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인문학, 너의 이름은 [문화 전반]

우리는 인문학을 얼마나 알고 있나요?
글 입력 2018.10.15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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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는 7년을 사귄 남자친구가 있습니다. 서로의 20대를 나눠가진 그 사람. 함께한 시간이 쌓인 만큼 깊어질 줄 알았던 사랑은 야속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집니다. 흘러간 세월만큼 쌓인 것은 사랑이 아닌 미움과 서운함일까요. 함께 카페를 차리고 당연한 듯이 결혼을 준비하던 보리는 조금씩 커져만 가는 마음의 틈을 느낍니다. 보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동화 중에서도 신데렐라를 가장 좋아했던 한 소녀는 신데렐라의 허름한 옷이 아름다운 드레스로 바뀌는 장면을 가장 좋아했답니다. 나의 드레스는 어떨까. 그 물음을 지금까지 놓지 않은 홍차(홍차영)는 자라서 드레스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그런 홍차는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내가 만든 저 많은 드레스 속, 나를 위한 하나의 드레스는 어디 있을까. 내가 드레스를 입을 수는 있을까. 꼭 맞게 재단되는 드레스 속에 내가 들어갈 자리는 있었을까. 내 가치도 누군가의 입맛에 맞게 다듬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내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물음만 늘어가는 서른을 보내고 있습니다.

 

네이버 웹툰 ‘홍차 리브레’의 주인공 홍차와 보리는 스스로에게 자꾸만 되뇝니다. ‘내 일상, 내 인생 이대로 괜찮을까? 나는 지금 행복한 걸까?’ 여러분들도 그런 적이 있으실 겁니다. 별다를 것 없는 일상에 염증이 나고, 내가 왜 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런 시간 말이죠. 그 날은 대부분 우울합니다. ‘내가 또 왜 이러지. 뭐 때문에 우울한 거지.’ 그러고는 이렇게 생각하죠. ‘에휴, 시간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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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요? 정말 괜찮아지셨나요? 글쎄요. 저는 웹툰 속 홍차와 보리의 고민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익숙해진 일상을 새로이 바라보는 것이 두려워서 점점 더 자기를 내려놓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일상의 익숙함이란 무섭습니다. 세상 가장 빛나고 소중했던 것들도 반복되는 일상 앞에서 빛이 바래고 맙니다. 이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것이 귀찮고 두려워서 괜찮다, 괜찮다 하고 점점 자기를 잊어가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죠.

 

여기까지 쓴 글을 보여주니 친구가 그러더군요. 인문학이 무엇인지 보여줄 것처럼 제목을 써 놓고는 딴 소리만 한다고. 아 그런가요? 그럼 이제 인문학 얘기를 해봅시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저자 최진석은 인문학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우리’라는 틀에서 벗어나 진짜 자신을 돌아보는 학문이라고 말입니다. 이 정의를 가지고 홍차와 보리의 고민을 다시 살펴봅시다. 조금씩 소원해져가는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지금 이 관계가 내게 맞는 건지 고민하는 보리. 남을 위한 옷만을 디자인하다가 문득, 나의 드레스, 나의 가치, 나의 행복을 고민하는 홍차. 어떤가요? 둘 다 누구의 여자친구, 어떤 디자이너라는 틀에서 벗어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잖아요. 자기들도 모르게 그 둘은 인문학을 하고 있던 겁니다. 있어 보이게 말하자면 ‘인문학적 통찰’을 하고 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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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 중요하다는 말에는 모두가 동의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문학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문학을 행하지 않고, 소비하고 있죠. 강연으로, 책으로, 어떤 하나의 흥미로운 콘텐츠 중의 하나로 말입니다. 혹자는 상상력과 창의력을 위한 하나의 도구쯤으로 인문학을 이용하려 합니다. 제가 공부하고, 느낀 인문학은 그게 아닙니다. 직함, 관계 같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우리’가 ‘나’에게 요구하는 굴레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무의식적인 일상의 계속이 아닌 삶을 사는 방법을 고민하고 질문하는 그 자체가 인문학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내가 원했던 것, 하고자 하는 것을 되새기는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용기입니다. 내 삶을 돌아보는 데에는 그만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다 싶을 때 관계를 놓을 줄도 알아야 하고, 무의미한 직장 생활을 그만 둘 수도 있죠. 반대로 지금까지의 내 삶을 긍정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용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웹툰 속 홍차와 보리가 별 것 아닌 일에도 아파하고 고민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잊고 있던 나의 행복과 가치를 찾아나서는 일은, 내 주변 모든 익숙한 것들로부터 한 걸음 떨어지고 나서야 그 길이 보이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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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모른 채 경영학과에 진학했지만 도무지 전공에 흥미가 없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제가 콘텐츠 제작이라는 꿈을 가지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인문학의 덕분입니다. 끊임없이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떨 때 기쁜지, 이런 것들을 고민해 왔거든요. 친구들과 잡지를 만들면서 제가 쓴 글을, 제 관점을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 때 기뻤고 그 경험을 통해서 지금은 네이버 열린 연단에서 인문학 크리에이터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힘들었지만 나를 놓지 않고 계속 고민하고 길을 찾았던 것이 가장 큰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글이 길어졌습니다. 정리하자면 인문학은 진짜 ‘나’를 찾아 나서는 여행이고 필요한 준비물은 나를 마주할 용기이다.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인문학을 비효율적이고 실체가 없는 것. 혹은 한 번 재미있게 소비하고 지나칠 콘텐츠 중 하나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께 웹툰 ‘홍차 리브레’를 추천 드립니다. 가볍게 보시다가도 홍차와 보리의 고민에 공감하고 자기를 돌아보는 순간을 마주하실 겁니다. 그 순간의 느낌을 잘 기억하세요. 바로 그 때 여러분도 인문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니까요. 부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 여행을 떠나기를, 그럴 용기를 가지기를 바랍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홍차 리브레' 프롤로그 보러 가기



[백광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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