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비평가 - 가슴 묵직해지는 진실의 노래

비평가는 실패했고, 극작가는 성공했지만, 진실은 그 자리에 남았다
글 입력 2018.08.26 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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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묵직해지는 진실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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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는 실패했고
극작가는 성공했지만
.
.
진실은 그 자리에 남아있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12시.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이어 비평가 볼로디아를 대신해 자신의 작품에 대해 평하는 스카르파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카르파는 계속 써나갈 것이다. 우리를 구원할 진실의 노래를."

묵직한 메세지를 뒤로하고 꺼지는 조명. 극이 끝나자마자 고르지 못했던 호흡을 터뜨렸다. 숨 쉴 타이밍도 잊어버릴 만큼 극은 강렬했다. 인사하는 배우들을 향해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고 천천히 극장을 나왔다. 가슴 한 켠이 묵직해져오는 커다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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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극에 호기심이 생긴 건 정말 단순하게도 제목 때문이었다. "비평가". 비평가는 여러 콘텐츠에 의미를 부여하는, 아니 콘텐츠를 넘어 사회 전반에 걸쳐 의미를 탐구하고 포착해내는 사람이다. 무언가를 창작하기보다는 기존에 존재하던 것들에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 즉 하나의 낙인을 찍어내는 사람이다. 사람들을 대신해서 사유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대중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일종의 학자라고도 할 수 있다. 비평에 나름의 의미를 두는 나에게 연극을 둘러싼 작가와 비평가의 갈등이라는 주제는 그 자체로 흥미거리가 되었다.

더불어 2인극이라는 방식도 시선을 끌었다. 연극을 자주 즐기는 편이 아니기에, 2인극으로 진행되는 연극은 접해본 적이 없었다. 다만 극장에 갈 때마다 희극 특유의 생생한 현장감에 감탄을 하는 나이기에, 2명의 배우가 극을 끌어갈 방식이 마냥 궁금했다. 그들의 압도감, 카리스마를 은근슬쩍 기대하면서 극이 열리는 두산 아트스페이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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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 들어서서 자리에 착석하는 순간까지도 나의 호기심은 계속되었다. 시선을 끈 건 무대 구성방식이었다. 일반적인 일방향성 구조가 아닌 가운데에 무대가 있고 관객들은 양 옆으로 무대를 둘러싸고 착석해있었다. 순간적으로 이런 구성 방식이 작품이 가진 권력을 해체하고 좀 더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나의 오판이었다. 배우들이 들어서고 불이 꺼졌다. 백현주, 김신록이라는 배우는 사라지고 비평이라는 권력을 가진 비평가 볼로디아와, 그의 평을 기다리는 극작가 스카르파가 대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양방향성을 띈 무대는 그저 두 사람이 가진 엄청난 아우라를 더욱 부각시켜주는 장치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두 명의 인물이지만 무대를 채우는 존재감은 엄청났다. 양면이 트인 무대는 두 인물의 자유로운 이동을 허락할 뿐, 작품이 가진 권력을 해체하는 데는 기여하지 못했다. 관객의 영향력이 발휘될 틈을 두 배우의 장악력이 완전히 막아버렸으니까. 무대의 일방향성이 주는 구조적인 영향력을 두 배우는 그들의 아우라로 완전히 대체해버렸다. 그렇게 나는, 압도당한 채로 극에 흘러들어갔다.



구원의 노래 - 진실을 둘러싼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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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디아와 스카르파는 극 중에서 진실에 대해 논한다. 보다 정확히는 연극이 추구해야하는 바, 연극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 이야기한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볼로디아를 찾아온, 갑작스러운 스카르파의 방문에서부터 출발한다. 성공적인 연극 공연을 끝낸 뒤, 수많은 영광을 뒤로하고 스카르파는 볼로디아의 집을 방문한다. 그가 매일 저녁 공연을 보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공연에 대한 비평을 써내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작품에 대한 그의 평가를 듣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스카르파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불구하고 볼로디아는 그닥 당황하지 않는다. 둘은 딱히 정의하긴 애매하지만, 깊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굳이 정의하자면 필담으로 맺어진 스승과 제자라고 할까.

볼로디아는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극에서 추구해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진실이며, 삶에서 마주하는 버거운 진실의 순간들을 연극이 담아내야한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거짓이 점철된 예술계를 강렬하게 비판한다. 그런 그의 눈에 띈 신인 작가가 바로 스카르파였다. 볼로디아는 스카르파의 첫 작품에 강렬한 비판을 쏟아부었지만, 그에게서 일종의 가능성을 보았다. '이 아이라면 진실을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볼로디아로서는 스카르파에게 가능성을 걸고 지속적으로 그의 성장을 지켜봐온 셈일 것이다. 그리고 볼로디아의 기대에 맞춰, 정확히는 그에게 인정받기 위해 스카르파는 지속적으로, 계속 글을 써내려간다. 그리고 바로 그의 공연이 15분간의 기립 박수를 받던 그 날, 볼로디아의 최후의 평가를 들으러 그의 집을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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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극작품과 그에 대한 비평으로 대화하던 두 인물의 직접적인 대담은 보다 생생하게 진행된다. 스카르파의 작품을 매개로 구성되는 이들의 대화는 극 중의 극이라는 메타연극의 특징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스카르파의 작품에 등장하는 권투 사제 지간의 스승과 제자는 마치 스카르파와 볼로디아를 보는 듯하다. 사람들의 관심과 환호에 열광하는 제자, 그런 제자에게 그보다 더 심오하고 중요한 권투의 본질을 가르치려는 스승은 마치 연극의 성공을 추구한 스카르파와 진실의 추구를 강조하는 볼로디아를 닮아있다. 그리고 스카르파의 극 중 '스파링을 통해 스승을 쓰러트리는 제자의 포맷'은 진실을 외치던 볼로디아에게 거대한 진실의 폭탄을 터뜨려 그를 무너뜨려버린 스카르파의 행동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스카르파가 터뜨린 진실의 폭탄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두 사람이 열띠게 토론했던 '연극의 진실성'에 대한 논쟁은 사실 스카르파의 작품에 대한 논쟁이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의 작품에 진실성이 있느냐, 없느냐의 싸움이었던 거다. 특히 이 논쟁은 2막에서 등장하는 여성의 진위여부를 가리는데 집중되어있다. 볼로디아는 1막까지는 진실을 향해 달려가던 연극이 2막에서 등장한 여인으로 인해 망가졌으며, 그 여인은 스카르파가 극의 성공을 위해 끼워넣은 거짓된 장치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런 여성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일괄하는데, 스카르파는 여기에 반기를 들며 살며시 진실의 폭탄을 꺼내든다. 2막에 등장하는 여인의 실제 롤모델이 존재하고 그 여인이 사실 볼로디아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볼로디아는 여기서 무너진다.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 문을 박차고 나가는 그의 모습은 내내 부정하던 삶의 거대한 진실을 마주한 사람의 발악과 같았다. 볼로디아가 문을 박차고 사라진 뒤, 스카르파 혼자 남은 집에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신문사에서 볼로디아의 비평을 싣기위해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전화를 대신 받은 스카르파는 볼로디아가 남긴 비평을 구겨 던지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비평을 읊는다.

"결국 스카르파는 진실을 노래하는데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써나갈 것이다. 우리를 구원할 진실의 노래를."



진실의 또 다른 이름,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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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볼로디아의 비평이 아니라, 스카르파의 비평이지만 실상 그 둘의 내용은 같다. 두 사람 보두 스카르파의 연극이 결국은 진실을 전달하는데 실패했다고 말한다. 늘상 연극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던 볼로디아는 실제로 연극을 통해 진실을 마주하자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무너져내린 스승을 바라보던 제자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비평을 조작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승의 비평을 그대로 읊었다. 비평가는 늘상 말하던 극의 진실을 마주하는데 실패했고, 극작가는 스승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했지만, 실상 어떤 실패도 어떤 성공도 없었다. 비평가는 극이 아닌 삶의 진실을 마주하러 떠났고, 극작가는 스스로 진실의 노래를 부르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들은 결국 실제의 삶에서 진실을 추구하길 택했다. 그리고 이야기한다.

비록 이번 작품에서는 진실을 노래하지 못했지만, 
계속 해서 진실을 노래하기 위해 글을 쓸 것이라고.

이 엔딩이 전하는 메세지는 강렬하다.
진실은 '희망'이라는 이름을 내비치며 그 자리에 계속 남아있다.

이 메세지가 전해질 때, 가슴한 켠이 꽉 차는 듯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묵직함이었다.



기타, 이런 저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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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따로 언급할 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이야기들은 아니라서 단락을 나누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엔 애매한 부분들이 몇 가지 있다. 일종의 아쉬운 점들인데 1) 극이 전하고자 하는 젠더관의 불투명성2) 복잡하고 약간은 작위적인 서사이다.

먼저 젠더관이 불투명하다는 이야기는 이 극이 초연과는 다르게 두 여성배우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이 극은 남성배우가 남성 인물을 연기한 초연과 달리 두 명의 여성 배우가 남성 인물을 연기한다. 사실 배우들의 연기는 무척 좋았다. 백현주, 김신록. 두 배우는 극 중에서 말 그대로 그냥 한 사람의 볼로디아와 한 사람의 스카르파로 변신했고, 나 역시 여성배우가 남성인물을 연기한다는 사실에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문제는 배우가 아니었다. 이 극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젠더관이 불명확하다는 사실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 극의 여러 설명들을 찾아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삶과 예술 그 어느 것이든 ‘진정한’ 자기 목소리를 찾는 일에 남녀의 구분이 필요할까?

또한 초연과는 달리 여성 배우들이 남성 배역을 연기함으로써 인물과의 거리를 유지한다. 성공한 작가와 원로 비평가를 묘사함에 있어서 그들을 남성으로 간주하고 있는 원작의 내용은 여성 배우들에 의해 독특한 울림을 획득한다. 여성의 신체와 목소리로 구현하는 남성 역할은 우리에게 텍스트를 이해하는 새로운 감각을 부여함으로써 우리의 상상력이 관습과 선입견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안내한다.


이 연극을 보든, 보지 않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애초에 구분을 할 수도 없고, 구분이 필요하지도 않은 문제다. 나는 도대체 왜 이런 멍청한 문장이 이 극을 설명하는 메인 텍스트가 되었는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배우들의 연기는 이상적인 젠더관을 제시한다. 그들의 연기는 남성인물, 여성배우라는 젠더 개념에서 탈피해있다. 그들은 그저 백현주, 김신록이라는 배우로, 볼로디아, 스카르파라는 인물로 존재하며, 여성배우가 남성인물을 연기한다는 설정 아래 파생될 수 있는 미러링, 어색함 등을 모조리 뛰어넘어버린 단계에 도달해있다. 그들은 연기는 이미 젠더의 이분법으로 남녀의 특성을 나누려는 얕은 잔꾀를 넘어, 한 개인이 젠더에 구애받지 않고 그저 한 인간으로 존재하는 이상적인 젠더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성 배우가 남성 인물을 연기한다는 설정 아래, '여성 배우들에 의한 독특한 울림'이라던가, '여성의 신체와 목소리로 구현하는 남성 역할' 따위의 표현으로 억지로 정의된 남성성과 여성성을 부각하려는 시도, 그리고 이를 마치 진보적인 젠더관으로 포장하려는 시도 자체가 굉장히 불쾌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슈몰이를 통해 관심을 얻으려는 얕은 마케팅 수법 같았다. 이미 젠더 개념을 탈피한 단계의 참 좋은 배우와 공연을 왜 굳이 저런 프레임에 끼워맞추려는 것인가. 아무리 좋은 콘텐츠라도 전달 방식이 중요한 법인데, 저런 식의 접근은 굉장히 실망스러웠다. 젠더 프리 캐스팅 자체가 신선한 개념이긴 하지만, 이를 올바르게 소비하고 소화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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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로 아쉬웠던 점은 복잡하고 약간은 작위적인 서사다. 이건 덧붙일 필요없이 말 그대로다. 생생한 현장감이 극 자체를 단단히 지탱해주고 있기에 공연을 보는 당시에는 전혀 개연성에서는 문제를 느끼지 못할 수 있다. 나 역시도 그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이 서사를 찬찬히 살펴볼 수 있게되자 이 극은 너무 많은 내용은 압축적으로 강하게 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연극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 두 인물의 갈등, 끝내 남겨진 진실의 행방, 극안의 극인 또 다른 인물들의 갈등, 명예를 추구하는 극작가의 특징, 비평의 권력과 비평가의 조건, 2막 여인의 정체 등 제한 적인 스토리 내에서 많은 것들을 압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보니 전체적으론 서사가 탄탄해보이더라도 중간 중간 구멍이 존재하는 듯했다. 그러다보니 약간의 작위성도 보였는데, 볼로디아가 여인을 찾아 뛰쳐 나가는 장면이 대표적인 예였다. 약간은 뜬금없고, 당황스럽기도 한 전개. 극의 진행을 위해선 필요한 장치지만 관객들에게 충분한 이해를 바라기엔 부족함이 보였다. 한창 두 인물 사이의 진실 공방이 절정으로 달아갈 때, 갑자기 그 진실의 모든 것이 한 여인에게 집약되는 점, 그 여인이 갑자기 등장한 볼로디아의 하나뿐인 사랑이라는 점, 그녀를 찾기 위해 무대를 뛰쳐나가 사라져버리는 볼로디아의 마지막 모습은 지금생각하면 참 당황스럽다. 이런 서사를 자연스럽게 떠받쳐준 배우들의 연기와 현장감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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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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