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삶과 죽음을 대하는 자세, 이방인 [공연]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글 입력 2018.08.16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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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이다. 2016년의 11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지금은 아침형 인간이라 언제 잠이 들든지 상관없이 아침 8시만 되면 눈이 번쩍 뜨이곤 하는데, 예전에는 일요일이면 평일에 못 잔 잠을 몰아서 늘어지게 자느라 늘 오후에 일어났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날은 아침에 눈이 뜨였다. 혼자 서울에서 자취하며 공부를 하는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났을 때와 잠들기전에 부모님께 전화를 하는 습관이 있어 일찍 일어난 그 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전화를 받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엄마는 울면서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나에게 전했다.

그때까지는 주변의 누군가가 죽은 적이 없다. 아빠의 부모님인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께서는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막내인 아빠가 열살도 되지 않았을 무렵 돌아가셔서 나의 미래의 슬픔을 덜어주는 대신 아빠의 슬픔이 되어버리셨다. 아빠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말하시지만 아직 그때만 생각하면 잘 챙겨주지 않는 형제들 아래에서 부모님없이 상당히 힘든 시기를 보내왔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21살이 될때까지 장례식 한 번 가본 적이 없고 제사도 지내본 적이 한번도 없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을 때 직감적으로 고향으로 가야하는구나 알았다. 외할아버지는 예전부터 죽음의 경계에 서있으신 분이었다. 맹장이 터진 것을 몰라서 일주일이나 지나버려 복막염이 되어 목숨에 위협을 받기도 했고, 동네 주민들이 길에다 버린 쓰레기를 불태우다가 부탄가스 폭발 사고가 나서 멀리까지 날아가 버리시기도 했었다. 고향에는 제대로 된 병원이 없어 시외로 입원을 하러 가셨고 그때마다 엄마는 할머니댁에 우리 세자매를 맡기셨었다. 가끔씩 고향으로 우리를 보러 오는 엄마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생생하다.

일요일 아침의 고속터미널은 이미 오후4시까지 차가 모두 매진되어있어 나는 기약없이 터미널에서 앉아 기다려야 했다. 자리가 혹시 취소되지는 않았나, 자꾸만 가서 티켓발매기에서 확인을 해보기도 하고 기약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기다리다가 겨우 고향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 10시에 가까운 시간이 되었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자마자 할아버지의 얼굴이 그려진 네모난 액자가 보였고, 그 주변에 늘어진 하얀색의 국화들, 그리고 양초들. 그리고 왼쪽 오른쪽으로 일렬로 앉아있는 우리 부모님과 친척들이 보였다. 초를 하나 들고 꽂고 차례를 지내라고 하기에 시키는대로 했다. 형식같은거, 인사를 하는 방식 따위 하나도 몰랐지만 나는 초를 꽂고 인사를 하기 위해 엎드리자마자 속에서 엄청난 울음이 올라왔고 엎드려서 한참을 울었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나서는 다른 사람 앞에서 그렇게 운 적이 없는데 그런 점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주변에 잘 모르는 친척이 할아버지가 애들한테 얼마나 잘했는데, 저렇게 우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는 게 떠오른다.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잘했었나? 그런 건 잘 모르겠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친한 편이다. 어릴때부터 5분도 안되는 거리에 가까이 살아서 그런가 존댓말을 한번도 한 적이 없고 몸이 약해서 2주일에 한번 쉬는 토요일마다 병원에 같이 가서 물리치료를 받고 영양제를 함께 맞고 돌아오기도 했다. 학교를 마치면 엄마가 할머니집에 있으니 할아버지할머니네 집까지 가서 저녁먹기 전까지 놀다 오는 게 그냥 일상이었다. 가끔씩 학교가는 길이나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와 마주치면 할아버지께서 용돈 천 원씩 주곤 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천원이지만 그 시절의 천원은 김밥 한 줄도 사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언제부턴가 할아버지가 치매가 걸리셔서 우리를 길에서도 못 알아보게 되면서부터 가슴아프긴 했지만, 할아버지는 습관처럼 밖에 나가셔서 정자에 앉아계시곤 했다. 가장 높은 정자에 의자를 갖다놓고 그 위에 앉아있는 할아버지의 자리를 우리는 왕자리라고 불렀다. 다른 할아버지들은 그냥 평평한 맨땅에 의자위에 앉아있는데 그런 모습과는 다르게 아주 고고해 보였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앉아계시는 거였지만.

우는 나를 달래고 저녁밥을 먹이라고 해서 울면서 저녁을 먹었다. 눈물섞인 밥은 무슨 맛인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밥을 먹으면서 나는 동생과 언니가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서 6년간 집에서 기른 고양이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슬픔이란 게 더 이상은 커질 수 없는지 더 충격을 받을 수도 없었다.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아 다행히 할아버지를 관에 넣기 전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는 의식에 참여할 수는 있었다. 그 의식을 장례지도사가 뭐라고 설명해주기는 했지만 그런 처음 들어보는 단어는 내 기억속에 남아있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할아버지였다. 지도사의 안내를 따라간 지하의 방 안에서 할아버지는 아주 말끔한 얼굴로 누워있었다. 평소에 불그스름한 얼굴핏기가 하나도 없이 창백하다기보다는 노랬다. 평소에 주무실때와 같은 얼굴이라 깨워도 금방 일어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는데 그 상태가 돌아가신 상태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장례지도사가 곡을 하라고 했는데 우리들은 아무도 곡을 할 줄 몰랐다. 누군가 돌아가신 게 나뿐만 아니라 엄마에게도, 이모에게도, 삼촌에게도, 다 처음인 것이었다. 답답해하는 장례지도사는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지라고 했다. 나는 용기를 내서 할아버지의 귀를 만졌다. 아주 보들보들했다. 죽음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빼앗아 가지는 않는구나.

다음 날은 장례식장에서 오는 사람들을 만나고 우는 엄마를 보고, 거기서 밥을 세끼를 먹고 씻지도 못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 다음날인 셋째날은 곡소리를 내는 관광버스 비슷한 차를 타고 할아버지가 평생을 살아온 우리동네를 돌았다. 버스를 내려서 할아버지가 평소에 걷던 거리를 걷고, 앉아있던 왕자리를 구경하며 울고 집으로 돌아와 할아버지의 밥그릇을 깨트렸다. 그리고 화장터로 가서 할아버지의 시체를 태웠다. 불이 아주 뜨거운 소각기로 들어보낼 때 장례지도사를 정말 때리고 싶었다. 왜 사람을 그렇게까지 고통스럽게 만드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수없어서 울기만 했다. 한시간쯤 뒤에 이미 자취를 알아보기도 힘든 하얀색 뼛가루가 나왔을때도 나는 울기밖에 할 수 없었다. 그때 장례지도사는 나에게 이제 그만 울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나이가 많이 드신 할아버지의 죽음에 나처럼 많이 우는 사람이 없었나보다. 할아버지랑 같이 살았냐고 묻길래 아니라고 말했다. 그 사람과 우리의 만남은 거기까지였지만 나는 나에게 울지말라고 말하던 그 얼굴을 아직도 기억한다. 자기가 뭐길래 나의 슬픔을 거기서 멈추려고 하는 것이지? 그 슬픔이 멈추라고 해서 멈추어지는 것인가? 무례한 사람이었다.

근처 우리집 고양이의 무덤이 있는 산에 할아버지의 뼛가루를 뿌렸다.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우리의 몸에 다시 다 붙어버렸다. 할아버지가 우리곁을 아직 떠나고 싶지 않나보다, 라고 누군가 말하는 소리에 또 울었다. 그 뒤에도 한동안 그 곳을 갈때마다 나는 목이 메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6개월이 넘게 나는 아주 큰 우울증을 앓았다. 과제를 다 하고 집에 돌아오면 깜깜한 고시원 방 안에서 불도 켜지 않고 배가 고파도 아무것도 먹지 않고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죽어버린 고양이를 생각했다. 그동안 내가 여기서 바쁘게 사는 동안 놓쳐버린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도 곧 죽을거라는 생각에 새로운 사람을 사귀지 못했다. 남자친구에게도 이 이야기를 하면서 "오빠도 언젠가 죽을 거잖아."하면서 서럽게 울었는데 남자친구는 그 말이 자기가 들은 말중에 너무 충격적인 말이었다고 나중에 말했다.

*

다들 상처란 건 시간이 해결해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일도 있으며, 낫지 않는 상처도 있다. 상처를 해결하려면 본인이 상처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수밖에 없다. 나는 아직도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이 사라지고 나서 슬퍼할 내 미래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파릇파릇 자라나는 아기고양이를 보면서도 이 아이들이 사라지고 나면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부터 떠올리며 벌써부터 슬퍼하게 된다. 자기방어적인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울증을 앓게 되면서 죽지 못해 살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으로 나는 이렇게 슬프고 괴로운데 나까지 죽으면 부모님께서, 가족들이 얼마나 슬퍼할까. 두려웠다. 나때문에 누군가 아픈 것도 싫었다.

더이상 친구의 술자리에 가지 않게 되었고, 누군가 만나자고 해도 계속 회피하기 일쑤였다.

어제, 엄마와 아빠와 산책을 하면서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을 바라봤다. 물고기들은 오른쪽을 보고 무리지어서 끝없이 뭉쳐져 이동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읽은 '연어'라는 책처럼 어디론가 가기 위해 그들은 그렇게 힘들게 사는걸까 생각이 들어서 엄마에게 "쟤들은 왜 살고있을까?"물어봤다. 엄마는 "즈그 엄마가 낳았으니까 살고있지. 우리도 어디 살고싶어서 살고있나. 죽는 건 무서우니까 사는거지."라고 했다.

그 순간 나는 그 고독함과 외로움을 구원받은 것 같았다. 나만 그렇게 사는 건 아니구나. 나만 삶의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니구나. 삶의 목적이 없어도 되는 거구나. 김연아나, 뭐 국가대표 선수들처럼 불타는 야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거나 스티븐잡스처럼 자기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천재성같은 것 없이, 버킷리스트를 이루려고 발버둥치지 않고도 그냥 엄마가 낳아줬기 때문에 살아도 되는거구나. 우리엄마도, 우리 가족들도, 그리고 세상에 있을 수많은 물고기들과 사람들처럼 나도 그렇게 살고 있고, 그래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닌 대화일수 있지만 나에겐 아주 큰 위로였다. 그것도 우리엄마가 말해서 그렇게 느껴진 걸지도 모르겠다.


2017 초연 사진1.JPG
 

이방인에 나오는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그 어머니의 시체앞에서 밀크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한대 피고, 다음날 여자를 만나 유희를 즐기기도 한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사실에서 세상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정작 사람을 죽여서 잡히지만 법정에서 그에게 죄를 묻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에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죄에 대한 책임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뫼르소를 '이방인' 취급할 생각은 없다. 나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 이렇게 슬퍼하지만 그 사람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아마 그의 삶에서 가족이란 건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 거겠지. 그의 삶은 어쩌면 슬픔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감각해져 있는 건지도 몰라.

이방인 연극을 본다고 했을 때 엄마에게 이방인 책을 달라고 해서 읽었다. 우리집에 원본이 없어서 요약본으로 된 단편집만 조금 읽어봤는데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을 제대로 알 수 없어서 많이 아쉬웠다. 연극을 보면서, 뫼르소의 마음은 진짜 어떤지 느껴보고 싶다.





이방인
- L'Étranger -


일자 : 2018.08.21(화) ~ 09.16(일)

시간
평일 20시
주말 15시
월요일 쉼

장소 : 소극장 산울림

티켓가격
전석 40,000원

주최/주관
극단/소극장 산울림

관람연령
만 15세이상

공연시간
105분




문의
극단 산울림
02-334-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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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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