아그네스의 노래에서 느낀 신의 광채를 붙잡기 위해 아그네스와 리빙스턴 박사를 떼어놓으려고 한다. 그 노래를 통해 되살아난 신앙심만이 자신의 덧없는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리빙스턴이 아그네스를 통해 구원하는 자로서의 오만한 욕망을 채우려 한다면 미리암 수녀는 아그네스를 통해 구원받고자 한다. 두 미치광이들이 각자 종교와 과학이라는 망태기에 아그네스를 담으려고 투쟁하는 동안 아그네스는 병적인 무지와 순수만을 보여준다.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비밀을 기억 저편에 묻어둔 채로.



최면 치료.jpg
  


극의 후반부, 리빙스턴 박사가 두 번째 최면치료를 진행하면서 출산이 있던 날 밤의 비밀이 밝혀진다. 종교와 과학의 대립으로 잊고 있던 가장 중요한 질문, 누가 아기를 죽였는가? 죽였다면 어떻게, 왜? 살인인가, 과실치사인가? 리빙스턴은 수녀원의 평판이 떨어질 것을 두려워한 미리암이 아이를 살해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당시 현장에 있던 미리암은 아그네스가 제정신을 잃은 동안 벌어진 과실치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최면을 통해 밝혀진 진실은 모두의 예상을 뻔하게 뒤집는다. 아직 어머니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느낀 아그네스가 아이를 ‘주님의 곁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심지어 그동안의 백치에 가까웠던 모습과 달리 그는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결국 동정녀 마리아는 타락하고 사라졌으며 그가 머무르던 자리에는 영아 살해범만이 남았다. 더불어 그의 병적인 순수에 투영하던 구원받을 기회와 구원할 기회 역시 눈 녹듯 사라진다.

 

어머니로부터 성적 학대와 종교의 이름을 한 가스라이팅을 한평생 겪어오며 제대로 된 보육을 거치지 못한 아그네스가, 분명한 의도로 갓 낳은 아기를 죽였던들 그것을 온전한 의도라고 볼 수 있을까? 그러나 미리암은 아그네스가 순진하지 못함을 비난하고 진실을 밝힌 리빙스턴 박사를 저주한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아그네스가 창녀라고 해서 절망할 자격도 없거니와 아그네스가 순진한 처녀라고 해서 그에게 성호를 그을 권리도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자신만의 성녀를 잃고 절규하는 미리암을 향해 리빙스턴은 눈물로 사죄한다. 심지어 진실의 관문에 다다르기 직전까지 리빙스턴 박사는 아그네스를 성인 취급하는 미리암 수녀에 분노하고 그를 비난해왔다. 리빙스턴 박사는 왜 미리암에게 사죄하는 걸까.


아그네스의 비정상적인 순수는 종교와 과학을 통해 성녀로도, 정신질환자로도 그려진다. 객석에 앉은 관객은 당연히 현대 의학을 통해 그를 구원하고자 하는 리빙스턴의 시점에 더 가까이 존재한다. 그러나 실은 리빙스턴 박사 역시 인류애나 직업 정신 따위가 아닌, 아그네스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동생을 구원하기를 욕망했음이 몇 가지 연출적 장치를 통해 드러난다. 더 자세히는 동생을 수녀원에 보내 비극적 죽음을 맞게 한 어머니, 당시에는 감히 거스를 수 없이 자신의 유년 시절을 지배한 어머니의 권력을 뒤집고 싶은 것이다. 성경의 권위를 빌어 나타난 억압을, 과학을 통해 종교의 거짓됨을 증명하면서 극복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이 역시 아그네스가 불쌍하고 가련한, 순수한 피해자로 존재해야만 성립할 수 있는 일이다. 구원자에게는 박해받는 이가 필요하므로. 결국 미리암과 리빙스턴의 욕망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라 여겨졌으나, 사실은 아그네스의 트라우마를 착취함으로써 얻어지는 결실이었음을, 리빙스턴 박사는 진실이 밝혀진 후에야 깨닫는다. 이 둘은 나란히 대척점에 선 쌍둥이인 것이다.

 

신을 잃은 유신론자와 피해자를 잃은 구원자. 미리암 수녀는 삶의 목적을 빼앗기고, 리빙스턴 박사는 인간의 나약함을 목도한다. 스스로 구원자가 될 수 있다는 오만으로부터 벗어난 그는 더이상 인간의 힘으로는 살 수 없다. 나는 그가 이 때에 다시 종교의 품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한다. 아니, 종교를 거부하기 위해 과학을 택한 순간부터 이미 그는 진정한 종교인이었다고 해야 할까. 극이 진행될수록, 미리암과 리빙스턴이 그러하듯 그들이 대변하는 종교와 과학 역시 핵심을 공유하는 다른 모습의 쌍둥이로 그려진다. 다만 종교의 본질이 신이라는 유일한 진리에 대한 무조건적 섬김이라면, 과학은 자연적 진리를 탐구하고 해부함으로써 감히 그에 도전하는, 인간 지성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다. 그리고 인간의 나약함을 목격한 순간, 인간을 주체로 삼는 과학은 종교를 절대 이길 수 없다.

 

중세를 벗어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에 대한 과학적 해부는 수도 없이 이루어져 왔다. 종교와 과학의 대립을 다룬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연극 <신의 아그네스>를 보면서 유독 생각나던 작품은 이전에 오피니언으로도 쓴 적이 있던 소설 <순교자들>이다. 종교적 신념 속에 감춰진 비밀을 파헤치는 대략적인 스토리 라인이나 사건이 전개되어 나가는 방향은 대부분 유사한데, 결말부에서 완전히 달라지는 차이가 흥미롭다. 희망 편과 절망 편 같은 느낌이랄까.

 

<순교자들>에서는 신 목사의 인간 존재를 향한 깊은 사랑으로써 믿음이 생겨나고, 믿음으로써 신이 비로소 존재한다. 믿음의 힘을 믿으며 희생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위대함은 기꺼이 신의 반열에 오를만하며, 이는 과학의 냉정한 공식으로는 설명하지 못할 기적이다. 종교와 과학의 대립을 다루는 많은 수의 작품들은 이같이, 과학만으로는 설명하지 못할 경이로운 사랑, 신념의 아름다움을 들어 부분적으로 종교를 받아들인다. <순교자들>을 읽으며 받았던 벅찬 감동을 떠나서, 어찌 보면 참 애잔하고 얄팍한 자기 위안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패배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간에 대한 과도한 믿음과 오만의 패배를 받아들이는 순간마저도 결국은 논리와 공식으로 풀 수 없는 무조건적이고 거대한 사랑, 인간 자신을 향한 사랑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 말이다.


그러나 연극 <신의 아그네스>는 이와는 완전히 다른 노선을 선택한다. 리빙스턴과 미리암은 환상이 벗겨진 진실한 아그네스를 마주하고 그를 놓아버린다. 이후 법원의 판결에 따라 아그네스는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죽는다. 리빙스턴이 진실을 밝혀낸 순간 마치 다른 수녀들처럼 미리암을 ‘원장 수녀님’이라 부르는 장면이나-그전까지 그는 미리암을 그저 수녀님이라고 불렀다-극의 마지막 장면에서의 리빙스턴의 독백을 생각하면 그가 결국은 신의 품으로 돌아갔음이 결코 과도한 해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러나 (리빙스턴에 대응하는)<순교자들> 속 주인공 ‘나’의 방식과는 다르다. 리빙스턴은 그날 이후 다신 볼 수 없었던 미리암과 아그네스를 그리워하면서, 관객 너머를 향해 눈물로 외친다. 당신은 대체 어떤 신이냐고, 어떻게 생겨 먹은 신이길래, 한 사람의 영혼이 부서지고 한 소녀가 유린당하고 아기가 죽어야만 하냐고, 왜 나에게 이런 잔인한 체험을 하게 하냐고.

 

모든 일은 주님이 행하심이라! 이 문장을 반박할 수많은 과학적 근거들을 댈 수 있음에도 결국 리빙스턴은 이 문장 안에 안주하게 된다. 그런데 이 행하심 끝에 세 명의 인물들에게 돌아온 것은 구원이 아니라 파멸이다. <순교자들> 속에서 주인공 ‘나’와 신 목사가 그 앞에 무릎 꿇는 신이 신약의 너그러운 하나님 아버지라면, <신의 아그네스> 속 인물들에게 받아들이는 신은 구약의 잔인하고 혹독한 창조주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빙스턴은 기꺼이 자신을 벌하는 신에게로 돌아간다. 그를 향해 울부짖고 그를 비난하고 닿지 않는 돌을 던지더라도, 결국에는 잔인한 체험마저 ‘그의 행하심’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일지라도 말이다.

 

*

 

나는 생각하는 게 느린 편이다. 그걸 꺼내어서 글로 전시하는 일은 시간이 배로 든다. 그래서 공연에 관해 소위 ‘스포일러’일 수도 있는 정보도 사전에 가리지 않고 접하는 것을 크게 꺼리지 않는데, 공연이 보여주는 시각적 정보는 한정적인 데 비해 그것을 미리 접하고 가면 생각할 시간이 벌리기도 하고, 텍스트가 실제 무대에 펼쳐지는 순간 기존의 해석을 벗어나 다른 해석이 생기기도 쉽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 역시 그랬다. 시놉시스부터 결말, 비판받는 지점들은 어느 부분들인지 대략 훑어보고 극장에 들어섰는데, 생각보다 뻔한 단점과 생각지 못한 장점들에 놀랐달까. 왜, 스토리가 한정돼있는 연극과 같은 장르에서 줄거리를 다 꿰고 있는 관객이 의외의 장점을 발견하기란 의외의 단점을 발견하기보다 힘든 일이지 않은가.

 

실망스러울 것이라 여겼던 부분은 시놉시스를 읽었을 때부터 뻔했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소비자들이 가장 크게 실망했을 지점이 아닐까 싶다. 보통 종교와 과학이 대립하는 순간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종교적 상징성을 가진 불가사의가 일어날 때일 것이다. 연극 <신의 아그네스>에서는 성적인 접촉이 금지된 수녀의 출산이라는 괴이한 사건으로 극이 시작되는데, 사건의 주인공인 아그네스의 비정상적으로 ‘성모’적인 모습은 그가 어떤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음을 쉽게 짐작게 한다. 보통 유년기의 성적 트라우마를 다루는 경우 친족 남성에 의한 것으로 그리는 데 비해 아그네스의 트라우마가 어머니에서 기인한 점이 약간 놀랍긴 했지만, 결국 여성 캐릭터에게 최대의 고난은 성폭력에 국한되어 있는 건지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고 지겹기도 하다.

 

공연을 비롯해 책, 영화, 드라마 등의 매체에서 창작자의 메시지는 인물이 겪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소비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대체로 주인공이거나 주인공에 가까운) 인물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행동하며 나아가는지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최근 들어 특히 말이 많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작품 내에서 비윤리적이고 혐오적인 사건이나 발화의 등장 자체에 대해서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는 입장인데, 우리가 보고 싶든 보고 싶지 않든 간에 그런 ‘악’은 실존하며, 인간이 사는 세계를 그리는 이상 선뿐만 아니라 악 역시 비출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 생각의 연장으로, 법의 사각지대에서는 약자 중의 약자인 여성이 거의 백 퍼센트의 확률로 성적인 착취를 당하는 현실을 생각해보자면 작품 내에서 여성에게 주로 성폭력이라는 고난이 주어지는 사건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신의 아그네스>의 경우, 극의 흐름 상 아그네스가 트라우마를 가질 필요성이 있는 캐릭터이긴 하지만 그것이 꼭 성폭력이어야만 했나를 떠올려보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섹스, 임신, 출산 등의 성적인 행위를 모두 겪었을 아그네스가 이에 대해 과도하게 무지하다는 점, 그리고 이 성적인 무지가 성적인 트라우마에서 기인했다는 점에서 극적인 아이러니가 발생하기는 하지만, <신의 아그네스>가 이 아이러니에 대해 크게 집중할 만큼 오로지 ‘수녀의 출산’이라는 기적만을 다루는 내용이 아니며 무엇보다 이런 뻔한 플로우는 너무나 많이 다루어졌기 때문에 더이상 ‘극적’이지도 않음을 상기해본다면 원 창작자나, 각색을 시도한 연출가나 게으르다는 지적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더군다나 아그네스의 출산이 있던 밤의 비밀을 밝히는 최면치료 장면에서, 출산하는 아그네스의 수녀복 아래로 피 칠갑을 해놓은 연출은 관객에게도 트라우마를 심어주고 싶은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그저 자극적이다.

 

더해서, 아그네스의 비극적인 모습-폭력의 트라우마로 울부짖거나 자해를 하는 모습-을 굳이 세밀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직접적으로 드러내어 무지하고 순수한 아그네스의 모습과 대비를 이루어야지만 그 비극성을 드러낼 수 있었던 걸까? 오히려 그 간극이 너무나 크게 다가온 나머지, 이를 종교적 영역으로 가져오는 일이 의도치 않게 실제 존재하는 가해자를 지우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기다 아그네스의 대조적인 두 가지 모습 사이에서 텐션이 최대치로 올라가기는 하지만, 오직 이 같은 극적인 ‘재미’를 높이기 위해서만 필요한 연출이었다면 실제로 어딘가에서 여전히 벌어지고 있을 누군가의 아픔을 수단으로만 사용한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법의 보호망 바깥에서, 약자의 일상은 비교적 안전한 위치의 개인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극적일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일상인 비극을 가져오는 일은 아주 조심스럽고 세련되어야 한다. 이를 ‘평범’의 테두리를 깨는 파격의 수단으로서만 사용하는 것은 직접적 가해 다음으로 비열한 일이다. 우리가 그러한 비극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을 뿐, 도의적 책임에 대한 고려 없이 남의 불행을 포르노 보듯 즐길 자격은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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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예상 가능한 정도의 단점이었다면, 장점은 꽤 의외의 진행 방식에 있다. 성에 대해 무지한 백치의 어린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했다면 보통은 아이 아버지에 초점이 맞춰지는 경향이 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이 어린 천사를 누가 범했는지, “그래서 누가 널 강간했는데?”에 대한 폭력적이고 관음적인 시선이 기저에 깔려있다. 물론 리빙스턴 박사 역시 두 번째 최면치료까지도 아이 아버지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아그네스가 불쌍한 피해자여야만 하므로. 그러나 극의 마지막 순간, 아그네스는 자신을 출산하게 한 사람이 주님이라고 답하며 심지어 그를 저주한다. 아그네스에게, 누가 자신을 직접적으로 가해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와 성적인 결합이 이루어졌는지, 그것이 강간인지 화간인지조차도 중요치 않다. 그의 세계에서 모든 일은 다 주님이 행하신 일이므로, 성경의 목소리를 빌어 행해진 모든 끔찍한 일 역시 주님의 행하심이다. 아그네스를 학대한 어머니, 그를 묵인하고 방치한 미리암 수녀, 아그네스의 트라우마에 빨대를 꽂고 결국 종교라는 안식처마저 빼앗아간 리빙스턴, 그리고 자해를 통해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힌 아그네스 본인마저도 모두가 주님이며 가해자이다. 피해자로 상정된 구조 속에서 가해자 개개인을 지목하는 것은 피해자 자신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니까. 누가 그를 괴롭혔는지가 아니라, 주님으로 대표되는, 자신을 착취한 세상 전부에 대해 엿을 날리는 아그네스의 모습이 의외의 대답이었다.

 

성적 트라우마를 등장시킨 것 자체에 대한 회의는 있지만, 심지어 그 문제에서조차 남성이 등장하지 않음은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젊은 여성에 대한 착취가 주로 남성에 의해, 성적으로 이루어지며, 여성의 삶에서 남성의 폭력이 어떤 식으로든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 자체가 남성의 관음증적 욕망을 채워주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상기해보면 말이다. 비단 아그네스뿐만 아니라 미리암 수녀와 리빙스턴 박사까지, 남성 위주 사회가 그려왔던 여성의 가장 주요한 기능-(남성과의) 성교나 출산, 육아 본능-에 멀리 떨어진 인물이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


심지어 극 중에서 이들의 삶에 의미를 가지는 남성은 정말 한 톨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데, 오직 여성들만의 서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신의 아그네스>는 의미가 깊다고 생각한다. 거기다 이 여성들이 엮어나가는 서사는 굉장히 입체적이다. 종교와 과학,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어머니와 딸, 언니와 동생 등 세 명의 인물만을 가지고 다양한 관계성을 그리며 여러 가지 해석을 가능케 한다. 특히 인물들의 삶에는 ‘어머니’가 주요하게 등장한다. 남성 위주로 그려진 세상에서는 모르겠지만, 사실 모든 딸들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이는 대체로 남성이 아니라 어머니가 아닌가.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결심 말이다. 모녀 관계의 복잡한 애증을 가져오면서, 단순히 ‘여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기존의 남성이 독점하던 친부 살해(patricide), 나아가 신과 인간의 영역으로 확장했다는 점이 특별하게 인상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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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저러니 해도 전반적인 감상은 호에 가까운데, 인물에 대한 가치 판단을 떠나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입체적이고 강렬한 여성 캐릭터의 등장은 언제나 반갑기 때문이다. 거기다 다른 무엇보다도 세 배우의 엄청난 에너지가 좌중을 압도하는 것에 감탄했다. 꽤 긴 러닝타임을 인터미션 없이 진행하는데도, 그것도 대본으로만 보면 다소 지루할 수도 있는 장면의 반복이 있는데도 전혀 지루하거나 긴장감이 떨어진 적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세 배우의 역량을 증명하기에는 충분한 것 같다. 특히나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하는 극이 몇 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여배우 세 명의 기량을 온전히 펼쳐 보이는 무대가 정말로 소중하다. 페미니즘적 관심은 제작사 역시 의도하고 있는 것 같다. 여성 관객이라면 누구나 40 퍼센트의 할인된 가격으로 공연을 관람할 수 있으니, 무대 위에서 남성의 소모품으로 존재하지 않는 여성 캐릭터를 보고 싶은 여성들에게 특히 추천해주고 싶은 연극이다.



[이채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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