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엥?' 하게 만드는 연극_춘향

글 입력 2018.08.15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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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스토리들은 어느 정도의 진부함을 지니고 있다. 진부함이 사실 나쁘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진부하다는 건 이미 우리에게 꽤나 익숙해져 있다는 뜻이고, 듣는 사람을 꽤나 편안하게 만든다. 그럴 수도 없지만, 매일매일 너무나도 다른 이야기들을 듣고 충격을 받는 것도 피곤한 일이지 않겠는가.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 진부하다고 여겨지는 대표적인 이미지나 스토리들이 있다. 재벌 2세로 태어나 젊은 나이에 대기업의 실장이 된 남자와 가난하지만 씩씩하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여자의 러브스토리. 친하게 지내던, 혹은 웬수가 따로 없던 친구가 알고 보니 이복형제인 이야기. 고전도 마찬가지다. 장희빈, 심청, 춘향, 이순신 등과 같은 인물들은 이미 여러 차례 드라마화 혹은 영화화 된 적이 있기 때문에 전혀 참신한 소재가 아니다. 하지만 한국적인 소재들을 완벽에 가까운 고증을 해내는 방식이든, 큰 틀만 유지하고 세부적인 설정들을 변형시키는 방식이든지 간에 우리네 것을 꾸준히 재생산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것'이라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매력적’이어서 끌릴 만한 작품들을 만들 필요가 있다. 전자의 애정은 오래가기 힘들지만, 후자의 애정은 한 번 느끼기 시작하면 그 여운이 짙게 남기 때문이다. 효녀 심청의 이야기가 대단한 작품성과 매력으로 무장한다면, 이야기 자체의 진부함은 얼마든지 상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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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춘향>을 제작한 극단 떼아뜨르 봄날이 해온 일들이 사실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장희빈과 숙종의 사랑이야기를 소재로 한 <왕과 나> 같은 경우도 극단 떼아뜨르 봄날은 왕가의 이야기라고 해서 무겁고 진지하게 분위기를 잡지 않고 그저 남녀로서 서로에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끌리는 모습을 솔직하고 때로는 방정맞게 표현한다. 때문에 이번 연극 <춘향>에 기대했던 것도 틀을 깨는 연출과 스토리였음은 물론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연극 <춘향>은 분명 기대감을 충족시켜줬지만, 그럼에도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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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춘향이'라고 했을 때 관객들은 (조선시대의 미녀가 실제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의 미인상에 맞는 하얀 피부에 큰 눈, 깡 마른 몸매의 배우를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극 < 춘향 >에서 춘향이 역할을 맡은 배우 이춘희씨는 전형적인 미인상에 맞는 배우는 아니다. 본인들도 관객의 예측을 빗겨나가는 선택을 했음을 잘 알고 있는 듯 했는데, 중간중간 '그래서 누가 춘향이지?' 하고 묻곤 했으며 그 때 마다 관객들도 꺄르르ㅡ하고 웃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외모 뿐만 아니라 춘향의 성격도 마찬가지다. 춘향의 기존 이미지가 '도도하고 정조를 지킨 여자'였다면, 연극 < 춘향 >의 춘향은 분명 도도하지만 정조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기존 춘향전에서 춘향이는 기녀임에도 지아비인 이몽룡을 기다리다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하는 바람에 갖은 곤욕을 치른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춘향이란 응당 정조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에게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연극 속 춘향이도 이몽룡을 기다리기는 하지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다른 남자에게 흔들리기도 하며, 그 남자에게 직접 자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녀가 어떤 남자를 기다리든, 거부하든, 받아들이든지 간에 선택의 기준은 사회가 요구하는 정절이나 어머니 월매의 강요도 아닌 춘향 본인에게 있는 것이다. 이렇듯 춘향에게 주체성을 부여하는 일은 관객들을 엄청난 혼란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스토리를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간다. 연극 < 춘향 >은 춘향전을 완전히 새로 쓰는 방식으로 춘향이를 되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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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아쉬웠던 건 춘향이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연극 < 춘향 >의 캐릭터들이 기존과 동일했다면 별다른 설명없이도 이들의 감정선과 행동을 이해하는 데 별로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춘향이 뿐만 아니라 변사또와 이몽룡 역시 극에서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되버리기 때문에 그들의 말과 행동이 굉장히 뜬금없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었다. 이몽룡이 갑자기 찌질해진다거나, 변사또가 갑자기 스윗해진다거나 하면서 말이다. 일부러 의도한 연출인지도 모르겠으나 이로 인해 연극이 보여주는 실험이나 시도가 조금 쌩뚱맞아 보이는 측면이 있었다.
 


어쨋든 연극 < 춘향 >은 보는 내내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엥?'하는 장면들과 부분들이 많았다. 신선하긴 했으나, 그만큼 관객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관객들의 후기를 읽어보면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을 알 수 있다. 나 역시 연극 < 춘향 > 이 무조건 재밌었고 즐거운 작품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과 음악적 요소들 덕분에 극에 충분히 몰입할 수 있었고, 또 새로운 춘향의 모습을 보는 게 색다른 경험이었음은 물론이다. 앞으로도 극단 떼아뜨르 봄날의 작품이라면, 언제든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극장을 찾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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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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