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불행의 깔때기,연극 '그 개' [공연]

우리에겐 우연히 닥친 불행을 피해갈 재간이 없다
글 입력 2018.10.12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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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색 바닷속에 하얀 강아지와 한 소녀가 잠수경을 쓰고 자유롭게 수영하고 있는 모습을 일러스트로 그린 포스터. 처음 대면했을 때는 이 작품이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반려견과 소녀가 우정을 나누는 따뜻한 이야기일 것 같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러나 작품을 보고 나오면서 이 이야기가 감성적인 포장지에 세상의 암흑을 싸놓은, 가장 우울한 현실을 고발한 연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 그 개_해일과 무스탕.jpg


시놉시스


저택의 운전기사인 아빠와 둘이 살아가던 중학생 해일은 우연히 유기견 무스탕을 만나 우정을 키우고, 분홍 돌고래 핀핀의 이야기를 웹툰으로 그리며 비밀스런 속내를 도화지 위에 펼쳐나간다.

그 무렵 위층에 이사 온 선영 가족을 만나게 되고, 난데없이 욕을 뱉는 틱 증상에도 애정과 위로를 보여주는 선영의 믿음에 해일은 웹툰 작가의 꿈을 점점 키우게 된다.

그러다 해일은 아빠를 대신해 장강의 반려견 보쓰를 산책시키러 저택에 드나들던 중, 장강과 아빠가 없는 빈 저택의 정원에 영수와 별이, 해일과 무스탕이 드론을 날리러 가는데 뜻밖의 사건이 벌어진다.



1. 그 개_ 해일.jpg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욕설을 내뱉게 되는 뚜렛 증후군(속칭 '틱')을 앓고 있는 중학생 해일은 제약회사 사장 '장강'의 운전기사안 아버지와 단둘이 살아간다. 해일은 틱 장애 때문에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하고, 바쁜 아버지와 집을 나간 어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란다. 아무 때나 튀어나오는 욕설 때문에 남들의 시선이 항상 신경 쓰이는 해일은 아무도 없는 산에 종종 올라가 시간을 보내고, 그곳에서 우연히 유기견 한 마리를 만난다. 그 개에게 '무스탕'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해일은 무스탕과 친구가 된다.


제약회사를 운영하는 장강은 소위 '갑질'을 일삼는 부자로, 테니스 코치와 바람이 난 아내와 해외에 나가 있는 자녀와 손주들과 떨어져 반려견 '보쓰'와 둘이 살아간다. 그는 보쓰를 10년 넘게 키웠지만, 해일의 아빠 상근을 시켜 비싼 간식을 먹일 뿐 바쁘다는 이유로 정작 같이 시간을 보내지는 않는다. 한편 장강은 자신의 기념백서를 작성하기 위해 고용한 에세이 작가 현지를 성적 상대로 보고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자신과 상대의 나이 차나 감정적 교류는 차치하고 자신의 마음만을 앞세우는 자기중심적인 면모를 보인다.


해일의 옆집에 이사 온 입시 미술 선생님 선영과 학원 수학 선생님 영수는 어린 아들 별이를 키우며 사는 젊은 부부다. 그들은 가난한 현실 속에서도 소박한 행복을 찾으며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간다. 육아와 금전적 문제로 힘들 때가 많지만,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그들은 웹툰 작가를 꿈꾸는 해일에게 미술을 가르쳐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따뜻한 이웃이다.



2. 그 개_영수 선영 별이 무스탕 해일(별이의 생일파티).jpg
 


극의 초반,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해일이 새로운 친구 무스탕과 따뜻한 이웃 선영과 영수, 별이 가족과 만나며 외로움을 조금씩 이겨나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학교에서는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돌아와도 텅 빈 방만이 기다리던 과거. 그러나 이제 해일에게는 자신을 맞아주는 무스탕과 따뜻한 위로를 해주는 이웃이 있다. 나아진 환경에서 해일은 분홍돌고래 '핀핀'이 저주를 풀기 위해 친구 '무스탕'과 '거북이 가족'의 도움으로 파란 돌고래 '또또'를 찾는 여정을 그린 웹툰 '어비스 러브'를 그린다. 많은 부분 해일 자신을 투영한 이 웹툰은 해일의 성장기를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해일의 성장기는 좋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마냥 따뜻하게 전개되지 않는다. 우연히 닥친 불행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던 모든 인물의 일상을 파괴해버리기 때문이다. '그 개' 사건이 일어나면서 해일과 거북이 가족(선영과 영수, 별이 가족), 해일과 무스탕의 관계에 커다란 금이 생겨버린다. '그 개' 사건은 힘들게 살면서도 꿋꿋이 꿈을 꾸던 해일과 거북이 가족의 희망도 파괴한다. 갑자기 닥쳐 해결할 수도 없는 이 불행 앞에서, 그들은 약하고 약하여 속수무책이다.



8. 그 개_영수와 선영.jpg
 


이 작품은 하나의 불행이 닥쳤을 때 이를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확연히 다르다는 구조적 차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 개' 사건은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불행이다. 그러나 이 불행이 각 인물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무척 다르다. 장강에게는 자신의 반려견을 지킬만한 힘과 능력이 있다. 그는 그저 자신의 개에게 "다음부턴 그러면 안 돼!"하고 경고하고 있는 돈을 조금 내어주는 정도면 불행의 불씨를 쉽게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가진 것 없는 별이 가족과 해일, 그리고 무스탕은 사정이 다르다. 그들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그저 자신을 자책하고, 타인을 원망하고, 스스로를 망쳐갈 뿐이다.


선영이 해일에게 원망의 말을 퍼붓고, 해일이 무스탕을 유기하는 것에 대해 마냥 질책할 수 있을까? 그들이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은 극의 초반을 보았다면 누구나 알 수 있다. 하지만 닥쳐온 불행 앞에서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버리고 만다. 가난이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권력이 없으면 어떻게 스스로를 낮춰야 하는지, 불행이 닥치면 어떻게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무거운 이야기를 이 연극은 마냥 무겁지만은 않게 그려낸다.



11. 그 개_ 해일(마지막 장면).jpg
 


불행에는 깔때기가 있는 것 같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 모이고 모여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로 흘러 들어가는 것 같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버텨야 할까? 그저 운 좋게 불행이 빗겨나가기를 비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지는 않다.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불행은 이미 어려운 사람이라고 피해가지 않는다. 상처받지 않고 상처 주지도 않고 무사히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우울에 그치기엔,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야 하니까.


공연장을 나서는 발걸음이 묵직했다.






그 개
- 2018 서울시극단 정기공연 -


일자 : 2018.10.05(금) ~ 10.21(일)

시간
평일 - 오후 8시
토 - 오후 3시, 7시
일 - 오후 3시
화 - 공연없음

장소 :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티켓가격
R석 50,000원
S석 30,000원
A석 20,000원

주최
(재)세종문화회관

주관
서울시극단

관람연령
만 13세이상

공연시간
120분




문의
서울시극단
02-399-1114





[박찬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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