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세월은 막을수 없는거야, 너를 기다려주지 않을거고 - [연극] 쪽빛 황혼

글 입력 2018.08.16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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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지금 내려가야 돼요. 기차는 9시 30분인데, 에스컬레이터가 고장 나서 계단으로 내려가셔야 돼요. 아버지 다리 안 좋으시잖아요. 그 다리로는 지금 내려가야 시간에 맞출 수 있어요.”


서울역에서 부산행 기차를 기다리는 나는, 조금이라도 핸드폰을 충전하기 위해 동그란 의자 위에 앉아있었다. 내 옆에 좁은 자리가 나자, 한 여자와 아들 그리고 할아버지는 내 옆으로 왔다. 할아버지를 보고 무의식적으로 최대한 옆으로 비켜드렸지만, 아들과 여자는 앉을 수 없었다. 더운 여름날, 할아버지의 짐을 끌어안고 있는 아들은 일그러진 표정이였고 여자 역시 말귀를 제대로 못 알아듣는 아버지에게 잔뜩 짜증이 났다.

귀찮은 존재.

우리에게 노인들이란 어쩌면 그런 존재일 수 있을 것이다. 유일하게 살아계신 88살의 나의 외할머니를 보러 어머니는 의무적으로, 혹은 한동안 못 갔으니까 밥이라도 사드리려고 할머니 집을 방문한다. 늘 건강할 것 같았던 우리 할머니는, 조금씩 치매기를 보이고 있다. 같은 이야기를 수십번씩 하며, 방금 나에게 용돈을 줬으면서 안 줬다고 또 주신다. 그러면 이모들과 엄마는 어서 병원 가서 치매 주사를 맞으라고 닦달한다.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할머니 집 밥은 늘 내 입맛에 맞지 않으며, 혹여나 벌레가 나올까 봐 발 뻗고 잠들지 못하는 곳이다. 자고 가라는 할머니의 말에, 찡그린 표정을 지었던 날 할머니는 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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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노인들이 폭염 속에 갈 곳이 없어 인천공항으로 향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여행을 가는 20-30대들과 매우 대조적으로, 그러니까 마치 다른 섬에 사는 사림들처럼 노인들은 그들만의 휴식공간을 찾아 하루를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캐리어를 끌 때, 노인들은 헐렁한 가방을 들었다. 젊은 사람들이 핸드폰으로 뭘 먹을지 검색할 때, 노인들은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너무나 극명하게 갈린 인천공항을 보면서, 그리고 혼자 사시는 내성적인 우리 할머니가 경로당을 다니는 것을 보면서 이 연극 <쪽빛 황혼>이 떠올랐다. 그들은 정말 더위를 피하기 위해 어디론가 떠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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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위해 논과 밭을 다 팔고 서울로 올라온 노인부부. 그들은 노인들에게 속여파는 장수탕을 샀고, 며느리에게 구박을 받는다. 쾌쾌한 냄새가 난다느니 하는 야박한 말조차 노인들은 견뎌낸다. 노인들은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시골로 돌아가고 싶지만, 논과 밭을 다 팔아버렸는데 갈 곳이 있겠는가. 설상가상으로 할머니에게는 치매가 오게 된다. 대변도 아무 데나 싸버리고, 밥을 먹었으면서 먹은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며느리는 남편에게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자고 한다. 하지만, 남편은 그럴 수 없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내를 보내려고 하는 며느리에게 화를 낸다.

아무리 저렇게 돼도. 네 애미야. 그렇다. 아무리 늙어도, 그들은 자신의 마을의 사소한 것 조차 즐거워했던 부부였으며 힘들게 키운 아들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그 세월은, 걷기 힘들어진 다리가 아닌 늘어난 얼굴의 주름살이 아닌. 그 사람 자체에 녹아있는 무게이다. 평생을 바쳐 키운 자식들에게서 돌아오는 건, 따가운 눈총뿐이었다. 자꾸만, 돌아가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생각나서 눈물이 흘렀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용돈 때문에 싸웠던 부모님의 싸움, 어머니를 못마땅해하신 할머니를 싫어했던 우리 자매들의 대화, 그냥 모든게 부질없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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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늙는다. 저 근육질 몸매의 남자도, 저 화려한 몸매의 여자도. 우리의 청춘도, 가는 세월을 못 잡는 것 처럼 영원한 것은 없다.

그들이 극중에서 가면을 쓰고, 노인으로 변하는 모습에서 결국 우리도 다 늙게 될 것이라는 걸 극명하게 보여줬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토록 노인에게 야박할까. 나 조차도 지하철의 노약자석에 대해 한 때에는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그리고 앞서 밝힌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이야기에서도. 그리고 <쪽빛 황혼>이 보여준 정말 현실적이고 단편적인 이야기조차 우리나라에서 아주 흔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우리도 언젠간 늙게 될 거라는 걸 매순간 잊고 지내서 그런것일까? 지금의 사고방식이 내가 늙을 때까지 이어진다면, 나도 어느순간 노약자석에서 양보를 바라는 할머니가 될수도, 아니면 며느리에게 그저 짐짝 같은 존재가 될 수 도있다. 이 연극을 보고, 내 할머니뿐만 아닌 우리나라의 모든 노인들에게 친절해야 하며 그들 역시도 우리처럼 아름다운 청춘을 보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개인적으로 이 연극에 대한 잔상도 많이 남았다. 나는 어떠한 연극도 맨 앞줄에서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래서 배우들의 사소한 얼굴 표정과 움직임에 집중해본 적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쪽빛  황혼>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진싱으로 남은 공연이었으며,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아야 북을 치면서 즐거워하는 사람처럼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까지 들게 했다. 그리고 마당패 우금치를  보면서, 나도 어딘가에 속해서 저렇게 멋진 공연을 하고 춤을 추고 관객과 호흡하고 싶다는 마음이 정말 처음으로, 들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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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 공연 <쪽빛 황혼>을 본 다음 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영화를 보러 갔다. 잔인한 살인마들이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최악의 살인마 안톤 시거가 노인인 벨과 마주했을 때 그를 죽이지 못했던 이유, 그리고 벨이 은퇴를 하고 찾아간 또 다른 노인에게서 나오는 대사들. 왜 안톤 시거가 우연히 만난 노인들은 하나같이 친절했을까. 세월을 스쳐가지 않았다면, 나오지 못할 연륜과 대사들은 생각의 여지를 남겼다. 이 모든 것을이 하나의 공연과 이어질 수 있었던, 정말 짜릿했던 하루였다.


세월은 막을 수 없는거야.
너를 기다려주지 않을거고.
그게 "허무"야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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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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