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의 너] 다행이야, 알고 있어서.

글 입력 2018.08.25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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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 고백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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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 정말 오랜만에, 몇 년 만에 동창을 만났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우연히 마주쳤다.'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워 집 앞 편의점에서 투 플러스 원으로 행사 할인중인 캔커피를 사서 앉았다. 이런 저런 얘길 했다. 잘 지내냐고, 무슨 일 하냐고, 아 지금 이런 일 하는데 곧 그만둘 거라고. 그럼 관두고 뭐 할 거야, 묻는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일을 할 건 아닌데 그냥, 그림을 그릴 거야.



#013. 고백 둘

"이건 '내 일'이 아니란 걸 깨달았어요.
성격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건 원래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일에 끌려다녔다는 건 이제서야 알게 되었어요."

"00씨한테는 잘된 일이네요. 축하해요."

상사와 회의를 하는 도중, '내 일'이란 단어에 사로잡혀 버렸다. 사로잡혔다가, 풀려난 후에 천천히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이건 내 일이 아니야.' 그다음 결정은 어렵지 않았다.

그날 저녁 기도문에는 '열병 같은 게 끝난 것 같다.'고 적혀 있다. 다이어리에는 '온전한 나 자신이 된다는 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말 사소하게 느껴지는 하나에도 절대로 틈을 내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고 적혀 있다.



#014. 알고 있었어.

작년 겨울, 가까이 지냈던 친구와 생애 첫 절교를 했다. 좋은 경험이었다. 절교는 쉬웠다. 도무지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 날, 단톡방을 나왔을 뿐이다. 생각보다 유치하지 않았다. 동기가 확실했으니까. 이해를 바라는 마음도 없었다. 오직 나를 위한 절교였다. 같은 톡방에 있었던 다른 애들에게서는 그 날이 지난 후로도 계속 톡이 왔지만 그 애에게서 만큼은 오지 않았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는데, 그 애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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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좀 내지 그랬어, 같이 놀았던 다른 친구가 내게 말했다. 아니야, 나 말했어. 나한테 왜 그러냐고. 사과도 받았어. 걔도 알고 있었어, 잘못했다는 거. 그럼 뭐해, 반복됐어. 매번 화낼 수는 없었으니까 쌓였어. 이 모든 말을 그 애가 듣지 않아도 괜찮았다. 아예 모르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무난한 사람이라고, 어디에 있어도 그런 사람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조건에든 맞추는 데 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고,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맞출 필요도, 그럴 수 없다는 사실도, 그러다간 병이 난다는 사실도 알았다. 엄청 못나고 모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정말로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은 아니라고 하자.), 사람 사이에 꼭 한번은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슬프지 않은 끊어짐이었다.



#015. 나는 내가 될 거야

'나는 내가 되고 싶다'라는 문장에 사로잡힌 것도 그 즈음이었다. 나의 어떤 부분을 부정 당하는 느낌에 대한 반작용이었으리라. 한 끗 차이로 허세 같기도, 이상적인 말 같기도 했다. 원래 SNS란 그런 허세와 이상을 한 번에 녹여내어 오글거림을 즐기는 공간이라 생각하며, 인스타그램에 떠오른 문장을 그대로 옮겼다. "나는 내가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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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글을 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래 전 연락이 끊긴 친구의 인스타그램에서 인상적인 글을 보았다. 깜깜한 바다에 있는 인어공주가 저 위에 아른거리는 빛을 향해 손을 내밀고 헤엄쳐가는 그림과, 친구가 그때까지 몇 장의 이력서를 썼는지와 결과가 어땠는지에 관한 사실이 담담하게 적혀 있었다. 신이 있어서 당신이 내 앞길을 다 막는 거래도 보란 듯이 끝까지 헤엄쳐 가겠다고, 이런 나를 보면 당신이 혹여 도와줄 수도 있지 않겠냐는 꿋꿋한 의지의 말과 함께. 댓글 창이 닫힌 그 게시글에 그러나 한 마디라도 건네고 싶어 디엠을 보냈고, 친구도 내 글을 응원하는 말로 답했다.

나는 얼마 후, '내가 될 거다'라고 호기롭게 쓴 글을 지웠다. 지금 친구 인스타를 다시 찾아보니 인어공주 글도 사라지고 없다.



#016. 인정할 때

온전한 내가 되고 싶은 마음 한 켠엔 두려움도 있었던 것 같다. 옳지 않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걸 용납할 수 있는 그릇이 안 되는 사람은 매력이 없는 것 같아서. 틈을 내어주지 않는 사람은 팍팍한 사람인 것 같아서. 하지만 오히려 그러지 않기를 바라며 원하지 않는 관계에도 안주하려고 하고, 원하지 않는 일에도 끌려다녔던 게 아닐까, 아무튼 결과적으로 나는 관계를 끊고, 일을 끊어내었다.

어쨌건 지금은 의지와 반대로 가버리는 내 모습을 보며 스스로의 어쩔 수 없는 부분을 인정하지 않고는 안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내가 된다'는 주문이 효력을 발휘한 걸까. 파국인지, 기회의 땅으로 가는 징검다리인지, 나는 모른다.



#017. 잘 했어, 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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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몰라도, 잘 했다고 해주었다. 같이 튀김을 먹은 친구도, 닭을 먹은 친구도, 커피를 마신 친구도, 멀리 있지만 근황을 알던 친구도 모두 다. 잘 했어, 잘 됐다. 못난이의 얘기를 들어주는 모두에게 매일매일, 감사합니다. 부디 이제야 내 진심과 마음을 마주하고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기를.



#018. 알고 있었어?


누군가로부터 '사람을 정확히 본다'는 칭찬을 들었다는, 엄마의 자랑이 끝나자마자 내가 물었다. 기대 가득한 마음을 담아 눈을 반짝이며,


"그럼 엄마, 나는 어떤 사람인데?
한 번 정확히 봐봐."

"너는… 절대 현실과 타협할 수 없는 애야.
근데 그러느라 지금 힘든 거고."

"와, 엄마 알고 있었어?"

"그래도 나는, 네가 타협을 좀 했으면 좋겠다."

"현실이 뭐야? 현실이 뭔데? 뭐지? 뭘까?"

"…그냥, 주어진 상황에 맞춰서 사는 거지."

"엄마는, 어떻게 날 그렇게 잘 알면서…
어째서 불가능한 걸 바라는 거야?"

"…"


그래도 나를 알고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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