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순례길의 끝, 그리고 우리의 순례길의 시작 [도서]

박재희 씨의 산티아고, 40일간의 위로
글 입력 2018.10.08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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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살 재희가 회사를 그만두고, 송별회 자리에서 이제 뭐할거냐, 고 묻는 회사 사람의 말에 '산티아고로 떠날 거다'라는 말을 하면서부터, 그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운명이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40일간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이야기다. 생각보다 짧은 책이라 금방 읽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꽤 오랜 시간을 붙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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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이유가 필요했다.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삶은 익숙하지 않았다. 산티아고로 떠난다니까 친구들은 의혹과 만류를 쏟아냈었다. 왜? 뭐 하려고? (P.19)



산티아고로 떠난다고 하니 다들 그 이유를 물어봤다고 한다. 그 말에 대답을 할 수 없었던 재희는 초반에는 순례길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여기로 떠나온 이유를 물어본다. 길에서 만난 토마스는 이유를 지어내지 않고 '자신의 결정이 그 이유'라고 했다고 한다. 참 솔직한 사람이다.

우리는 무언가 일을 시작할 때 그 이유를 찾는다. 누가 뭔가 대외활동을 시작했다고 하면 "그거 왜 해?", "바쁘지 않아?"라고 물어본다. 누군가는 취업을 위한 스펙을 쌓기 위해 어떤 활동들을 한다. 목적이 있는 활동을 하는 것은 쉽다. 자신이 어떤 구체적인 방향을 향해 가고 있다고, 그 길을 가는데 하나씩 밑받침을 깔아준다고 말하는 것이다. 좀 더 쉽게 계단을 올라서 꿈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그러나, 목적이 없는 활동을 하기는 어렵다. 모두가 어떤 방향을 향해 일제히 걸어가는데, 자기만 이상한 길로 방황하는 것처럼 보이고, 더군다나 자기가 왜 그걸 하는지도 알 수 없다. '하고 싶어서'라는 솔직함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어서 어느새 자신의 마음을 마주할 수 없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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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책의 43페이지부터 시작되는 "용서는 정말 신에게 속한 걸까?" 챕터였다.


"당연하지, 세상에 용서할 수 없는 사람 많아.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용서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많아." "재희야, 용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네가 너에게 주는 축복이라고 생각해 봐."



잘못을 저지르고도 하느님에게 용서를 구하고, 자신 혼자 회개해버리는 사람이 많다. 그럴경우, 피해자 또는 피해자의 가족들은 평생을 고통받는데 가해자는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 재희는 그런 마음에서 용서를 이해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둘 중 어느 쪽의 사람이냐를 굳이 따지자면, 용서를 구해야 하는 쪽, 잘못을 잘 저지르는 쪽에 사람이었다. 사회성이 부족한 탓에 대학교에 와서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종종 잘못을 저지르곤 했다. 한번은 친구가 스킨쉽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내게 말해주었다. 예전에 2년간 사귄 남자친구가 키스를 하려고 했는데 그걸 손으로 막아버렸다고 했다. 나는 그걸 전남자친구에게 말했는데, 전남친이 그걸 친구가 있는 자리에서 친구가 좋아하는 남자애에게 말해버렸다. "너는 너가 키스를 하려고했는데 여자애가 손으로 막으면 어떨 것 같냐?" 고 말했다고 했다. 친구는 그 얘기를 나에게만 말했던 거고, 내 전남자친구가 말한 이야기니 내가 말했을거라 생각하고 내가 아주 입이 싼 사람이라고 여겨 우리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나는 차마 용서를 구하지도 못했다. 시간이 지나 그 친구와 어느 정도 인사를 하고 지낼 수 있게는 되었지만 나는 그 애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사과를 하는 것은 그 친구의 자존심은 회복시키지 못하지만 단지 내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한 자위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그애에게 사과를 하지 못했고 우리의 관계는 그저 피상적인 관계에 머물러있다. 나는 그 애를 볼 때마다 과거의 잘못이 떠오른다.

용서받는다는 것은 죄를 고백하고 죄를 갚는 마음으로 살며 양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적어도 하느님이 모든 죄를 용서했다고 감사하며 피등피등 평화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죄를 짓고 용서는 신만이 할 수 있다면, 용서는 신의 능력일 뿐 사람은 용서할 능력이 없어 자신조차 용서하지 못하게 된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용서를 구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아프게 했다면, 하느님에 앞서 잘못된 대상에게 먼저 진정한 용서를 구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용서받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하늘에 계신 그 분이 개입할 자리가 생기리라.(P.47)

용서받지 못할 행위로 사과를 구하는 것은, 자기 죄책감을 덜어서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지기 위한 행위라는 것에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잘못을 저질렀다면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을 그 일 이후에는 많이 배웠다.

가장 친한 친구와 여행을 가기로 했을 때도 돈이 없어서 급하게 하루전에 취소를 했었고 당연히 대판 싸웠다. 그때는 울면서 사과를 했다. 남자친구에게도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나는 이제 용서받지 못할 거야, 라고 생각하고 얼굴을 바로 보러가지도 못했었지만, 결국 사과를 했고 더 노력하는 것으로 용서를 받았다. 그 사람들이 나를 정말로 용서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친한 친구는 내가 돈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집 앞 놀이터에서 캔맥주를 한 캔 마시면서 밀린 이야기를 하고, 힘들 때마다내가 좋아하는 빵과 디저트를 가끔씩 사다 준다. 그 애에게 더이상 돈이 없다는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남자친구에게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죄책감을 더는 행위였지만 적어도 그 일로 나와, 나를 대하는 사람들이 조금은 달라졌다. 서로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우리는 죄를 짓고 못된 짓을 합니다. 우리는 잘못한 이를 용서하지도 못합니다. 용서는 당신의 능력이니 저희에게는 잘못을 빌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P.49)



굉장히 큰 공감을 얻었다. 나는 그런 잘못들을 소중한 이들에게 저지르곤 하니까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고 그동안 나를 많이 비난해왔던 것 같다. 이것저것 크고 작은 잘못을 반복해서 저지르는 나를 용서해주고 싶어졌다. 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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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슬픈 짝사랑"이라는 챕터도 매우 인상깊었다.


나무 사이로 작은 새끼 당나귀가 보였다. 새로 돋은 잎사귀를 따먹고 비 맞은 나무를 머리로 흔들며 신나게 노는 중이었다. 엄마는 새끼를 찾으며 울부짖는데 녀석은 그러거나 말거나 이른 봄을 만끽하고 있었다. 봄을 즐기며 환희에 차 있는 새끼당나귀와 목놓아 우는 엄마 당나귀 사이에 내가 서 있었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구슬프게 새끼를 열심히 찾아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야기속의 재희는 아버지가 사 준 비싼 시계를 거칠고 험하게 다뤘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 재희가 아이를 낳고, 딸에게 비싼 헤드셋을 선물했을 때 티비만 보며 자기를 반기지 않는 딸을 보면서 아버지를 만난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에게 해야 할 것은 미안하다는 말이 아니라, 고마워 라는 말이었다고.

우리 엄마는 요즘 쇼핑 중독이다. 우리가 고향에 있을 때는 별로 그러지 않는데, 동생과 내가 자취방으로 올라가서 집이 텅 비어버리면 하루종일 쇼핑만 한다. 근데 엄마의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동생과 내가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이것저것 다 사다준다. 굳이 필요없는데 두유를 4박스나 사다준다고 하길래 다 못 먹는다고 얼마나 말렸는지 모른다. 그것말고도 매일 집에 돌아오면 택배박스가 우리 집 앞에 있다. 어느 날은 고구마, 어느 날은 에어프라이어, 어느 날은 샌들, 라면, 돌자반, 된장 끝도 없다. 옆집 아주머니께서 내가 아주 소비 성향이 강하다고 생각할까봐 걱정스러울 정도로 정말 많은 택배가 와있다. 엄마가 나름대로 빈자리를 채우려고 하는 건 알고 있다. 동생에게는 바나나우유 1박스, 초코우유 1박스, 사골곰탕, 햇반 등등 엄청나게 사서 보낸다. 엄마 나름의 허전함과 공허함을 채우려는 행동이다.

이 이야기와 엮어서 볼 만한 이야기는 250페이지에 나오는 kisser와 kissed에 관한 것이다.


키스하는 사람과 키스를 받는 사람kisser vs kissed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으로 나눈 정의였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키스하는 역할과 키스받는 역할을 담당한다. 언제나 키스하는 사람인 사람은 없고 언제나 받는 사람인 것도 아니다. 역할은 사람의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 누구를 만났을 때 사랑과 위로, 격려를 쏟아 붓는 사람이 될 때가 있고 주로 받기만 할 때도 있는데 그 역할은 자주 바뀐다고 한다. (p.250)



엄마는 우리에게 kisser다. 누구에게는 kissed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그건 아빠인 것 같다. 두 분은 50에 가까운 나이지만 여전히 애정표현이 대단하다. 저녁 식사 후 밤마다 만보씩 걷는 산책을 하신다. 여름에 더워서 시작한 산책이지만 벌써 3개월 넘게 지속하고 계시고, 두 분 다 살이 많이 빠지셨다. 밥 먹을 때도 아빠가 늘 엄마에게 애정표현을 하면 엄마는 밀어낸다. 바쁘게 일하는 중에도 엄마를 보러 점심 때 종종 들르시고, 부산에 외할아버지 제사를 지내러 갈 때도 늘 명절에 아빠의 고향보다 먼저 가신다. 늘 엄마를 먼저 위해주신다. 그게 너무 당연해서 몰랐는데, 이번에 아빠의 고향에 갔을 때 큰고모가 아빠를 많이 혼내셨다. 그분은 연세가 많으셔서 딸은 출가외인이라 부모의 제사를 모시지 않아도 되는데, 며느리는 모셔야 한다는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계셨다. 아빠가 막내인데도 아빠에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하고, 한번도 시댁에 오지 않는 엄마를 나무랐다. 그렇게 오래도록 욕을 혼자 먹어도 집에 가면 아빠는 그 문제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대가 어떻든, 가족이 어떻게 생각하든 엄마의 선택을 가장 우선시하는 아빠. 그런 아빠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엄마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끝없이 쏟아내시는 것 같다.

부모님은 두 분 다 나의 결정에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신다. 내가 대학을 선택할 때도, 선택한 뒤에 공부를 할 때도, 봉사활동을 한다고 할 때도, 회사에서 인턴을 한다고 할 때도, 아트인사이트에서 실무진을 한다고 할 때도. 너무 바쁘고 힘들지 않겠냐고는 하시지만 뭔가를 하라거나 하지 말라거나 그런 말은 아무도 꺼내지 않으신다. 때로는 내 자유를 존중해주시는 것이, 인생에 대한 방향을 잡는 데 아무런 지표도 없이 너무나 막막하게 느껴져서 조금 버겁기도 하다. 그러나 부모님께서는 살아가는데 최소한의 물자를 지원해주실 뿐, 나의 삶을 살도록 자립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우리 부모님만의 자식에 대한 사랑의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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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를테면 동굴형 시야를 가졌다. 보겠다고 작정한 것이 아니면 잘 못 본다. 관심을 두지 않은 것에 대한 관찰력이 극도로 부족하다. 함께 걷던 친구가 '방금 노란 옷 입은 남자 너무 웃기지 않나?'라고 했을 때 내가 그 노란 옷을 봤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이 구절 역시 완전 공감하면서 봤다. 글 중간중간 재희와 내가 너무 똑같은 부분이 많아 특히나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나 역시 재희처럼 다른 것을 잘 보지 못한다. 늘 인사를 먼저 받는 편인데, 내가 다른 사람을 자세히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사를 걸어오는 친구들에게서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냐', '인생의 고독을 혼자 짊어진 것 같다'는 말을 많이 듣는 편인데, 앞에 있는 것을 보기보다는 생각에 너무 집중하고 있어서 그렇다.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할 때도, 남자친구가 저 사람이 입은 블라우스같이 하늘하늘한 옷이 좋다고 말하면 나는 그 옷이 뭔지 정말 모른다. 이미 그 사람은 지나가고 없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아 내 삶만을 살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내 전공인 건축과는 정말 극도로 맞지 않은 성격이다. 나와 정반대 성격을 가진 남자친구는 모든 걸 꼼꼼히 주의깊게 보는 편이라 건물도 한번 본 것은 잊지 않고, 특유의 통찰력을 발휘해서 건축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어도 종종 꽤 전문가스러운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건축을 전공함에도 불구하고 '나 이외의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사물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런 내가 문화예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에 다들 의심을 품을지도 모르겠다. 관심도 없는데 관심있는 척 하는 거 아냐? 라며. 문화예술은 내가 모르는 나의 삶을 일깨운다고 생각해서 어쩌면 나와 가장 가까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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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중에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산티아고의 순례길은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사정, 아픔, 갈등을 안고 맨몸으로 여행을 떠나는 길이기 때문에 저마다 마음 속의 이야기를 안고 있다. 재희의 여행길은 그래서 더욱 재밌었던 것 같다.

그 중 한스라는 캐릭터가 가장 인상깊었는데, 재희의 이야기에 따르면 '8년간 함께 살며 너무나도 사랑했던 여인이 자기를 떠나버린' 캐릭터로 '갑작스런 실연에 죽고 싶었다고, 절망적이라면서도 한스는 보카디요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고, 스프를 후루룩 들이키며 최고라는 코멘트를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순례길에 만난 케이트에게 노골적으로 대쉬를 하는 인물이다. 굉장히 역설적이면서도 현재에 충실한 사람인 것 같다.


까미노 병에 걸리고 나면 편안함 따위가 시시해져 버린다. 설령 매력 넘치는 도시 아스트로가라 해도 길을 걷는 동안 느끼는 희열을 안겨주지 못한다. 무엇 때문에 내일까지 기다려야 하냐며 부지불식간에 순례길로 들어와버렸다. 찢어지듯 아픈 뒤꿈치를 달래가며 이부프로펜을 복용해야 잠들 수 있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고통의 댓가로 얻는 하루하루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기쁨을 선사하고 있었다.



재희가 말하는 순례길은 물집과 고통과 벌레와, 씻지 못하는 것, 더러움과의 싸움이고, 사실은 그 고난을 견뎌내려고 하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자신을 적으로 두면서까지 도대체 걸으면서 무엇을 얻는 걸까. 그것은 일상에서는 얻지 못하는 것이기에 재희와 순례자들은 그 힘든 길을 걸어가는 걸까? 편안함만을 거부하면서까지 걷는 이유가 대체 뭘까. 앞에도 나왔지만 '그냥' 걷는다고 했다. 하지만 세상에 그냥 하는 것은 없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재희는 다른 순례자들의 속사정을 자세히 듣게 되는데, 누군가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위해서, 자꾸만 자해하는 아들을 위해서, 아들과 친해지기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버리거나 배신을 해서 라는 구체적인 그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나타난다.

인간이 하는 행위는 수면과 먹는 행위, 성적인 행위를 제외하면 거의 다 의식적인 목표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행위를 벗어난 일은 반드시 무언가 목적이 있고, 이유가 있다. 그 본질적인 이유를 찾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며 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


사실 까미노에서는 세속의 모든 것들이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린다. 순례자에게 중요한 일은 단 두 가지이다. '위장을 채우고 창자를 비울 수도 있는 카페가 언제 나타날 것인가.' 그리고 '잠자리가 있는 다음 마을까지는 얼마나 걸어야 하나. (p. 136)



순례길의 아이러니다. 분명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 온 길이지만,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에겐 다른 일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저 인간의 본능적인 행위만이 중요해지는 순간이다. 어쩌면 정말로 이유없이 '그냥' 순례에 동참했다는 말은, 아무 생각 없이 본능에 충실해지겠다는 말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내가 믿어오던 생각들에 대해 온갖 근거없는 믿음이 조금씩 깨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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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노는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수개월의 금욕 기간을 필요로 한다. 먹고 자는 것은 그다지 절제할 필요가 없으니, 콕 집어 말하자면 성적인 금욕 기간을 말하는 것이리라. 긴 시간 같은 목적지를 향해가면서, 결이 비슷한 내적 동기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서로 의지하고 이끌릴 수도 있을 것이다. 드물기는 해도 혈기왕성한 남녀가 까미노 기간 중 합의하에 섹스 파트너로 지내기도 한다니, 인간의 본성이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p.89)



사실 책을 읽기 전에는 친구와 얘기를 할 때 "왜 사람들은 굳이 그렇게 힘든 길을 걷는지 모르겠다. 나에겐 서울 생활도 충분히 힘들다"고 했었다. 친구도 여행으로만 외국을 여러번 다녀봤지, 한 달 이상씩이나 외국에 가있는 건 너무 외롭고 힘들어서 못할 것 같다고 공감해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재희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한번 순례길을 걸어가보고 싶어졌다. 자신의 나태함과 편안함과의 싸움이라는 인간의 기본 욕구를 벗어난 그 행위에 도전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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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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