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언어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조선의 몸짓이 말 걸기를

무용극 <궁:장녹수전> 프리뷰
글 입력 2018.09.27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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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초엔가, 보러 갔던 현대무용 공연을 계기로 무용은 어렵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것 같다. 당시 무용에 대한 지식도, 경험도 별로 없는 나로서는 기대보다 걱정이 앞서는 마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낯설고 생소한 세계에 대한 약간의 설렘도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공연 시작 후 처음 10분까지는 그만큼 잘 집중할 수가 없었다. 움직이는 듯 멈춰 있는 듯한 무용수의 몸짓, 하늘거리는 의상과 신비로운 백색 조명, 그리고 몽환적인 배경음악 속에서 나는 마치 꿈속에 있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 꿈이 진짜 꿈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 한 마디의 대사도 설명도 없이, 오로지 몸짓으로만 가득 찬 그 무대가 나에게는 어려웠다. 어려웠다는 건, 다시 말해 즐기지 못하고 마음에 와 닿지 못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집중력도 흐려지고 눈꺼풀도 무거워졌다는 것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그 유명한 극단의 수준 높은 무대 앞에서 졸고 나온 무용 문외한일 뿐이었다.

그나마 춤이라는 영역에 아주 조금이라도 눈을 뜨게 된 건 어반 댄스를 접하면서부터일 것이다. 정말 아마추어 수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2-3년 째 꾸준히 어반 댄스 영상을 찾아보고 직접 춰 보기도 하면서 내 안에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 새로운 세계란 비언어의 세계였다. 어반 댄스는 얼핏 보면 방송에서 흔히 접하는 아이돌 안무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안무에 비해 노래와 가사가 우선시 되는 대다수의 아이돌 안무와는 조금 다른 춤이기도 하다. 어반 댄스는 오로지 몸짓으로만 표현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안무가가 노래하고 랩하며 춤을 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바로 그 점 때문에, 대중 안무에 비해 더욱 풍부하고 다채로운 몸짓을 구사할 수 있다. 그래서 어반 댄스에 빠져들게 되면 몸짓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게 참 신선한 경험이었다. 깔끔한 동작과 뭉게는 동작, 날리는 동작을 구분할 수 있게 되고, 노래처럼 안무에도 기승전결이 있음을 알게 되고, 작은 카운트도 놓치지 않고 잡아내는 동작들에 재미를 느끼고, 춤의 밀도와 흐름이 무엇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다. 안무가 간의 춤선과 스타일의 차이를 느끼는 것만큼 흥미로운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이미 언어적 소통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비언어적 소통은 생각보다 생소하고 장벽이 높다. 이는 예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상대적으로 언어가 중시되고, 언어를 통한 서사가 중시되는 예술 장르가 그렇지 못한 예술 장르보다 접근하기 쉽다. 그런 이유로 미술관이나 음악회보다는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서사 중심의 예술에 사람들이 친근감을 느끼는 것 아닐까. 음악이나 미술도 사실 마찬가지다. 가사가 있는 대중가요나 팝이 그렇지 못한 클래식보다 더욱 친숙하고, 미술관을 가도 작품 자체보다는 그 옆에 글로 적힌 작품 설명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그림이나 음악처럼 비언어적 소통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 몸짓도 예외는 아니다. 춤 혹은 무용 분야가 상대적으로 대중성을 갖지 못하고, 그나마 언어적 매체 혹은 언어적 서사와 결합한 형태여야 겨우 눈길을 받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 전통 무용극 장르인 < 궁:장녹수전 >을 연출하면서, 전통성을 살리려 노력했다. 무엇보다 ‘춤’이 중요하고,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하고 있는 만큼 드라마와 춤이 연결고리를 찾는 것. 춤이 드라마가 되고, 드라마가 춤에 녹여질 수 있는 부분에 집중했다.

- 오경택 연출


언어가 편한 이들에게 굳이 불편한 몸짓으로 말을 거는 극이 있다. 지난 4월부터 정동극장에서 오픈런으로 공연되고 있는 < 궁:장녹수전 >은 조선 연산군 재위 당시의 실존인물인 장녹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전통 무용극이다. 사실 이 극은 여러모로 관객들에게 부담을 줄 여지가 있다. 우선 조선시대라는 점에서 시대적 격차와 그에 따른 공감의 한계가 존재하기 마련인데, 게다가 춤이라는, 낯선 장르라는 점에서 심리적 거리감이 한 번 더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극은 자신감이 있다. 왜냐하면 관객이 가질 수 있는 이 두 가지 부담감을 정확히 노려 뒤집기 때문이다.

우선 극이 시작되기 전에 프롤로그 격으로 버나놀이, 콩주머니 던지기 등의 전통 놀이가 진행되는데, 여기에 관객이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해 극 전반에 대한 관객의 친밀감을 높인다. 갖가지 서민 놀이 문화를 선보인 뒤에는 화려한 춤들이 이어진다. 장고춤, 한량춤, 교방무 등 소위 ‘기방 문화’를 대표하는 춤들은 관객들에게 낯설고도 새로운 전통춤의 세계를 접하게 할 것이다. 이어지는 궁중 무용 ‘가인전목단’, 그리고 극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뱃놀이 ‘선유락’ 등을 포함한 다채로운 전통 안무들과 완성도 높은 퍼포먼스들은 전통춤 혹은 전통 무용은 어렵다는 관객의 선입견을 깨 줄 것이라 기대한다.

이처럼 춤에 많은 비중을 두는 < 궁:장녹수전 >은 바로 그 점으로 인해 언어적 서사를 비트는 효과도 얻는다. 극의 주인공 장녹수는 통상적으로 연산군의 실정을 부추긴 악녀, 요부 등으로 그려지는 인물이다. 연산군을 유혹해 실권을 틀어쥐고,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비정상적인 악행을 저질렀다는 것, 결국은 중종반정에 의해 연산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것 등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다만 이 극은 그렇게 잘 알려진 사실보다 조금 다른 면에 더 초점을 둔다. 바로 장녹수가 당대 최고의 예술인이었다는 점, 노비에서 기녀로 또 기방에서 궁궐로 단숨에 신분상승을 할 만큼 독보적인 재능과 기예를 가진 인물이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녹수의 예술적 재능을 보이는 장치가 바로 춤이다. 그가 보이는 탁월한 춤 앞에서 관객들은 그동안 언어적으로 전승된 수많은 역사적 사실과 평가, 비난과 멸시 등은 잠시 뒤로한 채, 시대를 뛰어넘는 예술성을 가진 예인 장녹수와 오롯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장녹수라는 인물에 대한 부담감과 편견에 두려움도 있었지만, 인물의 또 다른 면모를 찾아내 그려내는 일이 즐거웠다. … 결국 장녹수가 예인(藝人)이라는 점, 그녀가 보여준 기예를 통해 찾아갈 수 있었다.

- 정혜진 안무가


춤, 그것도 먼 옛날의 춤 앞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문외한이 될지도 모르겠다. 다만 언어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에게 오롯이 몸짓으로 말을 걸어오는 이 극이 낯설고 새로운 경험이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저 예인 장녹수의 춤사위에 함께 즐기고 한바탕 놀고 올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궁 장녹수전_web_국문_최종.jpg
 

[김해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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